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평 시사논평] “연수-! 너의 이름으로 얼마나 웃기는 일들이…”
[양문평 시사논평] “연수-! 너의 이름으로 얼마나 웃기는 일들이…”
  • 양문평 고문
  • 승인 2019.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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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의회 해외연수단의 ‘무용담’이 정초의 화제가 됐다. 호텔에서 고성방가를 불러 한국이 ‘방탄소년단(BTS)’을 배출한 나라임을 상기시키는 등 국위를 선양하는가 하면 이유 없이 가이드를 폭행해 캐나다 경찰을 동원시킴으로써 태권도 종주국의 위용을 떨쳤으니 눈부신 활략상이다.

특별시나 직할시는커녕 시도 아닌 군의회 연수단의 활략상이어서 더욱 돋보였다. 그러다 보니 갖가지 반응이 나온다. “도대체 군의회라는 게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지자체까지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그 많은 반응들 가운데는 엉뚱하게도 프랑스 혁명 당시의 상황이 떠올라 “연수-! 너의 이름으로 얼마나 웃기는 일들이 많이 벌어졌던가?!”하는 탄식도 있을 수 있다. 원래 그런 표현을 썼던 이는 지롱드 파 정권에서 내무장관이었던 장 마리 롤랑의 부인이었다. 그는 자코뱅 파 정권 치하에서 단두대에 오르자 “자유…! 너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던가…”하고 탄식했었다.

물론 프랑스 혁명 상황에서의 ‘자유’란 말과 우리 사회의 ‘연수’란 말을 등치시키는 것은 한마디로 무리다. 하지만 그런 연상이 떠오르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오랜 동안 잘못 쓰이고 있는 ‘연수’란 말이 너무 못마땅해서인지 모른다. 따라서 그것은 군이냐 직할시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 군의원들이 지방의 특성상 자유한국당 의원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나 그것은 민주당이냐 한국당이냐 하는 문제와도 거리가 있는 이야기다.

폭행을 한 그 군의원을 제명시키느니 어쩌니 하는 논란도 커보이지는 않는다. 이번의 그런 한심한 현상은 군의원만이 아니라 국회의원이나 기타 많은 공직자들의 ‘연수’를 두루 관통하는 현상이어서 다. 사전에 ‘연수’는 “학문 등을 갈고 닦음”이라고 정의돼 있으나 공직자들의 ‘연수 천국’인 한국에서 연수를 통해 그럴듯한 것을 갈고 닦는 이들이 도대체 있는 것일까? 있다면 0·몇%일까?

대부분의 연수자들은 물론 그것을 보는 국민들의 눈에도 연수는 다른 의미로 비치는 모습이다. 문제의 군의원들이 그랬듯이 질펀한 술자리를 좋아하는 것을 보면 ‘연수(宴修)’로 착각하는 것도 같고 여성 접대부들을 찾는 것을 보면 ‘연수(戀修)’로 착각하는 것도 같다. 그러다 보니 <연수가 말썽을 일으킨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우리는 왜 줄곧 ‘연수’란 말을 고수하는 것일까. 차라리 단체여행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좋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뒤이어 <의원들이 ‘단체관광’을 한다 해서 국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사실상의 단체관광을 연수로 포장하여 허위사회가 되는 것보다야 차라리 나은 것 아닌가?>하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장기간 근속한 공직자들에게 위로삼아서 떳떳하게 단체 해외여행을 시키는 것이 나쁠 것도 없다는 판단에서다. 아니,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공직자들이 해외연수를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번 군의원들이 그렇듯 영어를 하는 이가 없어서 얻어맞은 가이드가 계속 거들어줘야 했다는 말도 ‘연수’라는 말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가당치 않는가를 말해준다. 얼핏 대수롭지도 않아 보이는 문제를 따지는 것은 다소 객쩍은 소리지만 올바른 국어가 올바른 사회의 바탕이 된다는 믿음에서다.

역으로 말해 국어가 불확실한 사회가 깨끗할 수 없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의 바탕엔 지난날 군사독재 시절의 기억이 있어서인지 모른다. 유신독재 시절 언론당국은 ‘물가인상’이란 말을 쓰지 말고 ‘물가 현실화’라고 쓰도록 강요했다. 대학가의 시위는 ‘학원사태’로 써야 했다. 그래서 “지능적인 독재는 헌법이 아니라 국어사전을 고친다더라…”하며 자조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더욱 못마땅한 것은 그런 지시를 내리는 정부 당국보다 언론 스스로의 모습이었다. 언론이 애매한 말을 버리고 정확한 표현을 확립하려는 열성이 부족해서였다.

