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관리는 무섭지만 경제관료는 무한신뢰
권력관리는 무섭지만 경제관료는 무한신뢰
  • 김길홍<언론인·한국미디어서비스 회장>
  • 승인 2015.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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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 추억과 비화 연재(8)
▲ 연두교서 발표를 마친 후 국회의장실에 들러 반년 만에 만난 박순천 민주당 대표최고의원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이효상 의장,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이상철 국회부의장 등이 곁에 서 있다. (1967.1.17)

박정희 대통령은 목숨을 걸고 거사한 61년 5.16쿠데타 2년 6개월 만인 63년 12월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거쳐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건국의 자유당 이승만, 내각제의 민주당 윤보선 대통령 뒤를 이어 46세의 나이에 영욕이 교차하는 최고의 권좌에 올라 파란만장한 혁명가의 정치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5.16초기 군사혁명위원회ㆍ국가재건최고회의ㆍ혁명내각 등에 참여한 인물은 행정ㆍ정치 전문가가 아닌 현역 혁명주체들이 거의 전부였다. 현역의 최고회의 멤버들 가운데 1963년 박 대통령 당선이후 일부는 군으로 복귀하고 다수는 예편 후 내각과 요직에 참여하거나 국회 등 정계에 진출했다. 최고회의 때는 민간인으로는 예비역 장성 출신인 김홍일(고문), 송요찬(내각수반)씨가 나섰으며, 순수민간인은 유진오 고대총장(재건국민운동본부장), 장태화, 이학수씨 정도였다.

박 대통령은 5.16 혁명동지를 인간적으로 배려하고 사후관리한 의리 있는 지도자였다. 혁명을 반대하고 저항했던 군지휘관을 강제 구금하거나 반혁명재판에 회부했지만 상당한 기간이 경과한 후 김재춘, 이한림씨의 경우처럼 다수를 공직에 기용하거나 추후 국공기업의 장으로 일자리를 알선하는 배려와 도량을 보였다. 5.16후 오랜 세월이 지난후에도 고령의 혁명동지들이 병마와 생활고에 힘들어하는 소식을 접하면 반드시 사람을 보내 온정을 베풀고 자식들까지 돌보는 자상함을 보여줬다. 신의를 중시하는 인간 박정희의 타고난 천성 때문에 항상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었고 혈기왕성한 청년장교들이 참여해 5.16을 성사시켰다.

혁명초기는 군출신 기용선진 행정기법 처음도입

박 대통령은 쿠데타 성공 후 거사의 주역으로 참여한 군지휘관과 장성들로 혁명정부를 구성하고 혁명공약을 중심으로 한 국정의 개혁과 쇄신 및 과거청산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쿠데타 5일 만에 용공분자, 정치깡패 체포에 나섰고 농촌의 고리채 정리를 단행했다. 한일ㆍ한미정상회담도 개최하면서 혁명정부의 안정기반을 다졌다. 경제개발 1차 5개년계획, 울산공단 건설도 최고회의 시절 발표했다.

현역군인의 신분으로 군사혁명정부의 최고회의의장을 맡은 박정희 중장은 정부의 행정업무에 미국에서 교육받은 국군의 운용방안을 원용한 선진 행정 처리 시스템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지휘조직과 참모조직의 시스템을 상호 유기적으로 연계, 보완하는 행정기법을 채택했다. 비상사태 하의 국가위기에 대처하는 제반 국정운영과 개혁추진 등에 주목받는 성과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민정이양 전까지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잠시 내각수반으로 있다가 군출신 송요찬장군이 내각수반과 경제기획원장관을 맡았고 내무ㆍ외무ㆍ재무ㆍ문교ㆍ건설 등 일반 행정분야의 장관도 현역군인을 기용했다. 이렇게 혁명정부의 혼란기에는 군출신들이 행정책임을 맡아 힘으로 밀어 붙였다.

박 대통령은 60년대 후반부터는 내각과 대통령비서실 대부분을 공무원출신과 민간전문가로 기용하고 군출신은 행정일선에서 많이 퇴진시켰다. 권력기관인 중앙정보부장은 군출신인 김종필, 김재춘, 김형욱, 이후락씨 등을 거쳐 신직수 전법무장관을, 비서실장도 군출신인 박태준, 이후락씨 다음에 김정렴 전 상공장관을 임명해 10년 가까이 보좌를 받았다. 경호실장에는 혁명실세였던 박종규, 차지철씨 두 사람만 썼다. 정치와 밀접하고 체제문제를 다루는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국세청, 국방장관, 보안사령관 등 핵심 권력기관의 장은 평소 신임하는 충성스러운 최측근을 중용했다. 국가권력의 관리와 정권의 보위에 만전을 기하려는 표적인사로 분석할 수 있다.

