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는 IMF일으킨 대통령”저평가
“YS는 IMF일으킨 대통령”저평가
  • 박기영 기자
  • 승인 201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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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가 하나회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등에 긍정적 평가 속에서도 IMF와 측근 비리 때문에 평가 절하되고 있다.

임기말인 1997년에는 외환위기가 몰려왔다. 당시 우리나라를 비롯해 타이·인도네시아 등아시아 국가들도 외환위기를 맞았다. 금융기관의 부실, 차입 위주의방만한 기업경영으로 인한 대기업의 연쇄부도, 대외신뢰도 하락, 단기외채의 급증 등에 악순환의 고리가 만든 결과였다. 이를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과 정경 유착의 쓴 대가이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모라토리움(채무지불유예) 선언을 할 사태에 이르자 12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다.

그 해 선거에서 여당인 이회창 후보가 떨어지고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다.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뤄진다. DJ당선자는 YS를 대신해 IMF로부터 195억 달러, 세계은행(IBRD)과 아시아개발은행(ADB)으로부터 각각 70억 달러와 37억 달러를 지원받아 외환위기의고비를 넘겼다.DJ는 외환시장과 물가 안정을 위한 고금리 정책과 재정긴축과 수요 억제를 통한 경상수지흑자 정책을 추진해 단기성 고금리 차입금인 보완준비금융(SRF) 135억 달러를 1999년 9월에 조기 상환한다.

그리고 2001년부터는 60억 달러의 대기성차관자금(SBL)을 상환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 8월 23일 1억 4000만 달러를 최종 상환했다. 2004년5월까지 갚도록 예 정되어 있던IMF 차입금 전액인 195억 달러를 조기 상환했다. 구제금융을 신청한지 3년 8개월 만에 IMF를 벗어났다. IMF구제금융신청은 YS에게 두고두고 오점이 됐고 저평가의 이유이기도 하다.

노동법 날치기

YS에겐 또 다른 오점이 있다. 평생 의회주의로 살았던 YS는 노동법 날치기 처리를 했다.1995년 지방선거에서 참폐한 여당은 총선을 앞두고 5공 흔적이 강한 민자당을 버리고 신한국당으로 당 명을 개정한다. 하지만 총선 결과는 여소야대다. 같은 해 노동법 개정안과 안기부법이 통과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YS는 야당의원을 영입 시켜 여대야소로 만들어 96년 날치기로 노동법안을 통과시켰다.

소통령 현철 측근비리

YS집권시절‘소통령’으로 불리던 차남 현철 씨가 청 와대와국정원 등에 측근들을 앉히고 사실상 국정을 농단했다.1997년 1월 한보그룹 특혜대출 비리사건이 터지자‘ 한보비리의 몸통’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결국 그해 5월 17일 기업인으로부터 청탁과 함께 66 억여 원과 12억여 원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구속 돼 2년간 실형을 살았다. 김현철 비리는 YS의 임기 후반 부정적 평가의 배경 이기도하다.

3당 합당 후유증 심각

YS가 3당 합당으로‘문민 대통령’집권 돌파구를 열었다. 그 결과 지역주의가 더욱 고착됐다. 1990년 1월 22일, 당시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125 석)은 통일민주당(59석, 김영삼)과 신민주공화당(35 석, 김종필)은 내각제개헌이라는 밀약을 조건으로 합당해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다.
야권에선 3당 야합이라고 비판했다. 진보진영에선 기회주의적 거대보수정당이라고 비판했다.

YS사망이후 고평가 왜?

YS는 퇴임 이후 정치적 목소리를 냈지만 IMF와 측근비리 오점 안에 묻혔다. 서거 이후, 그간 YS에 대한 숨은 진면목이 드러나면 서 세인들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에 대해 정치평론가들은“YS에 대한 지지도 상승 은 일시적 분위기에 편승한 과도한 고평가”라면서“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정치인이긴 하지만 통합이나 화합과는 거리가 먼 자기만의 정치를 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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