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우의 실록소설 대호(大虎)김종서 38] 기생의 꿈 때문에
[이상우의 실록소설 대호(大虎)김종서 38] 기생의 꿈 때문에
  • 이상우 언론인·소설가
  • 승인 2023.08.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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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 무리들이 밤새 행패를 부리고 있는 동안 성안의 송희미는 눈과 귀를 막고 있었다. 성 밖에서 백성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고, 부녀자가 무참히 짓밟히고 피를 흘리며 당하고 있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새벽녘이 되어도 만행은 그치지 않았다. 밤새 치를 떨고 있던 이백경이 송희미 앞에 가서 호소했다.

“장군! 백성들이 저렇게 짓밟히고 목숨을 잃어가고 있는데 나라의 녹을 먹는 우리가 성문을 닫고 구경만 하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한시 바삐 성문을 열고 나가 백성을 구합시다.”

그러나 송희미는 묵묵부답이었다. 간밤 관기가 꾸었다는 흉몽이 그를 꼼짝 못하게 했다.

“장군! 성문을 열어주십시오. 소장 혼자라도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이백경은 아우성을 쳤다. 다른 비장들도 달려와 싸우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송희미는 끝까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여진족 놈들이 물러갈 것이다. 지금 나가서 섣불리 싸우다간 몰살하는 수가 있어.”

송희미가 미동도 하지 않는 사이 날이 거의 밝았다.
밤새 살아서 도망간 조선 백성들이 가까운 여진족 진지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간 이웃 마을은 여진족 중에도 홀라온의 산하에 있는 마을 진지였다. 

“홀라온 장군에게 연락 좀 해주세요. 이만주 군사가 경원성을 작살내고 있습니다. 제발 좀 살려 주십시오.”

도망 온 조선족은 숨 가쁘게 구원 요청을 했다. 홀라온 산하의 여진족 두목 첩목아는 상황을 자세히 물은 뒤 즉각 홀라온에게 연락을 취했다. 
급보를 받은 홀라온 진영에서는 가까이 있는 홍득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홍득희는 사다노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홀라온의 본영보다는 경원성이 훨씬 가까웠다.

홍득희의 홍패는 처음에 이만주와 우디거의 보호 아래 있었으나, 이만주가 조선의 부패한 관리들과 거래하는 것을 보고 홀라온의 세력 밑으로 들어갔다.

여진족 사이의 급보를 알리는 통신 수단은 불화살이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불화살을 쏘아 올려 위급을 알렸다. 조선에서는 봉화를 올려 급보를 전했지만, 봉화는 산꼭대기로 올라가야 하고, 불을 피우고 연기를 내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연락이 신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화살은 아무 곳에서나 하늘 높이 쏘아 올려 멀리서 볼 수 있기 때문에 통신 수단으로 제격이었다.

홀라온으로부터 경원성이 유린당해 조선 백성들이 죽어 간다는 급보를  받은 홍득희는 즉시 3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경원성으로 달려갔다.

날이 밝아 해가 뜨기 직전에야 홍득희 군사들이 경원성 정문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여진족의 행패는 계속되고 있었다. 여기저기 조선 백성의 시체가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목이 없는 부녀자의 시체도 나체가 된 채 뒹굴었다. 술이 취한 여진족 병사들은 그때까지 조선 여자들을 집단으로 괴롭히고 있었다. 울다가 목이 쉰 어린 아이들은 땅바닥에 엎어져 기진해 있었다. 눈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 성문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아니, 이만주 패거리가 저렇게 살육 판을 벌이고 있는데 조선 군사는 왜 싸우지 않고 성문을 닫고 있느냐?”

홍득희는 마상에서 칼을 뽑아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빨리 가서 물리쳐라.”

앞장 선 홍득희는 벌써 여러 명을 칼로 베었다. 기습을 당한 이만주의 여진족은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혼비백산했다. 밤새 술과 고기와 여자로 진탕 놀아나다가 기습을 당해 막을 엄두도 못 냈다.
여진족 중에는 처음에는 정신을 못 차렸으나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홍패에 덤비는 무리도 있었다.
“성문을 부숴라.”
홍득희가 성문에 불화살을 쏘면서 명령했다. 성문은 곧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홍득희는 성이 이미 함락되어 여진족이 안에 있는 줄로 알았다. 조선 군사가 패해서 모두 도망갔다고 생각했다. 
홍득희가 여진족을 상대하는 동안 잡혀 있던 조선 백성들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일부 여진족은 싸우지 않고 조선백성을 따라 도망하기도 했다. 수백 명의 여진족 군사가 30여 명의 홍패를 당하지 못해 삽시간에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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