‘연수’도 그렇다. 그 말은 오랜 세월 빈번히 통용돼 왔다. 그럼에도 ‘연수’가 포장과 전혀 딴판이라면 그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했어야 했다. 아니면 ‘연수’를 ‘단체관광’ 등 정확한 용어로 대체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 언론은 그런데 관심도 없었다. 그것은 ‘연수’란 용어만도 아니다.

요즘은 뜸해졌지만 한 때 너무 귀에 익었던 ‘촌지’란 말도 그랬다. 촌지(寸志)는 원래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이란 뜻으로 촌의(寸意)나 촌정(寸情)과도 같은 뜻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통용된 촌지에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작은 선물’과는 뜻이 전혀 다른 것으로 ‘돈 봉투’라는 말이 가장 적합했다.

그럼에도 우리 언론은 집요하게 ‘촌지’를 고수했다. 이를테면 ‘촌지’라는 어려운 말을 모르는 무식하고 가난한 학부모가 바치는 돈 봉투도 ‘촌지’라고 쓰는 식이었다. 막상 그 학부모는 자식이 학년이 바뀌어 담임이 바뀌었으니 세금 내듯 갖다 바쳤을 뿐 촌지란 말은 들은 적도 없다. 따라서 촌지가 아니라 그냥 돈 봉투를 갖다 바친 것인데도 언론에서 이를 ‘촌지’로 격상시켜준 셈이다.

‘단체관광’을 ‘연수’라고 부르거나 ‘돈 봉투’를 ‘촌지’라는 어렵도 멋진 말로 치장을 하면 우리 사회가 더 유식하고 아름다운 사회가 될까?

결론은 정 반대다. 촌지의 경우도 “촌지! 너의 이름으로 얼마나 추악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던가!”하는 탄식이 통용될 수 있다. 차라리 촌지를 돈 봉투로 불렀다면 그 추악한 면이 오히려 자취를 감추거나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에서는 ‘돈 봉투’가 너무 여러 가지 용어로 불리어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검사가 지방에서 근무하다 다른 곳으로 가면 그곳 유지란 이들이 모아서 주는 ‘전별금’이나 변호사가 검사나 판사의 사무실 비용에 보태 쓰라고 준다는 ‘실비(室費)’ 같은 것도 그렇다. 함께 지낸 이가 떠나면 환송회면 됐지 돈 봉투까지 주기가 멋쩍어 전별금이 되는 것도 우습고 변호사가 검사 사무실 실비까지 걱정한다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처럼 쉽게 쓸 수 있는 말을 어려운 말로 대체하는 사회야말로 백성들이 살기 어려운 곳이다. 거기엔 권력이 있거나 학식이 있는 이들이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먹으려는 기조가 깔려있다. 그들은 국민을 속이기 위해 국어 자체를 혼탁시키는 것이다.

가령 지난날 서양의 의사들이 치료비를 고가로 매기기 위해 어려운 라틴어를 많이 썼다는 식이다. ‘실비’니 ‘촌지’니 하는 말들은 뭔가 떳떳치 못한 돈을 그럴듯한 언어 포장으로 가리려는 것임에도 언론들이 이를 묵인하는 것은 언론 자체도 그 혼탁한 시류의 수혜자여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선지 국어사전 자체도 많이 바뀌어 최근에는 ‘촌지’란 말 뜻 가운데 “정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주는 돈. 흔히 선생이나 기자에게 주는 것을 이른다”는 항목도 신설돼 있다.

언론이 그런 의혹에서 해방되는 길은 사실에 충실한 것이다. 따라서 ‘정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돈은 그저 ‘돈 봉투’라고 표기해야 하고 정 주는 이가 촌지라는 고집하는 경우에도 “‘촌지’라면서 돈 봉투를 건넸다”고 써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길거리 약장수들이 ‘만병통치약’이라는 상표를 붙여 약을 파는 상황을 보도 할 때 그냥 만병통치약이라고 보도 하는 것과 ‘만병통치약’이라고 보도 하는 것의 차이와 같다. 전자는 길거리 약장수들의 수상쩍은 약을 무심히 만병통치약으로 인정해주는 것이고 후자는 '자기네 말로 만병통치약'이라고 보도한 셈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요한복음 1장1절은 종교를 떠나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구로도 다가온다. 인간사회의 정확성은 국어에서 비롯되고 정확한 사회가 공정하고도 깨끗하며 아름다운 사회로 연결돼서다. 바꾸어 말하면 국어가 허위로 분칠되면 어지러운 사회가 되는 것은 연수나 촌지만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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