특히 박 대통령의 권력기관 인사는 Cross Check(교차확인)와 Devided and Control(분할 통치)및 Checks and Balances (견제와 균형)의 절묘한 인사포석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권력기관의 2인자(세컨드맨)에는 신임하는 측근을 임명했다. 상호 견제, 감시하는 역할과 권력기관장들의 자연스러운 충성경쟁을 유도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상호 견제적인 권력기구의 운용 시스템은 국정운영의 효율성과 권력관리의 실효성을 제고하려 했다. 아울러 정권과 체제에 도전하거나 반기를 드는 불순세력과 요경계인물을 빈틈없이 감시감독하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기대한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우수한 민간 엘리트출신의 전문학자, 전문관료, 언론인, 교포과학자 등을 망라한 인재를 발굴하여 내각과 비서실에 폭넓게 등용했다.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부여하여 소신껏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80년대 고도산업사회의 준비와 조국근대화를 위한 민족중흥에 올인시키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인구비율에 따른 철저한 지역안배의 내각을 구성하여 지역감정을 해소하려 애썼으며 인사의 연령층도 청장노(靑壯老)를 고르게 배정한 것이 특징이었다.

권력관리와 경제성장 요직 기라성같은 인물 배치

박 대통령의 18년 재임기간동안 2인자는 있어도 후계자는 없었다. 혁명초기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씨는 거사 44일만에 실각했고 혁명정부 내각수반이었던 송요찬씨는 63년 박정희 장군의 대통령출마를 반대하다 옥고를 치뤘다. 송요찬씨는 그러나 70년 인천제철사장에 임명되어 혁명정부에 참여한 혜택을 입었다.

초대 최두선 국무총리가 물러나고 64년 5월 정일권 외무장관이 후임으로 임명돼 6년여 재임했고 71년 6월 5.16을 기획했던 한국정치의 풍운아 김종필씨도 4년6개월 서열 2위인 국무총리로 있었다. 정일권, 김종필씨는 요즈음 상상을 못할 정도로 장기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자리를 지켰다.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박대통령 체제하에서 형식상 2위 서열의 국무총리라는 내각의 수장을 맡아 처신하기는 당시 권력의 속성을 아는 전문가라면 참으로 어렵고 위험한 직위였다.

한마디로 행정부처 장관을 비롯한 내각의 관리 역할을 성실하게 대행하는 의전ㆍ대독 총리라고 불리워졌다. 권한은 없고 정치적으로 책임만 지는 자리라는 속설도 있었다. 정일권씨는 군의 선배였고 김종필씨는 조카사위라는 특별한 인연을 가졌다. 박대통령이 통치하는 권력관리와 통치 방식에 순응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제3공의 최장수 총리로 각각 재임했다. 그만큼 정ㆍ김두 총리의 직무수행과 개인적 처신이 돋보이고 뛰어난 것으로 후세에 알려졌다. 김종필씨(약칭 JP)는 혁명의 주역이었고 대통령의 인척인 까닭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변에 항상 추종세력이 모여들었다. 공화당 안팎에 JP계보를 형성하기도 했고, 정부 여당 일각에서는 때 이르게 박 대통령의 후계자로 거론된 해프닝도 있었다. 후계자의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많이 받았다. 보이지 않는 정보수사 기관의 감시와 견제로 수시로 불편을 겪은 것으로 전해졌다.

박 대통령은 통치의 권위 유지와 절대권력의 보위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냉엄한 것으로 외부에 비쳐졌다. 박 대통령의 재임시 JP는 60년대부터 70년대 후반까지 3선개헌과 10.2 항명파동 등의 고비와 파란을 뛰어넘고 인고의 긴 세월을 용케도 견디었다.

명실공히 시종 2인자의 자리를 무난하게 유지했다. 학문적으로도 한국 현대정치사를 주름잡았던 그의 정치인생 전반을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JP는 박 대통령사후 3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혁명동지와 처삼촌으로서의 인간적 의리와 정치적 신의를 마지막까지 저버리지 않으면서 올해 90세를 맞았다. 아마도 박대통령과 JP는 혁명동지로서 제3공화국의 창업과 수성에는 정치적으로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공동운명이라는 인식을 같이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서로 생전에 이견과 유감이 있었더라도 섭섭함을 말하지 않고 무덤까지 비밀로 갖고 가기로 결심했을지 모른다.

