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안 모자란 인터뷰⓷] 태권도인 김세혁 진인사대천명...다이나믹 파워 태권도 제2의 붐
[이철안 모자란 인터뷰⓷] 태권도인 김세혁 진인사대천명...다이나믹 파워 태권도 제2의 붐
  • 이철안 미학칼럼리스트 칼럼리스트
  • 승인 2022.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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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문대성, 이선희 등 선수를 배출
도쿄올림픽 무금메달 추락 위기...다이내믹 파워 태권도 변화해야
김세혁 태권도협회 부회장
김세혁 대한태권도협회 부회장

김세혁 대한태권도협회 부회장은 태권도인(跆拳道人)이다. 고교 시절 무패 전적의 선수보다 은퇴 후 지도자로서 더 유명하다. 3회 연속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했다. 태권도는 올림픽 경기 종목 중 하나이다.

태권도는 1988년과 1992년에 시범 종목으로 채택됐다. 김 부회장은 코치로 임명되어 참가한다. 이후 2000년 시드니에서 개최된 올림픽 때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된다. 삼성에스원 감독을 맡고 있던 김 부회장은 시드니(2000)·베이징(2004)·런던(2008)에 소속팀 선수를 출전시켜 3회 연속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다. 문대성, 손태진 선수 등이 그의 수제자이다. 평생 태권도와 함께 걸어 온 김 부회장의 열정과 노력이 태권도 종주국 대한민국 위상을 높였고, 세계화를 일궈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지원 선수가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 수상한 직후 김세혁 부회장

현재 국내 태권도는 위기이다. 지난해 일본에서 열린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다.  종주국인 한국은 금메달 없이 은메달1개, 동메달2개를 차지했다.

위기는 기회이다. 대한민국 태권도 산증인 김세혁 태권도협회 부회장은 다이나믹한 파워 태권도를 통해 환골탈퇴해야만 종주국 위상을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최근 김 부회장의 자택이 있는 경기도 고양시의 자택 인근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현역 감독 시절보다 훨씬 강인한 모습을 보였다.  다음은 김 회장과의 일문일답.

김세혁: 한국 태권도는 위기이다.  지난해 일본에서 열린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다.  종주국인 한국은 금메달 없이 은메달1개, 동메달2개를 차지했다.  에이스 이대훈도 은퇴했다.  실점을 안 하기 위한 (수비적인) 경기가 위기를 만든 것이다.  태권도가 명실상부 세계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센서 대신 심판의 판정에 맡기고 발차기 등 공격 관련 규칙을 재정비해야 한다. 경기가 더 재미있고 다이나믹해져야 한다.

김세혁 대한태권도협회 부회장

-태권도인 김세혁의 오늘에 있기까지의 인생 철학은.
김세혁: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과 대권도 5대 정신이다. 진인사대천명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나서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삼국지(三國志)>의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에서 유래된 말이다. 대권도 5대정신은 의(禮儀), 염치(廉恥), 인내(忍耐), 극기(克己), 백절불굴(百折不屈) 이다. 이 두가지의 철학이 오늘날 김세혁을 키운 바탕이다.

- 태권도 지도자 김세혁은.

김세혁:  고교시절 무패 신화를 기록했다. 광성고 2학년 때 대통령배에서 최우수 선수로 뽑힌다. 국가대표로 활동한다. 부산 동아대를 졸업하고 1982년 해병대 선수로 군 복무를 마쳤다. 이후 동성고 체육교사로 임용뒤 태권도팀을 맡으면서 지도자로서 삶이 시작됐다. 동성고 감독을 82년부터 95년까지 14년간 맡았다. 고교생 국가대표를 18명을 배출했다. 경이로운 기록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태권도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됐다. 당시 태권도 국가대표팀의 코치를 맡았다. 이후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이 된 아테네(2000)에서부터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를 배출한다. 이때부터 지도자 김세혁의 삶이 시작됐다.

