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싸움 막전막후…"형제는 없다"
재산싸움 막전막후…"형제는 없다"
  • 최수아 기자
  • 승인 2012.05.28
  • 호수 8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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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 ‘쩐의 전쟁’ 7 - 한화①

“감히 내 밥그릇에 탐을 내?”
재산을 둘러싼 재벌가의 법정 싸움은 재계의 단골메뉴다. 삼성, 현대, 두산, 금호, 한진, 롯데 등 ‘쩐의 전쟁’을 거치지 않은 로열패밀리는 없을 정도. ‘형제의 난’ ‘모자의 난’ ‘숙부의 난’ 그 종류도 다양하다. 주거니 받거니 서로 일감을 몰아주며 진한 우애(?)를 나누다가도 자신의 밥그릇에 손끝하나라도 스치기라도 하면 그 순간부터 애증의 관계로 변모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경영권 세습을 위한 재벌가의 통과의례라도 한다. 이에 [한국증권]은 유난히 ‘피’보다 진한 재벌가의 치열했던 ‘쩐의 전쟁’의 내막을 다시금 재구성해본다. 그 일곱 번째 주인공은 화약 산업의 산실 한화그룹이다.

올해로 창립 60주년을 맞는 한화는 김종희 창업주가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

오늘날 우리에게 불꽃놀이의 감동을 안겨주고 있는 것도 이러한 불꽃의 역사에 기인한다.

현암 김종희 창업주는 1941년 일본 메이지대학 상과 2년을 중퇴하고 조선화약주식회사에 입사하면서 기업가의 길로 뛰어들었다. 이 후 30세가 되던 1952년, 전쟁 속 경제 불모지를 재건하기 위해 산업용 화학이 필요하다고 판단, 뚝심하나로 부산에서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이것이 바로 한화그룹의 모태다.

그리고 1년 뒤인 1953년 조선화약공판을 인수하고 1955년 인천화약공장 보수 신축 등 사세를 늘리면서 본격적인 화약 취급 기관으로의 전기를 마련한다. 미 군정청 등을 상대로 판로를 개척하는 한편 전후 한국경제의 회복으로 위해 화약 가격을 해방 전 수준으로 유지하는 등 국내 화약산업 발전에 크나 큰 기반을 닦았다. 김종희 창업주에게 ‘다이너마이트 김’이란 별명이 붙은 것도 바로 확고한 신념을 지칭하는 애칭이었다.
 


김종희 창업주는 돈을 벌겠다는 욕심보다 ‘사업보국(事業報國)’이라는 경영 지론을 앞세워 늘 국가기간산업에 매진했다. 더욱이 당시 폭발 위험으로 인해 그 누구도 화약 사업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을 때라 그의 남다른 기업가 정신은 오늘날까지 많은 기업 경영인들에게 귀감이 됐다.

화약 국산화로 귀중한 외화를 아끼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으며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국가산업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산업용 화약과 방위산업, 기계항공산업을 축으로 국제적 경쟁력을 확보해 나갔다.


1964년 경영난으로 부도위기에 놓인 신한베아링공업을 인수한 것도 김종희 창업주의 경영지론을 그대로 보여준다. 국가와 미래를 위해 반드시 일으켜 세워야 할 기계 공업을 맡을 사람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김종희 창업주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화약산업과 전혀 무관한 신한베아링공업을 인수했다.

1965년엔 석유화학 시대가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한국화성공업을 설립, 68년 진해에 연산 1만5000t 규모의 PVC 공장 및 PVC 가공 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김종희 창업주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출혈경쟁과 원료 폭등에다 경기불황까지 겹쳐 재고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자금회전이 어려워지면서 어음부도까지 늘어났고 이는 5년 가까이 지속됐다. 그러나 석유화학에 대한 김종희 창업주의 강한 의지와 집념은 결국 이를 지켜냈다.

PVC 제품은 국내 건축재료, 피혁, 철강재 및 각종 일용생산 분야에 중요한 원료로 공급됐고 특히 비닐하우스 공급으로 농업 증산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전력이 부족했던 1969년엔 국내 최초로 민간화력 발전소와 함게 대규모 정유공장인 경인에너지를 설립했다.

 '29세' 김승연 회장 시대 개막

김종희 창업주의 사업보국 노력은 농업분야로까지 이어졌다. 1973년 농림부 장관으로부터 젖소 사육 농가를 돕기 위해 부도 난 대일유업을 인수 해 달라는 제의를 받고 대일유업의 주식 50%를 인수했다. 1976년 6월 ‘빙그레’란 상표로 아이스크림을 출시, 폭발적 인기를 얻는다.

그렇게 한화그룹은 화약을 비롯해 석유화학, 에너지, 무역, 기계, 식품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며 성장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1977년 11월, 창업 이후 최대 시련을 맞는다. 정식 책임자도 없이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40t의 고성능 폭발물을 실은 열차가 이리역에서 정차하던 중 폭발한 것. 이 사고로 역무원과 시민 등 59명이 사망하고 1343명이 부상했으며 반경 8km 안의 학교와 주택의 건물 유리창이 모조리 깨지는 등 도시는 순식간에 폐허가 됐다.

김종희 창업주는 망설이지 않았다. 곧바로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 자신의 전 재산에 해당하는 90억원을 피해보상금으로 내놓았다. 사고 원인이야 어찌됐든 책임을 지고 맨손으로 돌아가 떳떳하게 새 출발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던 1981년 7월, 김종희 창업주는 향년 59세의 나이로 급작스레 타계한다. 바쁜 업무로 지병을 돌보지 못한 탓이었다.

이후 한화그룹은 장남인 김승연 회장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그의 나이 당시 29세. 우려반 기대반으로 출발한 김승연호는 한양화학 인수와 경인에너지 외국 지분 인수 등을 시작으로 취임 1년 만에 석유화학 부분을 강화에 성공한다. 정아그룹과 한양유통 등도 인수, 유통과 서비스분야로도 사업영역을 넓혀갔다. 그리고 이는 국내 10대기업으로 도약하는데 크게 공헌한다.

하지만 차남인 김호연 전 빙그레 회장이 한양유통 대표직에서 전격 불명예 퇴진을 당하면서 한화가에도 피할 수 없는 형제간의 경영권 분쟁이 촉발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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