워커힐에서 개최된 아시아의원연맹(APU) 2차 총회에 참석해 치사를 한 뒤 대회 의장인 이효상 국회의장(오른쪽 끝)의 안내로 한국대표단의 김종필 공화당 의장과 악수를 나누는 박정희 대통령 왼쪽에 박준규, 오른쪽에 최치환 의원이 보인다. (1966.9.3)

제2인자 김종필ㆍ정일권, 정치ㆍ행정 대리관리

풍운아 기질의 정치거목 JP와 달리 정일권씨는 본인이 대내외적으로 정치적 야심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부단하게 노력했던 군인출신 외교관과 행정가와 정치인이었다. 국무총리 시절 국회본회의장에서 김두한 의원으로부터 오물세례를 받고도 잠시 후 다시 본회의장에 출석해 답변하는 유독 참을성 많은 정치인이었다. 육군참모총장, 주미대사, 외무장관, 국무총리 6여년, 국회의장, 3선의원을 지냈지만 전혀 파벌을 만들거나 박 대통령의 오해나 의심 받을 언동을 하지 않았다. 공적인 행정ㆍ정치분야 업무 이외에는 인적 네트워크와 상호 교류의 범위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화려한 경력과 고위직책을 활용하여 우호적 정치 지지세력을 규합한다는 우려와 비판의 시각을 철저히 배제하는 행보를 보였다. 부담 없는 친교인사도 주로 이북출신의 예비역 장성이 주류를 이루었다. 생전에 어느 기자가 “총리께서는 왜 이북출신만 만나고 타지역 정치인은 안 만납니까”라고 묻자 정일권씨는 “나같은 사람이 아무나 함부로 만나서 할 얘기 못할 얘기 다하면 온전하겠느냐”고 대답했다. 한국정치의 제2인자로서 국군ㆍ행정ㆍ입법의 화려한 고위직을 두루 거치면서 해방과 건국과 혁명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산업화에 기여하면서 국가발전에 봉사한 드물게 보는 행운의 팔방미인 같은 정치지도자였다.

박 대통령은 국회와 정치권 주변에 세심한 주의와 관심을 가진 대통령이었다. 국민소득을 배가하고 경제성장의 속도를 높이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 등 제반 경제정책을 국회에서 적극 뒷받침하는 입법활동과 정치권의 동참을 독려했다. 자신이 총재인 민주공화당은 물론 반대당인 야당정치인도 직간접적으로 관리했다. 윤치영, 정구영, 백두진, 이효상, 백남억, 박준규, 정일권, 정래혁씨 등 저명한 정치인들을 공화당 당의장과 국회의장으로 선임해 집권당과 국회를 맡겨 강력한 후원 정치세력으로 울타리를 튼튼하게 쳤다. 집권여당의 핵심당직에는 혁명에 동참했던 김종필(당의장), 길재호, 오치성씨 등 혁명주체들을 주도세력으로 앉혀 대신 관리ㆍ운영하는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군정 반대투쟁을 시작했던 제1야당에 대해서도 박 대통령은 관심을 갖고 대화와 소통을 꾸준하게 시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야당 당수였던 거물 류진산, 박순천, 유진오, 김영삼대표 등과 야당중진이었던 고흥문, 박병배, 정해영의원 등 적지 않은 숫자의 야당인사들과 대화와 소통을 계속했다. 국익차원의 정책 협조와 인간적 개인친분을 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40대 기수론으로 세대교체를 주장했던 김대중, 김영삼씨가 군사독재를 거세게 반대하고 재야세력도 비판에 가세했지만 그때만 해도 정당과 정치가 활발하게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었다. 당시 국회는 여야간의 정치적 타협과 극적인 협상이라는 의회민주주의 보편적 관행과 다수결 원칙이 지켜진 경우가 허다했다.

독재비판 받았지만 야당당수, 중진과 소통과 대화

박 대통령은 정치권은 친정체제와 대리관리로 권력을 관리하고 체제를 보위했다. 내각과 행정은 참모조직(대통령비서실)과 지휘조직(행정부처)으로 나누어 사람과 시스템 위주로 국정을 통할 운영했다. 대통령비서실 운영은 전문적 참모연구와 지시사항 점검 등에 창의력을 발휘하도록 비서실장에게 지휘감독을 위임했다. 말 그대로 입이 없고 눈과 귀만 열어놓는 말 그대로의 “그림자 보좌”와 타이밍을 맞추는 참모역할을 강조했다. 리더십 발휘와 정치외교 및 홍보분야는 주로 민간전문가들이 보좌했다. 이동원, 김동조, 박동진, 최규하, 김용식 장관 등은 외교부문을 담당했다. 류혁인, 김성진, 임방현, 김치열, 김유후씨 등은 박 대통령의 통치기반을 법률과 제도로 강화하고 리더십을 포함한 국정홍보 등의 중요업무를 담당했다.