-김세혁은 어떤 선수였는가?

김세혁: 우연한 기회에 태권도를 알게 됐다. 어렸을 때 싸움이라면 자신있었다. 그런데 태권도하는 친구 형에게 맞았다. 싸움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태권도를 시작했다. 싸움을 잘 하기 위해 시작한 태권도에 폭 빠졌다. 쌈꾼이 아니라 태권도꾼이 됐다. 고교시절 무패 신화에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태권도 국가대표가 됐다. 모든 게 노력의 결과였다. 나의 특기는 뒤후려차기였다. 경기장에만 서면 힘이 났다. 시합을 거듭하면서 경기 운영의 묘까지 터득했다. 선수시절 터득한 경기 운영의 묘가 지도자 생활에서도 빛을 발한 것 같다. 문대성 선수가 아테네올림픽 결승에서 보여 준 뒤후려차기는 나의 후려차기에 한단계 진일보한 것이다. 제자의 뒤후려차기를 보면서 희열을 느꼈다

-배우는 조명이 꺼진 무대 위에서 죽길 원한다. 태권도인 김세혁은 어떤 바람이 있는가.

김세혁:  인생의 화려함은 극히 짧은 시간이다. 태권도는 8m인 정사각형 경기장 위에서 선수들은 자신들이 평소 일궈었던 기량을 뽐낸다.  2분 3회전으로 경기가 마무리된다. 이 짧은 시간이 지나면 승자와 패자로 나뉜다. 선수들은 각자 오랜 시간 노력하고 준비한 순간들이 이 시각에 결정난다. 승자는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는다. 반면 패자는 무너졌을 때 좌절감을 겪게 된다. 이는 선수 뿐만 아니라 지도자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실패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김세혁:  누구나 실패를 경험한다. 나 역시 현역시절 국가대표 선발전을 4번 탈락했다. 그 순간이 가장 힘들었다. 그때마다 좌절을 딛고 오뚜기처럼 일어섰다. 선수 생활을 끝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도자의 삶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끝났다고 했을 때만 끝난 것이다. 

-태권도 지도자로서 문대성 선수 등 많은 선수들을 배출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김세혁:  나는 88올림픽, 아테네올림픽, 베이징올림픽, 런던올림픽 등등에 한국대표팀 코치 겸 감독을 역임했다. 당시 오랜 시간 준비 잘한 제자들의 노력이 금메달로 보상 받았다. 그때 지도자로서 가장 보람을 느꼈다.

시드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이선희 선수가 기억난다. 올림픽 이후 태만에 빠져서 성적이 좋지 않았다. 몇 번 경고를 주었다. 2002년경 대회 중 호텔에서 말싸움 끝에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다. 그가 삐틀어져 나갈 때마다 보모와 같은 마음으로 다독거리고 경기장 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이듬해 독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부진을 씻고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명예로운 결과를 얻고 은퇴했다. 지금 생각하여도 매우 기분 좋은 순간이다. 고등학교 제자인 권태호 선수도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88 서울올림픽에 참가해 금메달까지 획득했다.

지도자로 여러차례 올림픽에 출전했다. 제자들이 체육관에서 흘린 땀의 대가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그리고 애국가 소리가 가슴에 와 닫았을 때, 그 순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지금도 애국가 소리만 들으면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태권도가 위기이다. 태권도 발전을 위해 협회의 역할은.

김세혁: 모든 스포츠는 국격에서 비롯된다. 태권도가 올림픽 공식 종목이 될 수 있었던 것도 88올림픽이 한국에서 개최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태권도협회가 태동한 뒤 태권도인들의 노력과 정부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 세계 각국에 나가 도장을 열고 태권도를 알린 태권도인들에 노력도 태권도 발전에 큰 몫을 했다. 현재 태권도시범단이 전 세계에서 공연을 하면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세계인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게 하고 있다. 시범단은 무도의 태권도에서 퍼포먼스를 겸비한 이미지로 바꾸는데 성공의 케이스가 됐다.

