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우의 실록소설 대호(大虎)김종서 48] 삭풍과 명월
[이상우의 실록소설 대호(大虎)김종서 48] 삭풍과 명월
  • 이상우 언론인·소설가
  • 승인 2023.1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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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홍득희는 일찍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밖으로 나가려다 옆에서 아직 잠들어 있는 김종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편안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더없이 정답게 느껴졌다.

‘아저씨, 어젯밤에는 고마웠어요. 아저씨 닮은 아이를 꼭 낳겠어요.’

홍득희는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살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주변을 살펴 볼 생각으로 막사 뒤를 돌아 강 쪽으로 갔다. 멀리 두만강 둑이 보였다.

홍득희가 어제 밤에 타고 온 말이 마구간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홍득희는 마구간으로 가서 말을 몰고 나왔다. 안장도 얹지 않고 말에 올랐다. 복장도 치마저고리 바람이었다.

홍득희는 말을 천천히 몰아 두만강 둑으로 향했다. 모퉁이를 돌자 둑 뒤에서 급히 말을 몰아오는 김종서가 보였다.

“득희가 벌써 일어났구나.”

김종서는 전복이 아닌 평상복 차림에 망건만 쓴 채 말을 타고 있었다. 그러나 활은 어깨에 메고 있었다. 잠 잘 때 외에는 항상 메고 다니면서 세종 임금의 명을 받들었다.
어젯밤의 일은 꿈속에나 있었던 일인 듯 아무 표정이 없었다.

“아저씨,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죄송해요.”

홍득희는 어젯밤 일을 생각하고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두 사람은 말을 탄 채 나란히 두만강 둑을 향해 걸었다. 둘 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향에 계신 마님이 많이 편찮으시단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라도 가서 병 수발 들고 싶습니다.”
“전하께서 걱정을 해주신다고 하더구나. 너까지 그런 생각을 했다니 말만으로도 고맙다.”
“전하께서도 아셨군요.”
“전하께서 아시고 충청 감사를 시켜 생선과 육류를 집에서 떨어지지 않게 대주고 의원도 자주 보내 나 대신 병을 돌보라고 황공한 명을 내렸다고 하더구나.”
“전하께서는 그렇게 자상하시군요.”
“그런데 몇 달 뒤 전하가 승정원 사람을 보내 상태를 알아보았는데 충청 감사가 전하의 명을 실천하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예? 충청 감사가 왕명을 어겨요?”
“주상의 명을 어기고, 주상을 속이는 신료들이 도처에 많더구나. 하지만 한 신하 한 사람의 향처를 돌보는 것은 나랏일이 아닌 사사로운 일이니 소홀히 할 수도 있겠지.”

김종서와 홍득희는 강둑에 올라섰다.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 너머로 광활한 평지가 멀리 아스라이 펼쳐져 있었다.

“저 너머에 공험진이 있겠지. 여기서 7백 리라고 하니 아득한 곳이구나.”
김종서가 말에서 내려서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모진 북풍이 옷자락을 차갑게 스치며 지나갔다. 홍득희 치맛자락도 북풍에 펄럭이었다.
“삭풍이 제법 차구나.”
“조선 북방의 화척들은 이 모진 삭풍 속에서도 세상을 원망만 하지는 않습니다. 조선 백성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 먼 하늘을 바라보니 전하의 소망을 꼭 이루어야 한다는 각오가 새롭구나. 시조 한 수가 생각난다.”
“그 시조 저한테 들려주세요.”

홍득희가 김종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김종서가 홍득희보다 키가 작아 슬쩍 내려다보았다.

“한번 읊어볼까.”

김종서가 낭랑한 목청으로 시조를 읊었다. 몸집보다는 훨씬 우렁찬 목소리였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김종서의 구성진 가락이 끝나자 홍득희가 박수를 쳤다.

“멋져요. 한데 일장검은 없잖아요. ‘일장검 짚고 서서’를 ‘큰 활 어깨에 메고’가 어떻겠어요?”
“음, 그게 멋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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