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의 ‘우주’가 한국 미술계에 빅뱅을 일으켰다.
지난 23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1971년 작 푸른 점화 ‘우주’가 한화 153억 원(HKD 101,955,000:구매자 수수료 포함)에 낙찰돼 한국 미술품으로는 최초로 100억 원 대를 돌파한 것이다. 그것을 보는 마음은 여러 갈래지만 우리의 국력이 신장함에 따라 미술품도 국제적으로 대접을 받아 감격스럽다는 반응이 우선 눈에 띈다.
한국의 국력이 신장됨에 따라 방탄소년단이 그렇듯 우리의 대중문화도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K팝만이 아니라 한국의 김치나 김밥 같은 음식문화도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런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우주’의 빅뱅을 보자 박완서의 소설 ‘나목(裸木)’을 떠올리는 세대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한국 미술이 세계의 미술 수준과는 까마득한 거리가 있다고 여겼던 시절에 우리 미술사의 한 거장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옥희도’와 ‘이경’이라는 그 소설의 주인공들은 한국전쟁 당시의 서울에서 함께 고난의 세월을 보냈던 ‘박수근(朴壽根)’과 ‘박완서’였다. 훗날 한국의 문학계와 미술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그들이지만 당시 그들의 삶과 모습은 박수근의 그림에 흔히 등장하는 초라한 인물과 어두운 주변 분위기 그대로였다.
천재화가의 품성과 자질을 갖고 있으면서도 미군부대에서 1달러에 백인이나 흑인 병사 또는 그들의 ‘애인(양부인)’ 초상화를 그리는 ‘딸라 화가’로 생계를 지탱해야 했던 박수근의 궁상은 한국인들이 두루 겪었던 그 시대의 기억이다. 따라서 그런 시절 박수근이 잎 새가 없는 나무를 그렸다면 그것은 ‘고목’으로 보일 수밖에는 없다. 그것이 고목이 아니라 겨울이 돼서 잎 새를 떨군 채 봄을 기다리는 ‘나목’임을 깨닫기 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다.
박수근 뿐 아니라 미국에서 활략했던 김환기도 100억 달러와는 거리가 먼 생활로 시종했다. 뉴욕 뒷골목의 쥐가 들끓는 화실에서 고향 신안 앞바다의 점 같은 섬들을 떠올리며 점화를 그렸던 것이다. 그들은 한국의 국력이 한국 작가들의 작품 값을 올린다는 선문답 같은 소리는 듣지도 못한 채 열심히 화필만 굴리다 갔다.
사실 당시 한국 미술계는 경제수준이니 뭐니 하는 말이 사치스러울 정도로 미술과는 거리가 먼 환경이었다.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1970년대 이전 한국의 가정은 우선 그림을 걸어 둘 공간도 찾기 어려웠다. 상류층을 제외하면 재래식 주택에 여러 세대가 방 한 두 칸씩 차지하고 살던 시절 방안은 잡다한 가재도구로 가득 차 있었다.
1960년대의 한 미술기자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는 어느 너무나 유명한 여류 화가의 작품을 호평하는 글을 자주 썼다. 어느 날 그 여류화가네 집에 가서 인터뷰를 하고 나오자 그 화가는 포장된 그림을 가지고 나와서 “제가 너무 여러 가지로 신세를 졌는데 돈은 없고 이 그림이라도 드리고 싶네요”라며 건넸다. 이에 기자가 사양하자 화가는 그림을 택시 안에 밀어 넣었고 차는 출발했다. 하지만 그 기자는 아예 포장지에 쌓여진 그 그림을 열어 보지도 않은 채 집안의 헛간 비슷한 공간에 처박아 두었다.
그 후 얼마 안돼서 한국의 그림 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기자는 헛간에서 그 그림을 안방으로 들여와 가보로 모셨다. 그 화가도 이제는 돈을 줄망정 문화재 수준인 그의 작품을 떠맡기듯 주지는 않게 됐다. 아니, 그는 신데렐라처럼 고소득층의 반열에 성큼 뛰어 올랐다.
그림 값이 그처럼 오른 것은 아파트 붐으로 상징되는 한국 주택문화의 급변이었다. 방 한 칸이나 두 칸에 살던 세대들이 아파트에 들어가자 그 넓은 벽면을 조화롭게 꾸며야 할 판이었다.
1970년을 전후해 크고 화려한 달력들이 쏟아져 나온 것도 그 시류를 탄 것이었다. 엄청 넓은 지면에 동서의 명화들이 인쇄된 달력이니 빈 벽을 장식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림이나 그림달력 말고도 그 벽면을 장식하는 고상하고도 기품 있는 ‘장식품’은 또 있었다. 1960년대 말부터 대량 보급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었다.
큼직한 책장에 가득히 진열된 묵직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처럼 주인을 품위있는 인물로 장식할 물건이 또 있을까?
