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우 실록소설 12] 대호(大虎) 김종서
[이상우 실록소설 12] 대호(大虎) 김종서
  • 이상우 언론인·소설가
  • 승인 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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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시라고요? 사헌부 지평이시라고요?”
경덕궁 행랑에서 만난 한명회는 오랫동안 국록을 먹어온 김종서를 모를 리 없었다. 김종서의 아래위를 한참 훑어본 뒤 네가 무슨 사헌부 관리라고 그러느냐는 듯 비웃는 투로 말했다. 작은 키에 어른 도포를 입은 것 같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와 큰 활을 메고 있는 김종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대하자  얕잡아 본 것 같았다.
“그렇소.”
김종서는 자기보다 키가 크고 몸집도 큰 한명회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엄마 배속에서 열 달을 다 채우고 나온 자기는 이렇게 작고, 성급하게 일곱 달 만에 나온 한명회는 이렇게 듬직하게 크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사헌부의 나으리가 이 궁직이 말단에게 무슨 볼 일이 있으신가요? 아니 제 이름은 어디서 들으셨소이까?”
김종서에 비하면 새파랗게 젊은 한명회는 여전히 거만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양녕대군 마마의 수하인 이오방에게서 들었소. 좀 물어볼 말이 있어서 왔소이다.”
“예? 이오방이라고요?”
한명회는 이오방이라는 이름 석 자를 듣자 움찔했다. 권력의 측근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소. 이오방이 한 궁직에게 가면 은밀한 사건도 모두 알 것이라고 했소.“
“은밀한 사건이라고요? 이리로 좀 들어오시지요.”
한명회가 궁궐 뒤편 집무실로 김종서를 안내했다.
“나는 어명을 받들고 업무를 수행하고 있소. 그러니 내가 지금부터 묻는 말에 거짓 없이 솔직히 이야기해야 하오. 그게 대군 마마를 위하는 길이오.”
김종서는 한명회가 녹록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채고 일단 엄포를 놓았다.
“제가 양녕대군을 위해 은밀히 일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예?”
김종서는 뜻밖의 말을 듣고 입을 딱 벌렸다. 양녕대군이 한가한 별궁에 불과한 경덕궁 말단 궁직이를 측근으로 두고 있다니 놀랄 일이었다.
“왜 놀라십니까?”
한명회가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구중수도 저와는 친구처럼 지내지요.”
김종서는 모두 한 통속이라고 느꼈다.
“기매라는 기생을 아시오?”
김종서는 이야기의 핵심으로 들어갔다.
“연화방 기생 말씀이시오?”
“아는군요. 그 기생집에 윤이 모녀를 누가 데려다 놓았소?”
한명회가 김종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러니까 양녕대군 마마의 뒷조사를 하고 다니신다는 거군요.”
“뒷조사라니, 말을 삼가시오. 나는 상감마마가 계시는 금궁을 밤에 밀입, 침투한 사건을 조사하고 있소.”
“흠, 윤이와 쌍가메 모녀의 남장 사건을 알아보시려는 거군요.” 
한명회는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말했다.
“맞소. 윤이 모녀가 그날 밤 정말로 대궐 문을 통과해 궁 안으로 들어갔소?”
“물론입니다. 그뿐 아니라 대군 마마는 궁안 침소에서 새 여인과 봄밤을 즐겼고, 덕택에 저는 옛날 지어미를 만나 회포를 풀었지요.”
“옛날 지어미라고요?”
김종서는 한명회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기가 찼다.
“예, 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명회가 털어놓은 그날 밤 남장 밀입궁 사건은 다음과 같았다.

“그날 밤 제가 경덕궁에서 나와 광화문 앞을 지나고 있는데 누가 헐레벌떡 다가오더군요. 다름 아닌 오방이 잡놈이었습니다.”
“이오방이 말이오?”
김종서가 되물었다.
“그놈이 어둑어둑한 길에서 저를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다가와서는 숨 가쁜 소리로 한다는 말이, 저기 두 남자를 대군 마마께서 궁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느냐?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척 보니까 남자 복장만 했지 여자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습니다. 남장 아니라 무슨 지랄을 해도 이 한명회의 눈은 아무도 못 속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김종서가 침을 삼키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요 나으리, 앉아 계실 때는 그 거추장스런 활 좀 내려놓을 수 없으십니까?”
한명회가 김종서의 어깨에 있는 활과 등에 멘 전통을 보고 말했다.
“그건 안 되오. 어명이라 잘 때 말고는 메고 있어야 하오.”
“허허허. 희한한 어명도 다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나으리는 문관 출신인데 활이 가당키나 하십니까?”
품계로 치면 한참 위에 있는 김종서에게 한명회는 거의 맞먹자는 식으로  함부로 했다. 그러나 김종서는 목적하는 바를 알아내기 위해 불쾌해도 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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