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우의 실록소설 대호(大虎)김종서 33] 남복 여두목
[이상우의 실록소설 대호(大虎)김종서 33] 남복 여두목
  • 이상우 언론인·소설가
  • 승인 2023.0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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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죄송해요. 사랑채로 내려갔으면 좋겠어요.”
어둠 속에서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이 홍득희의 윤곽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알았다. 사랑채로 가자. 먼저 가 있거라.”
김종서가 조용조용 말했다. 옆방에서 자고 있는 승규나 다른 노비들이 깨지 않도록 주의를 한 것이었다. 
홍득희가 나간 뒤 김종서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탕건을 쓴 다음 사랑방으로 내려갔다.
사랑방에는 등잔에 불이 켜져 있고 몇 사람이 와 있었다. 김종서가 들어서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석이와 한성의 동지들입니다.”
홍득희는 건장하게 생긴 평복 차림의 젊은 남자 둘을 소개했다.
“이 사람은 천시관이고 저 사람은 백규일이라고 합니다.”
홍득희가 소개한 두 젊은이는 엎드려 큰 절을 했다.
“취현방에 사는 천시관이라고 합니다.”
키가 크고 주먹 만한 코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저는 백규일이라고 합니다. 박호문 나으리의 사저에 매여 있습니다.”
백규일은 얼굴이 여자처럼 곱고 목이 길었다. 허약한 인상이었다.
“박호문의 집에 있다고?”
김종서가 백규일을 다시 보았다. 박호문은 심보가 고약한 무관으로 김종서를 여러 차례 모함한 상호군이었다.
“예. 박호문 상호군 나으리의 고약한 성미는 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
백규일은 김종서가 되묻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듯했다.
“아저씨, 정말 죄송합니다. 밤중에 산적이 집까지 찾아와 단잠을 깨운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꼭 드릴 말씀이 있고 해서....”
그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버님, 승규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지요.”
“별 일 없으니 올라가서 자거라. 다른 식구도 깨울 필요 없다.”
김종서의 말이 떨어지자 바깥이 조용해졌다. 승규가 안채로 들어간 것 같았다.
“득희야. 반갑기는 하다만은 이 무슨 괴이한 일이냐? 산적 두목이 관군의 대장 집에 찾아오다니. 그래 일행은 모두 어디 있느냐?”
“모두 송오마지가 인솔하여 사다노로 돌아갔습니다. 저와 석이만 한양으로 들어왔습니다.”
홍득희는 남자 복장에 흰 무명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매고 있어서 얼핏 보아서는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관노와 화척의 신분입니다. 모두 천민이지요. 천시관 아저씨는 아버지 대에 회령에서 한성으로 왔습니다. 원래 화척으로 소를 잡는 백정이었습니다. 아버지 대를 이어 도성 안에서 백정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천시관이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백규일 아저씨는 원래 관노가 아닙니다. 할아버지가 고려 때 벼슬살이를 했으나 역적으로 몰려 재산이 몰수되고 일가가 모두 노비로 전락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나한테 데리고 온 이유는 무엇인가?”
“이 사람들은 제가 사다노로 돌아가더라도 언제나 저와 연락이 됩니다. 평소에 한성의 정보를 이 사람들을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한성에는 조정에서 모르는 비밀 조직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화척의 조직이 제일 큽니다. 한성 근방에 있는 화척들이 비상시에는 큰 군사력으로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김종서로서는 처음 듣는 놀라운 일이었다.
“아저씨는 이 나라를 지키시는 나라의 기둥입니다. 사직을 보호하고 왕권을 굳건히 하시자면 언제나 움직일 수 있는 무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만약 아저씨가 그런 경우를 당해 관군을 뜻대로 움직일 수 없을 때는 이 사람들을 활용하시라고 데리고 왔습니다.”
홍득희의 말을 듣고 있는 김종서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아무리 위급하다고 하더라도 도적이나 천민을 움직인다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네 뜻은 알겠다만 이 나라에 그렇게 위급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김종서의 말에 홍득희가 대답했다.
“아저씨를 위해 그렇기를 저도 바랍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역성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세운 지 수십 년에 불과한데 그동안 왕권을 둘러싸고 피비린내 나는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선대왕의 방석 세자 살해 사건을 비롯해 세종 임금의 국부 되시는 심온 정승 일가의 도륙이 그것을 잘 말해 줍니다. 앞으로도 사직에는 피바람이 불 조짐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양녕대군의 어지러운 행태도 그렇지만 지금 세자는 문약해서 왕권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럴 때 이 나라의 기둥이신 아저씨를  도와드릴 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김종서는 홍득희가 일개 산적의 두목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저희들은 물러가겠습니다. 저와 석이는 다시 사다노로 돌아갑니다.”
홍득희와 홍석이는 일어서서 큰 절을 하고는 휑하니 사랑방을 나갔다. 두 사나이도 따라 나갔다.
김종서는 도깨비에 홀린 것만 같았다. 빈 방에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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