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소설] 제24화 ‘성희롱 사과문’
[기업소설] 제24화 ‘성희롱 사과문’
  • 이상우
  • 승인 201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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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지는 풀리지 않은 기분으로 사원식당에 내려가 혼자 점심을 먹었다. 모두 자기를 흘금흘금 보는 것 같아 괴로웠다. 이렇게 모함을 받아 어려운 처지에 빠질 줄 알았다면 승진 같은 것은 하지 말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민지는 우울한 기분을 더 이상 안고 사무실에 가고 싶지 않아 길거리로 나와 산책을 했다.
한시가 조금 넘어서야 사무실에 들어갔다. 영업부에 있는 사원들도 흘금흘금 자기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괴로운 오후를 보낸 뒤, 퇴근 시간이 임박해서 조민지는 이규명 대리에게 전화를 걸려든 참이었다. 수화기가 울려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조차장님 박민순데요. 인프라로 발령 난...”.
“예, 선배. 근데 나한테 전화를 다 걸고 웬일이세요.”
“알 얘기가 있으나 한 오 분만 시간 좀 내시겠어요?”
“좋아요.”
조민지는 박민수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기분이 좀 좋아졌다.
“그럼 지금 옥상으로 좀 올라와요.”
언젠가 점심을 먹고 들어오다가 박민수와 함께 옥상에 가본 일이 있었다.
비상계단을 타고 열 몇 층을 올라가면 옥상으로 가는 조그만 쪽문이 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아는 사원은 별로 없었다.
조민지는 희한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옥상으로 올라갔다. 쪽문을 열고 올라서자 텅 빈 옥상에는 헬리콥터 착지 표시인 H자만 을씨년스럽게 바닥에 쓰여 있었다.
박민수 대리가 먼저 와서 낙조가 지는 도시의 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연이 자욱한 도시 너머로 붉은 태양이 막 지려고 하고 있었다.
조민지가 곁에 다가 설 때까지 박민수는 낙조를 보느라고 모르고 있었다.
“박선배.”
조민지가 등 뒤에서 속삭이듯 불렀다. 사무실에서 부하를 부르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박민수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는 조민지의 아래위를 열심히 살폈다. 며칠 만에 보는 박민수 대리는 조금 수척해진 것 같았다. 커다란 눈이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조민지는 그의 눈동자에서 다른 남자와 다른 무엇을 느꼈다. 자기를 향해 알 수 없는 무엇을 발산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의 눈동자를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찼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은 적당한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이글거리는 열정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슬픔이 가득 차 금방 눈물이 되어 쏟아질 것도 같았다.
“조민지.”
그의 입에서는 거친 음성이 튀어 나왔다. 차장님이라는 존칭도 쓰지 않았다.
조민지가 미쳐 대답도 하기 전에 그는 조민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번개처럼 입술을 그의 입술로 덮어 버렸다.
“읍...”
조민지 신음 같은 숨결도 내뱉지 못하는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조민지를 으스러지도록 허리를 조이며 끌어안고 집요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왜이래요, 이거 놔요!”
기습을 당한 조민지가 겨우 이 말을 했을 때 박민수는 이미 자기로부터 떨어져 나간 뒤였다.
“나쁜 사람.”
그제야 정신이 든 조민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생전 처음으로 남자로부터 키스를 받아 본 것이었다.
“이게 뭐예요? 무슨 야만인 같은 짓이에요.”
조민지는 생각과는 다른 말이 튀어 나왔다. 뺨이라도 갈기고 싶은 심정과는 전혀 달랐다.
“지금은 퇴근 시간이 넘었고, 여기는 사무실 밖입니다. 행여 나를 부하로 생각해선 안돼요.”
평소에 보던  샌님 같던 박민수와는 아주 다른 모습 이었다
“이런 나쁜 짓을 내가 용서할 것 같아요?”
“조민지씨. 용기를 내요. 사내에 퍼진 소문을 나도 들었어요. 빨리 크는 나무는 장애물도 많이 만나게 되어요. 민지씨가 결백하다는 것을 믿어 주는 남자가 한사람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굽히지 말아요. 내가 오늘 키스해 준 것은 한남자의 격려라고 생각해요. 나는 민지 같은 무서운 여자의 애인이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요.”