-김세혁은 파워 태권도 전도사로서 제2태권도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세혁: 태권도의 가장 난제가 전자식 채점방식이다. 예민한 감지기에 의한 채점은 본연의 다이내믹한 태권도에서 나약한 태권도로 바꾸었다.  다이내믹한 태권도의 모습을 원하는 관중들의 감흥을 이끌 수 없었다. 이런 모습을 개선한 것이 파워 태권도다. 감지기에 의한 채점으로 쇠퇴하던 태권도의 박진감을 찾아왔다. 스피드가 살아났고, 격렬함이 다시 시합장 선수들에게 나타났다.

-태권도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김세혁: 꿈이다. 인생은 누구나 태어나서 죽는다.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사람답게 사는 것을 가르키는 무도가 태권도라고 생각한다. 대권도에는 예의(禮儀), 염치(廉恥), 인내(忍耐), 극기(克己), 백절불굴(百折不屈) 를 담고 있다. 태권도 5대정신만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체육백마장을 수상한 직후 김세혁 부회장은 부인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는 자신의 힘에 원천이 부인의 헌식적 노력과 가족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체육백마장을 수상한 직후 김세혁 부회장은 부인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는 자신의 힘에 원천이 부인의 헌신적 노력과 가족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김세혁 부회장 가족사진
김세혁 부회장 가족사진

-태권도인 김세혁을 뒤에서 후원한 가족에 대해.

김세혁: 가족이 힘의 원천이다. 가족의 헌신적인 뒷받침이 없었다면 김세혁은 없다. 국가 대표 코치와 감독을 7회 수행했다. 체육 백마장, 청룡장을 수상했다. 이 모든 영광은 모두 가족의 것이다. 어려움 속에서 묵묵히 내조하여 준 집사람에게 감사를 드린다.  가족을 나의 가장 소중한 울타리다. 인내심을 가지고 진인사대천명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가정이고 가족이라 생각한다.

-현대는 100세 인생이다. 김 부회장은 젊어서부터 하얀 머리 때문에 나이가 더 들어보인다는 오해를 받았다. 

김세혁: 흰 모발이 매우 매력적이다. 태권도계에서 백 머리 신사로 유명하다. 나이가 들면서 탈모가 고민이 되긴 한다. 백모로 얻은 닉네임을 유지하기 위해 다모림의 탈모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탈모가 멈추면서 백머리신사의 닉네임을 유지하고 있다. 

-인생은 끝이 있는가.

김세혁: 인생을 정리할 시점인 것 같다. 태권도로 받은 혜택만큼 태권도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 미국 태권도 연맹에서 세계 태권도 발전에 공이 키다면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영광이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

김세혁: 다음 올림픽의 개최지가 프랑스 파리이다. 태권도인으로서 열심히 준비해서 국위를 선양하겠다.  태권도 종주국으로서 당당한 입지를 세우겠다. 

Interviewee 김세혁 대한태권도협회 부회장

학력: 동아대 체육학과, 인하대 교육대학원.

수상 :체육훈장 백마장(1986년), 체육훈장 청룡장(2009년). /경력 대한태권도협회 전무이사, 대한태권도협회 부회장(2019년), 제41대 전반기 경기력향상위원회 위원 위촉. 2011.03 태권도 국가대표팀 전임지도자/ /88올림픽, 아테네올림픽, 베이징올림픽, 런던올림픽 한국대표팀 코치 겸 감독 역임. /제29회 베이징 올림픽 태권도 국가대표팀 감독. /2011.03 삼성에스원 감독. 

Interviewer 이철안 다모림 CEO /

러시아를 유학하고 한국과 러시아의 경제 가교 역할을 한 사업가이다. 현재 미학칼럼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철안의 모자란인터뷰'를 한국증권신문에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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