[이상우의 실록소설 대호(大虎)김종서 51] 첩한테 절하라고
[이상우의 실록소설 대호(大虎)김종서 51] 첩한테 절하라고
  • 이상우 언론인·소설가
  • 승인 2023.1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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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가 회령 입구에 다다랐을 때 초라한 장사 행렬을 만났다. 소달구지에 가마니 뙈기로 시신을 싣고 가는 장례 행렬이었다. 뒤에는 젊은 여인과 다섯 살이나 됐을 어린 상주가 울면서 따라가고 있었다. 사방은 눈으로 하얗게 덮였는데 저렇게 초라한 장례를 치르는 가족이 언 땅을 어떻게 파서 시신을 매장할지 걱정이 되었다. 장례를 거들어주는 이웃도 한 명 없었다.

“저 장례에 필경 곡절이 있을 터이니 알아보아라.”

김종서가 수행한 이징옥을 보고 명했다.
이징옥이 한참 있다가 돌아와서 보고했다. 

“박호문 절제사의 짓이랍니다.”
“박호문의 짓이라니?”

김종서가 되물었다.

“저 시신은 엄돌금이라는 사람인데 박호문이 죽였답니다.”
“무슨 죄를 지었는가?”
“죄를 짓지 않았답니다.”
“그 무슨 해괴한 말인가. 내가 직접 물어보지.”

김종서가 죽은 사람의 아들인 듯한 대여섯 살 된 아이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네가 망자의 아들이냐?”

김종서의 물음에 아이가 겁을 먹고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어르신은 뉘신데 그러십니까?”

상복을 입은 아이의 어머니도 겁을 잔뜩 먹은 표정으로 김종서를 경계했다.

“나는 이곳 조선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김종서입니다. 듣자 하니 박호문 절제사의 짓이라고 하는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김종서가 묻자 여인은 눈물만 흘리고 좀체 말을 하지 않았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상감마마께 여쭈어 풀어줄 터이니 자세하게 말해 보시오.”

이징옥이 거들었다. 여인은 몇 번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 아이 아버지는 회령에서 농사를 짓고 소를 치며 사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름이 엄돌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이징옥이 말을 재촉했다.

“어느 날 박호문 절제사의 첩이라고 하는 여자가 길을 가는데 우리 집 양반이 소를 몰고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요?”
“소를 빨리 비켜주지 않는다고 절제사의 첩이 아이 아버지의 뺨을 때렸답니다.”

그 일로 엄돌금은 박호문 앞에 끌려갔다. 박호문이 엄돌금에게 첩한테 큰 절을 올리고 사죄하라고 했으나 엄돌금은 명을 거부했다. 화가 난 박호문이 형방을 시켜 매질 잘하는 종놈 셋을 데려 오라고 했다.

“너희들은 저 건방진 놈을 형틀에 묶고 셋이서 교대로 때려라. 죽을 때까지 때려라. 한 식경내로 죽지 않으면 너희들을 형틀에 묶을 것이다.”

세 노비는 엄돌금을 형틀에 묶고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던 엄돌금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처음에는 비명이라도 질렀으나 그것도 얼마가지 못하고 사지가 축 늘어지고 말았다. 엄돌금이 죽은 뒤에야 노비들은 매질을 멈추었다. 그리고 엄돌금의 시신을 동구 밖에 내다버렸다.

“이런 잔인무도한 사람이 있나.”

김종서는 탄식하며 망자의 아내와 아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군사를 시켜 장례를 잘 치러 주라고 명했다.

“주인이 죽었으니 이제 소는 누가 키우지요?”

이징옥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김종서가 회령 박호문 절제사의 본영에 도착하자 박호문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도절제사께서 기별도 없이 이 누추한 곳을 찾아 주시다니오.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박 절제사야말로 그동안 수고가 많으셨더군요. 최윤덕 장군의 요청도 못 들어줄 정도로 바쁘셨더군요.”

김종서가 일부러 비꼬았다.

“그럼요. 회령이 워낙 방비가 부실해서 군사들이 머물 막사도 제대로 없어서 지금 건축을 막 시작했습니다.”
“막사를 새로 짓는다고요?”

김종서는 회령에 오기 전에 박호문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호화 병영을 짓는다고 백성들의 재물을 강제로 징수하고 노역에 무리하게 동원해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말이었다.

“막사를 아주 튼실하게 짓는 모양이지요? 한 번 돌아보아도 되겠습니까?”

김종서는 내친 김에 현장을 확인하고 싶었다. 회령에는 5백 명 안팎의 백성이 살고 2백여 명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다.

“원로에 피로하실 텐데, 술이나 한 잔 하시면서 목을 축이신 뒤에 보셔도 충분합니다.”

박호문은 달갑지 않은 듯이 말했다.

“아니오. 변경 방위와 직접 관계된 일이니 어서 앞장서시오.”

박호문은 하는 수 없이 병영을 짓고 있는 현장으로 김종서를 안내했다.
그 곳의 광경을 본 김종서는 기가 막혔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터를 닦아놓고 함흥 감영 동헌보다 더 우람한 건물을 짓고 있었다.

“아니? 저것이 병사들이 머물며 오랑캐를 방어할 막사입니까?”

김종서가 박호문을 돌아보며 물었다. 오랑캐와 맞붙어 조선 땅을 지켜야 하는 전쟁터에 이렇게 호화로운 동헌마루가 왜 필요한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군영이란 원래 위엄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오랑캐들이 우리 본영을 보면 기가 팍 죽을 것입니다.”

김종서는 박호문의 변명을 들은 척도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 집을 오늘 중에 모두 헐어버리고 동원된 백성들은 모두 돌려보내시오.”
“예?”

박호문이 깜짝 놀라 입을 딱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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