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여진 사람이오?”
청년들이 경계를 조금 늦추며 물었다.
“아니오. 나는 조선 한성에서 온 사헌부 관원이오.”
“한성에서 왔다고요? 이름이 무엇이오?”
“김종서라고 하오.”
“음. 경원 읍내에 있는 우디거의 병영에서 식객으로 머물고 있다는 그 선비로군요.”
여진족 가운데 한 사람이 아는 체를 했다. 우디거는 여진족 중 상당한 위치에 있는 부족의 족장이었다.
김종서. 5척 단구에 온화한 얼굴, 큰 귀, 그리고 허술해 보이는 체격이지만, 어딘가 엄이 서려 있는 선비였다. 태종 5년에 22세 나이로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우정언(정 6품)으로 복무하다가 세종 임금의 특명을 받고 북방 변두리 경원에 와 있었다. 새 문자를 창제하려는 뜻을 지닌 세종 임금이 여진 문자를 연구하다가 자료가 부족하자 김종서를 현장에 보냈다. 여진족의 말과 글에 대해 여러 가지를 조사해 오라는 명이었다.
김종서는 여진족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또리 부모의 시신을 묻어 주었다. 여진 청년들은 갖바치 일을 하고 있는 화척인 조선족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살고 있었다. 엄격히 말하면 경원군 사다노는 조선 땅이지만 조선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아 무정부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못된 조선 병사들을 그냥 두지 않겠소.”
김종서는 여진 청년들과 함께 또리를 집으로 데려다 주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름이 또리라고 했지?”
며칠 후 곡식자루를 짊어진 하인을 앞세우고 김종서가 또리의 집에 찾아왔다. 어린 남매만 살고 있음을 아는 터라 식량 걱정이 되어서 온 것이었다. 이제 다섯 살 난 또리의 남동생은 부모에게 닥친 변고를 알지 못한 채 며칠째 엄마, 아버지에게 가자며 보채고 있었다.
“예.”
“글자로는 어떻게 쓰냐?”
“전 글자를 몰라요. 또리는 여진 말이래요.”
“그럼 동생 이름은?”
“쟤도 또리예요.”
“응? 둘 다 또리라고? 그럼 어떻게 구분을 하느냐?”
“저는 짧게 또리라고 하고 동생은 길게 또오리라고 불러요.”
“아버지는 글자를 아느냐?”
“예. 조금.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배워 보았자 도움 될 게 없다고 하면서요.”
또리 남매는 얼른 보아도 몸이 민첩하고 머리도 영리해 보였다.
또리의 아버지는 성이 홍 가로 본래 함흥에 살던 농민이었다. 그러나 지방 관리들의 횡포에 갖고 있던 논밭을 다 빼앗기고 변방으로 흘러와 여진족과 섞여 살면서 갖바치 노릇을 하고 있었다.
“또리라... 돌이(乭伊)라고 써야 하나?”
한참을 생각하던 김종서가 고개를 흔들더니 또리를 보며 말했다.
“내가 너희 이름을 지어 주어도 되겠느냐? 글자로 쓸 수 있는 이름으로.”
또리는 무슨 영문인가 몰라 김종서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김종서가 빙긋이 웃으며 행낭에서 벼루와 붓을 꺼내 들었다. 또리는 얼른 뒤꼍으로 달려가 물 항아리에서 물을 떠왔다.
“눈치가 빠르구나.”
김종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갈았다.
“어디다가 써줄까?”
또리는 얼른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래, 우선 손바닥에 쓰자.”
김종서는 조개껍질 같이 하얀 또리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
“너희 성이 홍(洪)이라고 했지? 자, 홍득희(洪得希), 어떠냐 득희란 이름이?”
김종서의 말에 또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 글자가 무슨 뜻인데요?”
“얻을 득(得) 자에 바랄 희(希) 자다.”
“그렇다면 제가 바라는 걸 다 얻을 수 있다는 뜻인가요?”
또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바로 그거다. 어떠냐, 득희야.”
“좋아요. 참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