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서민들 배려하는 소탈하고 청렴한 대통령
가난한 서민들 배려하는 소탈하고 청렴한 대통령
  • 김길홍(언론인ㆍ한국미디어서비스 회장)
  • 승인 2014.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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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의 추억과 비화 연재 ④

경북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19171114일 태어난 박정희 대통령은 가난한 농가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초가집에 살았고 잡곡으로 거의 끼니를 때우면서도 선비집안의 후예로서 타고난 배움의 열의는 대단했다. 비록 끼니를 거르고 살기 힘들어도 자식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학교에 보내 교육을 시키는 것이 영남 유가(儒家)의 오래된 가풍(家風)이었다. 박 대통령은 일제 때 다녔던 보통학교 시절의 옛날 얘기를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들려주면서 고생하면서 성장했던 고향 상모리의 지난 날을 회고했다.

보리혼식 싫어하는 기자에게 핀잔

1970년대 중반은 국내 쌀 생산량이 절대 부족하여 전국적으로 정부가 보리혼식을 장려하던 시기였다. 박대통령이 청와대 비서실부터 보리혼식을 솔선해서 실시함으로서 모든 정부 부처와 국민들의 모범을 보이라고 지시했다.

어느날 박대통령이 오랜만에 청와대 본관에서 출입기자단을 위한 오찬 간담회를 열었다. 당시만 해도 대통령의 말씀내용과 생각 하나 하나가 국정전반은 물론 정치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정치경제에 관심 있는 정치지도자와 고급관료 등을 비롯해 재계인사와 지식인들은 청와대기자단 오찬 간담회에서 대통령이 어떤 의견과 소신을 밝혔는지 무척 신경을 쓰던 때였다.

간담회에서 대통령과 기자들간에 오간 질문과 답변은 대변인실에서 특별한 사안은 제외하고 거의 전체를 대변인실에서 항상 오프더 레코드(일정기간 보도 하지 않는다는 기자와 취재원의 협약)의 조건을 붙였다. 따라서 신문에 기사는 쓰지 못하고 대통령의 말씀은 기록과 메모를 통해 데스크(편집진)와 경영진에게 비중이 큰 참고정보로 보고되는 것이 관례였다.

박대통령은 군인생활을 오래해서 그런지 보통사람보다 빨리 식사를 끝내는 편이었다. 필자가 청와대 출입기자단 간사를 맡은 까닭에 이날은 박대통령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보리를 반이상 섞어 지은 밥이라 그런지 별로 맛이 없었다. 다른 기자들보다 늦게 밥먹는 필자를 보고 박대통령은 속이 불편한가? 밥을 왜 그렇게 젓가락으로 맛 없게 먹느냐고 꼬집어서 묻는 것이었다.

각하, 저는 어릴 때 시골에서 보리밥을 하도 많이 먹어서 서울와서는 보리밥은 먹기 싫어 잘안먹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사실 필자가 자란 경북 북부지방은 대부분 산악지역이고 평야가 없어 논농사보다는 밭농사를 많이 지어 쌀보다는 잡곡을 많이 생산했다. 여유 있는 집안이라 해도 근검절약하는 가풍을 쫓아 비싼 쌀밥보다는 보리좁쌀 등 잡곡을 주식으로 해왔다.

박대통령은 김기자, 포시라운(‘복에겨운의경상도사투리)소리 한다면서 자신이 보통학교(1926~ 1932)다닐 때의 생활과 경험을 자상하게 소개했다.

박대통령이 다니던 보통학교는 상모리에서 몇십리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아침 일찍 어머니가 살림이 어려워 겨우 끓여주시는 보리죽 한그릇을 먹은 다음 책가방을 싼 보자기를 허리에 차고 그 먼 시골길을 걸어서 왕복하여 저녁 나절 집에 돌아오면 배가 고파 기진맥진했던 어린시절을 한참 얘기했다. 뱃가죽과 등이 찰싹 달라붙는 것처럼 허기를 느껴도 참을 수밖에 없었던 가난의 고통을 참고 겪었다고 회상했다.

김기자는 그래도 쌀밥 섞인 보리밥을 먹을 정도였으면 행복한 줄 알았어야지라고 핀잔을 주던 기억이 새롭다.

박대통령이 어릴 때 체험했던 뼈저린 가난을 극복하고 조국근대화라는 국정철학이 바로 이런 유년시절의 생활과 체험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혁명공약에 가난과 민생고 해결 다짐

박대통령은 어려운 농촌 살림에 시달려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 농민들의 가난의 한()이 가슴깊이 사무쳐 있다. 5.16 혁명공약에서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고 제시한 목적과 동기를 짐작하게 된다.

잘살아 보자는 새마을 운동의 위대한 발상의 바탕이 자신이 농촌과 도시에서 절실하게 목격하고 체험한 가난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가난하고 어려운 서민을 배려하는 자상한 성품은 타고난 천성이라 할 수 있다.