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들이 장식품과 백과사전 본연의 지적 양식 가운데 어느 쪽의 용도로 더 사용됐는지는 따져보기도 싱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들도 모두 한국문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바로 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사업으로 돈을 번 한창기(韓彰琪)사장이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앞세운 잡지 ‘뿌리 깊은 나무’를 창간함으로써 우리 문화에 하나의 굵직한 이정표를 세웠던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의 경제개발 구호가 귀를 따갑게 했던 70년대는 ‘미술 개발’이 본격화돼 인사동이 활기를 띄기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박수근 그림 속의 나목처럼 처절해 보이던 인물들도 서양 귀부인 못지않게 감동을 주면서 그의 유작들이 ‘뒤늦게’ 값이 튀기 시작했다. 하지만 뒤늦게 출발한 한국 미술계의 화랑문화나 경매 등의 제약으로 한국 작가들의 그림은 100억 원 대를 넘지 못했다. 따라서 김환기 그림의 100억 돌파는 ‘나목’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이자 뉴욕의 초라한 뒷골목에서 김환기가 그린 ‘우주’가 말 그대로 우주적 빅뱅의 불꽃을 날린 격이다.
그 불꽃 속에 김환기 못지않게 부각되는 또 하나의 인물이 있다. 그의 부인 김향안(金鄕岸)이다. 김향안의 생애는 ‘김환기의 부인’이기에 앞서 ‘이상의 부인’이었다는 점만으로도 한국 현대 문화사의 한 서사였다. 그가 더불었던 두 남성이 한국 문화사의 유명인사 정도로 끝난 게 아니라 분야가 다른 두 부문에서 뚜렷한 이정표를 남겨서다.
이상의 모더니즘이 한국문학사에 뚜렷한 전기를 마련했다면 김환기는 1970년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무수한 점들만 찍혀 있는 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대상을 받아 한국미술사에 파란을 일으켰다.
김향안은 그 두 예술인과 우연히 만난 ‘주부’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상의 시인다움에 끌려서 이화여전 영문학과 재학 중 짐을 싸들고 나와 이상과 결혼한 김향안은 그 시절 기준으로 이상의 ‘모더니즘’을 몸으로 실천한 셈이었다. 그는 또한 이들 먼저 간 남편들의 뒤를 잘 정리함으로써 그들의 문화사적 업적을 지켜냈다.
이상의 경우 1936년 결혼한 지 4개월 만에 이상이 도쿄로 가서 곧 작고하게 되자 김향안은 일본에 가서 그의 임종을 지키고 유해와 유작을 수습해 오는 고행을 했다.
그가 김환기와 재혼하는 과정도 이상과 결혼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집안에서는 딸을 셋이나 둔 이혼남이자 아직 무명화가였던 김환기와의 재혼을 극력 반대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결혼을 감행했다.
김환기가 이번에 팔린 ‘우주’를 완성한 지 3년 뒤인 1974년 별세하자 김향안은 4년 뒤 환기재단을 설립하고 20년 뒤에는 개인의 사비로 만든 최초의 미술관인 ‘환기 미술관’을 열기도 했다.
하지만 김향안은 남편들의 뒷수습만 한 것이 아니다.
김향안은 자신이 이상이 몸담았던 문학계의 인사이자 김환기가 몸담았던 미술계의 평론가였다. 그가 1955년 미술사와 미술평론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자 이대 교수였던 김환기도 이대 교수직을 마다하고 프랑스로 갔다가 9년 뒤 뉴욕으로 갔던 것이다. 그리고 뉴욕에서 ‘우주’를 그린 셈이다. 따라서 김향안은 김환기의 화가의 길을 선도한 면이 없지 않다.
‘ 몸집이 왜소한 김향안은 너무 다부지게 김환기를 도운 셈이다. 본명이 변동림(卞東琳)인 그는 집안에서 김환기와의 결혼을 반대하자 성을 버리고 김환기를 따라 김씨 성으로 개명까지 하는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본명이 김해경(金海卿)이었으나 우스운 계기로 이름을 성씨까지 바꾸어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으로 평생을 살다간 전남편의 성씨를 찾은 셈이기도 했다.
’이상‘이라는 필명을 갖게 된 계기는 이웃의 일본 여자가 그를 이 씨로 잘못 알고 ’이 상‘이라고 불러서였다는 이야기와 공사판 노동자들이 잘못 불러서 그랬다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경우건 성 씨를 존중하던 그 시절에 이상은 생활인으로써 모더니즘을 추구한 셈이었고 뒤늦게 김향안이 뒤를 따른 모습이다.
김향안의 그런 생애에서는 한국 여성의 독특한 DNA가 감지되기도 한다. 한국 여성-. 그들은 까마득한 옛날에는 말을 타고 아시아의 초원을 누비는 등 호탕한 기질을 가졌었으나 농경사회에 접어들자 그 야성이 사라진 채 집안을 지켜야 했다. 그러다 조선조에 와서는 공자 나라(중국)보다 더 엄혹한 유교 질서에 눌려 망부석 같은 존재가 돼버린다.
하지만 그들의 DNA에는 아직도 그 옛날의 발랄한 기질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그것이 예술에서 때로는 방탄소년단 식으로 때로는 백남준 식으로 그리고 때로는 ‘우주’의 빅뱅이라는 모습으로 체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