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쿠데타 성공 직후 부딪힌 현실 "정치의 장벽을 허물다"
5.16 쿠데타 성공 직후 부딪힌 현실 "정치의 장벽을 허물다"
  • 김길홍<언론인·한국미디어서비스 회장>
  • 승인 201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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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 대통령의 5.16 전후 위기 수습(하)
▲ 최고위원 전원이 배석한 가운데 정권 이양에 관한 특별성명을 발표하는 박정희 의장. 그 이전에 대통령 책임제를 채택한 새 헌법을 제정하고 선거를 실시, 100명 내외의 단원제(單院制)로 할 것이라고 밝혔다.(1961.8.12)

국가의 현실과 혁명의 명분 대통령이 묵인

1961년 새벽 3시 박정희 소장이 지휘하는 쿠데타군이 한강을 건넜다. 쿠데타군의 병력은 3600여명이었다. 서울에 진입한 병력은 중앙청, 국회, 국방부, 방송국 등을 접수한 다음 장면 민주당 정권의 각료와 요인들을 체포하고 청와대를 포위하면서 국가권력을 일단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516일 오전 830분부터 육군본부 상황실에서 개최된 육본 회의에서 군부의 지휘실권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설전을 벌였다. 육군의 최고 지휘권을 가진 장도영 참모총장 등 그의 참모들과 박정희 소장과 혁명군 장교 50여명이 숨가쁜 토론을 벌였다. 결국 장도영 총장 등 각군 참모총장과 혁명군 박정희 소장과 김재춘, 류원식 등이 함께 청와대로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상의하여 혁명에 대한 재가를 받도록 합의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 지휘관과 국군 수뇌부들이 청와대에 도착해 인사를 하자 올 것이 드디어 왔구나라는 첫 반응을 보였다. 장도영 참모총장은 간밤에 보고 드린 대로 서울 근교에 주둔하는 부대와 일부 전방부대가 서울 시내로 진입했습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라고 보고했다.

곧이어 박정희 소장이 보고를 시작했다. “저희들은 각하를 절대적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저희도 처자가 있는 몸입니다. 오직 국가와 미족을 위하는 애국의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이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국방부, 육본, 방송국을 비롯해 서울 전역은 지금 혁명군이 관리하고 있고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 혁명의 결행을 지지해주시고 계엄을 추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으로 박정희를 대면한 윤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애국하기 위해 혁명을 했다면 애국하는 방향으로 일해야 하지 않겠소. 나는 아직 그대들의 충성을 액면 그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사태에 대한 책임은 물론 정치하는 우리들이 크다고 보지만 이왕 계엄이 선포됐다 하니 그대들의 말이 곧 법이요. 생사가 그대들 말 한마디로 결정될 것이 명백합니다. 진정 애국에서 나온 거사라면 절대로 피를 흘리지 말아야하오. 계엄은 이미 선포됐으니 추인 할 수 없소박정희 소장이 계엄 추인을 거듭 요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강하게 거절했다.

쿠데타가 성공한 것은 이틀 후인 518일 박정희를 비롯한 혁명군은 일단 서울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나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이 혁명군의 원대 복귀를 지시하고 참모총장 장도영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여 16일 이후 이틀여 불안한 정세가 지속되어 혁명군 지휘부는 속을 태웠다.

5.16 쿠데타가 드디어 18일을 기점으로 결정적으로 성공한 배경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초기 혁명에 반대한 이한림 1군사령관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고 야전군들이 혁명에 추후 가담했다. 18, 19, 20일 연사흘동안 육사, 공사, 해사 등 3군사관 학교 생도들이 혁명지지 시가행진에 나섰고 18일 민주당정부의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장면내각이 총사퇴를 발표하면서 사태는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에 앞서 태도를 분명히 밝히지 않았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박정희 소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고사하던 혁명위원회 위원장직을 수락하고 혁명에 동참할 것을 선언해 정정의 불안한 사태를 사흘만에 수습하고 평정했다.

민주당 장면정권이 국무회의 의결로 합법적으로 사퇴를 결정하고 5.16 군사혁명위원회에 정권을 내놓는 상황에 이르렀다. 민주정부의 윤보선 대통령은 물러날 결심을 굳히고 19일 밤 하야성명을 발표했다. 형식상 대한민국은 국가원수가 공석이 되는 위기를 맞자 장도영과 박정희 등 군사혁명위 지도자들은 실권이 없는 상징적 대통령인 윤보선을 찾아가 번의해 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했으나 처음에는 거부당했다. 외무차관이었던 김용식이 다시 윤 대통령을 방문해 국가원수가 공석이 되면 외교상 어려움이 많고 국제적으로도 곤란하다는 설명을 듣고 태도를 바꾸었다. 윤 대통령은 20일 오후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부의장이 배석한가운데 하야를 번의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최고회의 수뇌부들이 만류하고 또한 국제적으로 미치는 영향과 나이 많은 사람이 나라를 해치는 것을 원하지 않으므로 지금 우리나라 형편을 생각하여 만부득이 하야 결정을 번의하기로 했다혁명정부의 지휘부는 윤 대통령에게 큰 비중을 두지 않았으나 국가의 체통과 외교관계를 고려하는 정부의 모양새를 그런대로 갖추었다.