전국의 공단에서 박봉에 열심히 일하는 남녀 근로자,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서울 시내버스의 여자안내원들에게 방한복을 선물할 만큼 박대통령은 서민과 근로자들을 각별하게 보살폈다. 박대통령은 자신이 농민의 아들로 어렵게 자라고 힘들게 교육받은 지도자였다. 가난을 겪어본 사람이 가난한 서민의 사정을 잘 아는 것처럼 박대통령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다. 어려운 상대방을 배려하고 특히 가난한 사람을 돕는 남다른 따뜻한 인정을 베풀었다.

국가권력을 관리하는 수많은 요직인사를 단행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서슬퍼런 서정쇄신(庶政刷新)을 추진할 때 대통령으로서 보여주는 리더십의 단호함과 결단력은 추상같이 무섭고 냉철하다.

정략적 편견을 가진 반대파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은 박대통령의 이런 측면만 부각시켜 군사독재정권이라고 비판해왔다. 그러나 가까이서 지켜본 박대통령은 또다른 너무나 인간적이며 서민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100여명의 청와대 직원들과 함께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갈현1리에서 모내기를 했다. 이날 장덕진 농수산부장관, 손재식 경기도지사, 최광수 의전비서관 등이 수행했다.(1978.6.13.)

모심기 보면 영락없는 농부처럼 익숙

매년 봄철이면 부족한 식량을 증산하는 농촌 일손돕기의 하나로 모내기 행사에 참여했다. 보통 입던 바지를 그대로 시원하게 걷어 올리고 맨발로 벼를 익숙하게 심는 박대통령의 모습은 정말 타고난 영낙없는 농부처럼 보였다. 오히려 수행한 젊은 장관들이나 참모들은 어색하게 보였다.

젊은 시절 시골 마을에서 자라면서 농삿일을 도운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옆에서 머뭇거리는 측근들에게 모를 잡은 네손가락을 논바닥으로 쑥 내리 꽂듯이 깊이 심어야한다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모내기 도중 종아리에 달라붙은 거머리를 아무렇지 않은 듯 손으로 잡아 떼서 바깥으로 던지기도 했다.

모내기 행사가 끝나면 현장에서 참(간식)으로 농촌주민과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면서 그들을 자상하게 위로하고 밝은 표정으로 농촌사정에 대해 물어보면서 농민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수시로 이렇게 소탈하게 서민들을 접촉하는 박대통령의 현장시찰과 국정수행으로 인해 장관과 참모들이 항상 긴장하면서 소관업무를 철저하게 확인하고 추진했다.

오래 집권한 박대통령이 각 분야의 행정에 대해 그들보다 너무나 많은 것을 소상히 알고 있어서다.

김포군 고천면에서 모내기를 한 후 손발을 닦으며 웃는 모습(1979.5.23)

근검절약과 정리정돈 좋아하는 대통령

박대통령은 이렇듯 소박하고 서민적이지만 성품은 처음과 끝을 깨끗하게 마무리할 정도로 깔끔하고 단정해서 무엇이든지 질서있고 정리정돈된 모양을 좋아했다. 일제시대에 자라면서 배운 초중등교육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박대통령은 70년대 초반 학생들의 장발을 일제 가두에서까지 단속했다. 각급학교에 지시를 내려 귀를 덥고 뒷목까지 내려오는 지저분한 긴머리를 커트시켜 자유분방한 젊은이들의 반발과 불평을 야기시켰다. 그 무렵 한 재계인사도 헤어스타일 때문에 박 대통령의 지적을 받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미국가수였던 엘비스 프레스리의 헤어스타일처럼 귀밑까지 S자를 그리면서 멋을 부린 채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그 기업인을 보고 박대통령이 슬그머니 핀잔을 줘서 점잖게 머리를 다시 만진 에피소드도 있었다.

새마을 운동에 박차를 가하면서 무질서한 농촌의 마을과 하천, 초가집 등을 깨끗하게 정비하는 사업에 주력한 것도 평소 박대통령의 깨끗하고 단아한 성품을 잘 반영하는 대목이다.

박대통령은 시골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성장해서 생활하면서 근검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베었다. 수돗물을 아끼려고 청와대 본관의 화장실 용기에 벽돌을 몇개씩 넣어두는가 하면,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끄고 부채를 사용했으며, 겨울에 낡은 내복을 입고 양말을 기워 신고 다녔다.

10.26일 당일 청와대 부근 통합병원에서 박대통령의 시신을 검안하던 의사가 오래된 양복을 입고 닳아 빠진 혁대를 맨 사실을 발견하고 과연 대통령의 옷차림이 맞는지 크게 놀랐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대통령의 자리에 18년동안 재임하면서 국가원수의 직위에 걸맞지 않는 검소한 생활을 해온 박대통령은 도대체 어떤 분인지 요즈음의 젊은 사람들은 이해가 잘 안될 것이다.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었지만 청백리(淸白吏)로 한평생을 영남유림의 올곧은 선비답게 깨끗하게 살면서 우국충정(憂國衷情)해온 박대통령의 일생을 평가하는 국민이 절대 다수라고 생각한다.

군사독재와 장기집권을 강경하게 비판하면서 고속도로 건설과 중화학 공업 육성 등 하는 일마다 반대와 딴지를 걸어온 정치집단과 재야세력에게 엄중하게 묻는다. 만의 하나 이 나라에 박 대통령이 없었다면, 오늘의 번영과 발전을 이룩한 대한민국이 과연 가능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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