김정렴, 정소영, 김용환, 오원철, 이희일씨 등 1급 경제브레인들이 박 대통령이 지시한 제1~2차 경제개발계획과 경제성장 플랜을 진지한 토론을 거쳐 성안하여 김학렬, 장기영, 남덕우 경제기획원장관 등 내각에 차질 없는 추진을 당부했다.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면서 참모연구에 국한한 비서실 업무의 엄격한 제한과 본인들의 철저한 자기관리 때문에 류혁인 정무수석은 대외적으로 박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 한컷도 공개되지 않았다.

박 대통령시절 비서실운영은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이 내규로 정한 보좌기능과 소관업무의 구분에 따라 원칙과 한계를 엄수했다. 그때도 대통령비서실에 민정수석실과 사정수석실이 존재했다. 사정과 민정은 공무원의 공직기강과 인사스크린을 담당하고 친인척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두 수석실은 대통령 지시사항과 특명의 관심분야가 제대로 추진되며, 공직비리가 없는지, 첩보를 불시에 점검하고 확인하는 암행어사의 역할도 수행했다. 초기엔 군출신의 김시진(민정), 홍종철(사정특보)씨가 맡았으나 후반기에는 판사와 교수출신인 김영준, 박승규 씨가 후임으로 일했다. 서정쇄신이란 이름으로 공직비리를 단호하게 척결하고 친인척들을 담당수석에게 전권을 위임해 말썽 없이 관리했다. 당시 비서실엔 요즘같이 성추행, 문건유출, 기강해이 등 대통령비서관의 일탈 행위는 일체 없었다. 충성심과 국가관과 도덕성이 투철하고 근무기강이 엄격했으니 격세지감을 통감한다.

한편 내각에 포진한 김유택, 유창순, 남덕우, 김학렬, 장기영, 전예용, 박충훈, 서봉균, 태완선, 홍승희, 신현확, 최각규, 장예준 장관 등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경제전문 각료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행정재량의 전권을 위임했다. 유능하고 사심 없는 경제장관들에게 일선 경제개발계획의 추진과 경제성장 관련 제반 시책과 행정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과 권한을 동시에 맡겼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이 지휘총괄하는 점검확인과 추진독려를 거듭한 까닭에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컫는 조국근대화의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 국가경영의 독특한 유형과 국정운영의 방식들은 곧 박 대통령 리더십이 정말 위대하다는 대표적인 반증들이라고 할 수 있다.

김학렬, 김정렴, 남덕우, 김용환 등 경제브레인 신뢰

적재적소에 인재를 기용하는 용인술을 구사한 박 대통령은 국정전반에 걸친 다양하고 폭넓은 통찰력과 방대한 정부조직의 장악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유일한 지도자였다. 중앙정보부등 수사정보기관의 수장과 국방부등 군 최고 지휘관등은 충성도와 신임을 두루 갖춘 인물로 임명했다. 자신의 권위와 정권의 안위에 민감한 부서와 국군은 직할체제로 다스리고 정치권이나 외부의 불필요한 접근과 간섭을 가급적 배제시켰다. 권력관리의 허점을 보이지 않고 대통령 권위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경고의 치밀함과 무서움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윤용필사건 사상초유 후폭풍

73년 4월 발생한 윤필용장군 사건이 바로 그렇다. 박 대통령의 후계구도를 언급한 발언 등이 권력 심층부에 일파만파의 엄청나 회오리바람을 몰고왔다. 수경사령관인 윤필용 소장은 군내부의 박 대통령 심복이었다. 사석에서 박 대통령의 후계자는 아무개가 적임이라고 한 발언이 몇 개월 뒤 박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육군보안사가 수사에 착수해 육군 장교 10명이 재판을 받았고 장교 30여명이 옷을 벗은 군내부의 엄청난 대형 참사였다. 박 대통령으로부터 수사지시를 받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수사범위를 군내 사조직 ‘하나회’의 인맥까지 의도적으로 확대했다. 윤 장군과 함께 손영길, 김성배, 지성한씨 등에게 전기고문까지 자행한 사실을 박종규 경호실장과 김시진 민정수석 등이 뒤늦게 박 대통령에게 보고해 73년 8월 3관 구사령관으로 좌천됐다. 그 후 항만청장으로 재직시 80년 5.17을 전후해 당시 억울하게 피해를 입었던 신군부 주도세력에게 체포되어 수사를 받고 자리를 물러났다. 권력과 영욕(榮辱)은 무상(無常)하다는 역사의 교훈을 실감하는 한편의 정치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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