국가재건 최고회의와 혁명정부의 내각 구성

군사혁명위원회(위원장 장도영. 부위원장 박정희)는 윤보선 대통령이 하야를 번의하기 하루 전인 20일 혁명위원회 명칭을 국가재건 최고회의로 바꾸고 최고위원 30, 고문 2명을 선출했다.

아울러 장도영 최고회의의장을 혁명정부의 내각수반, 외무장관 김홍일 예비역장군, 내무장관 한신, 재무장관 백선진, 법무장관 고원증 등 현역 군장성과 장교를 임명하고 박기석, 장경순 등 예비역도 기용했다. 혁명정부의 최고 의결기구라 할 수 있는 최고 회의에는 의장 장도영, 부의장 박정희, 위원 박임항, 김신, 이주일, 김용순, 채명신, 박창암, 유원식, 오치성, 길재호, 이석채, 김동하, 김성은 등이 참여했다. 계엄사령관을 겸직한 장도영 중장은 19일 혁명 후 처음 가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우리나라 국체는 민주공화국이며 정체(政體)문제는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고 밝힌 다음 최고회의가 최고권력 기관이며 그 밑에 현존하는 사법부 기관이 존재하고 행정부를 새로 조직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자리에는 박정희 소장도 장도영과 나란히 앉아서 회견이 진행됐다. 바로 다음날 혁명내각이 출범한 것이다.

국가재건 최고회의는 장도영, 박정희를 비롯한 지도부와 임명장을 받은 신임 장관들과 함께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민의원(현 태평로 서울시의회 건물)에 사무실을 열고 본격적인 혁명과업을 착수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명과 가족의 안위까지 내건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는 거사 4일 만에 체제를 정비하고 국민에게 제시한 혁명공약의 실천에 나섰다. 쿠데타 3일만에 용공분자 2천여명을 체포하여 반체제 적화 책동을 차단하고 의법조치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21일 오후에는 자유당시절의 정치깡패 이정재 등 200여명을 잡아들여 군경의 지휘로 덕수궁에서 서울시내 중심가가지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깡패생활 청산하고 바른 생활하겠습니다등의 플래카드를 앞세워 시가행진을 시켰다. 혼란했던 치안질서를 바로잡고 민생침해 사범을 강력 단속함으로서 사회안정을 유지하는 치안행정을 강화했다. 혁명 9일 지난 5.25 최고회의는 농민의 부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농가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농어촌 고리채 정리를 단행해 가난과 빚에 허덕이는 농민들의 숨통을 열어주었다.

7.3 장도영 거세되고 혁명 실세 박정희 전면 등장

5.16 군사쿠데타가 성공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혁명주역들은 혁명과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권력구도의 새판을 짜는 일을 비밀리에 연구했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어 갖지 못한다는 속설을 입증하듯이 육사8기생인 이석제, 오치성, 길재호 중령 등은 기능이 강제정지된 헌법을 대체할 국가재건비상조치법 초안을 작성했다. 법안 제정 과정에서 권력을 개인의 역할과 능력 및 전문성에 따라 나누어 가져야 마땅함에도 목숨 건 5.16 혁명에 무임승차한 장도영이 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 등의 5개 권력요직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에 집중됐다. 장도영의 진퇴문제를 둘러싸고 고민하던 혁명의 엘리트 청년장교들 중 성격이 깔끔하고 단호한 이석제(총무처장관, 감사원장)가 총대메기를 자처했다.

장도영을 찾아가 이석제는 간 큰 담판을 벌였다. “이 혁명은 각하가 주인공이 아니라 박정희 장군이 계획하고 실행한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들에게 협조해 주시면 각하의 위상에 어울리는 대접을 꼭 해드리겠습니다. 각하 혼자서 다섯개 직책을 다 수행하시기는 어렵지 않습니까장도영은 당찬 이석제의 요구에 대해 일개 중령이 참모총장을 협박하는 건가라고 화를 냈지만 이석제는 이에 굴하지 않고 혁명이 아이들 장난입니까. 우리가 계급 가지고 혁명한 줄 아시면 착각입니다. 한강다리를 넘을 때 우리는 이미 계급의 위계질서를 벗어났습니다라고 받아쳤다.

장도영은 그래도 자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참모총장직을 지키려했으나 임시 헌법 격인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최고회의에서 통과돼 공포된 만큼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최고회의의장을 맡은지 44일만인 7.3일장도영은 권력에서 실각하는 운명을 경험했다. 권력은 역시 무상한 것이라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게 한다. 혁명정권의 2인자인 내각수반 후임에는 송요찬 장군이 임명됐다.

예정된 수순에 따라 7.4 국가재건 최고회의의장에 취임한 박정희는 기자회견에서 배수의 진을 친 우리들에게는 이제 후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 앞에는 오직 전진만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 후 3개월이 지난 뒤 10월 장도영 씨를 비롯한 반혁명 사건 관계자들은 기소됐다. 권력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무상하다는 역사의 교훈을 상기하게 된다.