“뭐라구요?”
“오해하지 말아요.”
박민수는 뒤고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사람이 저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조민지는 황당한 생각으로 노을 아래 버려진 여인이 되었다.
옥상에서 박민수의 기습 키스세례를 받은 조민지는 한참 동안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하하...”
조민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혼자 웃었다. 한참 만에 옥상에서 내려와 퇴근 준비를 하다가 이규명과 마주쳤다.
“더 할 말 있나요?”
조민지는 갑자기 굳은 표정이 되었다.
“나가다가 게시판을 보시면 됩니다. 사보와 인터넷 게시판에 내는 것만 좀 봐 주실 수 없습니까?  이건 진정입니다.”
이규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뭘 나가다가 보면 된단 말입니까?”
"게시판에 사과문을 써 붙여 놓았습니다.“
이규명은 입술이 하얗게 되어 핏기도 기운도 없어 보였다. 갑자기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민지가 신입 사원으로 출근하돈 다음날 이규명과 박민수는 조민지 입사 환영식을 한다고 카페로 포장마차로 데리고 다니던 생각이 갑자기 났다.
후배 사원에게 뭔가 보여 주겠다고 없는 주머니를 먼지 날 정도로 털어 가면서 노래방까지 가지 않았던가?
그때의 그 야망과 패기는 다 어디로 가고, 그렇게 거들먹거리던 자존심은 다 어디로 가고, 후배 앞에 핏기 없는 얼굴로 서서 용서를 비는가?
그러나 조민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 남자가 불쌍하다고 해서 동정을 하다가는 내가 망하는 거야. 매몰찬  모습을 보여야 해. 이 남자를 짓밟더라도 내 갈 길은 가야 해. 내가 뭐 공연한 사람을 짓밟는 건 아니잖아? 그가 한 짓은 성희롱 아니 성폭력에 가까운 범죄행위야.
조민지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한 뒤 이규명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난 한번 한 말은 주어 담지 않습니다.  게시판에 사과문 붙인 걸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큰 오햅니다. 회사 사이버 게시판에도 올려야합니다 .다음 사보에도 반드시 내야 합니다.”
“글쎄 그게 말입니다. 사보 만드는 책임자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래서요?”
조민지가 그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런 내용은 사보에 실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그럼 광고로 내십시요.  광고요금이 모자라면 그건 재가 보태주겠어요”.
“근데 말입니다.”
“또 뭐예요?”
“우리 사보에 광고 난이 있습니까? 광고로 그걸 받아 줄까요?”
조민지는 일간 신문에 툭하면 사과 성명서를 내는 것이 생각나서 그렇게 말했다. 상표를 도용한 악덕업자들이 흔히 내는 사과 광고가 더러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사보에서도 그런 광고를 받아 줄지 그것은 자신이 없었다.
“하여튼 광고를 내는 방법을 강구해 보세요. 사보 편집자가 정 안되겠다고 한다면 그때 가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지요. 그리고 사내 사이버 게시판에는 글을 올릴 수 있잖아요.”
조민지는 매정하게 돌아 서서 나오다가 다시 돌아 섰다.
“잘 생각해 봐요.”
조민지 현관에 내려서자 게시판 앞에 사람들이 모여 서 있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게시판을 들여다보았다.
 -- 사과문.  본인은 최근 사내에 나돌고 있는 조모 차장님에 대한 불미한 소문에 대해 당사자에게 공개 사과를 드립니다.
조 모 차장님과 회사 고위층과의 불미한 소문은 본인이 술자리에서 쓸 데 없이 떠든 것에 연유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술좌석에서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를 그냥 흥미 삼아 떠들어 조차장님께 누를 끼치게 된 점을 깊이 사과 합니다.
대리 이규명
공개 사과문은 뜻이 분명치 않았으나 그것이 무엇을 말한다는 갓은 사원들이 다 알 수 있었다. 사원들의 표정은 참으로 별꼴 다 보겠다는 듯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회사에서는 조민지를 공개적으로 대화의 대상으로 올려  놓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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