5.16 거사후 87일 만에 박정희 의장은 육군중장으로 진급하고 혁명에 참여한 56명의 장성이 승진했다.5.16 거사의 성공이후 논공행상이 이루어진 셈이다.

 ▲ 방미 중인 박정희 의장이 백악관에서 케네디 미 대통령의 안내로 회담장에 들어서고 있다.(1961.11.1)

63년 민정이양 약속 경제발전 농촌진흥 독려

최고회의의장 박정희 중장은 61812일 혁명공약에서 약속한 정권이양 시기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민정이양의 스케줄을 국민 앞에 밝힌 것이다. 정권이양 시기는 63년 여름으로 예정한다. 633월 이전에 신헌법을 제정하며 정부형태는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한다. 635월 총선거를 실시하며 국회구성은 의원정수 100명에서 120명의 단원제로 한다는 등 향후 출범할 제3공화국의 출범 일정과 권력구조의 대강을 설명했다. 참고로 장면 민주당정권 때는 내각책임제와 민의원, 참의원 양원제의 헌법을 운용했다. 민정이양 일정에 따르면 그로부터 2년 후 민간정부를 구성하여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대국민약속이며 동시에 혁명과업이 성취되면 군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혁명공약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박정희 의장의 이같은 민정이양 계획이 발표되자 자유당과 민주당 출신의 정치인들은 계엄령으로 정치활동이 제한된 까닭에 공개활동은 자숙하고 자제하되 은인자중하면서 63년 정치 재개에 맞추어 서서히 꿈틀대면서 활동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 의장은 농촌 일손돕기와 농업진흥 등 본격적인 국정챙기기에 박차를 가했다. 그해 11월 미국을 방문하는 길에 일본에 잠깐 들러 이케다 총리와 한일정상회담을 갖고 한일 현안을 조속하게 타결하는데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박 의장은 군인신분으로 1114일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 케네디 대통령과 역사적인 한미정상회담을 갖고 쿠데타로 집권한 약점을 극복하고 어렵사리 한미동맹의 길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의장은 미국이 치르고 있는 월남전에 국군의 월남파병을 제의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월남파병 제의는 미국이 비밀로 부쳐 당시 공개하지 않았으나 1996년 외교문서를 복원하면서 밝혀졌다. 박 의장은 미국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군사혁명은 불가피한 것이었으나 필요한 기간 이상 연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정권이양 약속의 실천을 다시 강조했다.

박 의장은 621월 군정초기에 한강의 기적을 예고하는 연 7.1퍼센트 성장을 목표로 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야심차게 발표하고 경제발전에 시동을 걸었다. 622월 울산공업단지를 조성하는 첫 삽을 뜬 박 의장은 민정이양이 이루어질 때까지 혁명공약 실천의 기초작업이라도 닦아 놓아야겠다는 열정으로 국정전반을 독려하는데 앞장섰다.

▲ 밀짚모자에 수수한 옷차림으로 농촌을 찾아가 촌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박정희 의장.

윤보선 대통령의 사퇴로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혀

5.16전후 하야를 번의 했던 윤보선 대통령이 10개월 후인 62322일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윤 대통령이 사퇴 성명에서 혁명과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만큼 국내외적인 파문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일주일 전에 최고회의에서 통과된 그 정치인의 정치활동 규제법에 불만을 품은 사임했다는 것이 당시 정가의 일반적인 분석이었다.

이때부터 박 의장을 앞세운 혁명주체 중심의 신진 정치세력과 구시대 정치세력과의 충돌과 갈등이 비롯됐다. 최고회의가 제정한 정치활동 규제법은 일시적으로 구시대 정치인의 발을 묶어놓을 수 는 있어도 혁명정부에 협력할 의사가 있는 다수의 유력인사까지 반정부 인사로 내몰았다. 정치정회의 부작용을 최소화하지 못하고 당시의 혁명정부와 그후 출범한 제3공화국에도 상당한 부담을 주었다. 복잡하고 미묘한 정치의 현실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한 순박한 군인들의 단견(短見)으로 민정이양 구상은 시행착오에 직면했다.

6212월 제3공화국의 헌법이 국민투표를 거쳐 공포됨으로서 631월부터 규제대상이 아닌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이 재개됐다. 박정희 의장은 632185.16 혁명정신의 계승, 정치보복 금지 등 9개항의 조건을 여야 정치인에게 제시하고 이를 수락하면 자신은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충격적인 민정불참을 선언했다. 그후 3164년간 군정기간을 연장할 것을 제의하고 가부를 국민투표에 붙이겠다고 발표했다. 혁명정부의 민정이양 방침이 오락가락하자 윤보선, 장택상, 김도연, 김준연, 이범석 등은 박 의장을 면담하고 민정이양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박 의장은 기성정치인들은 자진해서 정계진출을 단념해야한다는 새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신진 정치세력과 기성정치 세력간의 대립과 의견차이를 실감한 박 대통령은 서양에서직수입한 서구민주주의보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창조해야한다는 정치철학을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특별하게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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