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상견례→UV→서태지·이지아, 무슨 의미인가
위험한상견례→UV→서태지·이지아, 무슨 의미인가
  • 뉴시스_이문원 문화비평가
  • 승인 2011.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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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일 동안 미디어는 온통 가수 서태지와 배우 이지아의 비밀결혼과 비밀이혼 사연에 집중했다.

당연한 일이다. 이 정도 급의 연예인 사생활 스캔들은 가히 10년에 한 번 터질까 말까한 것이다. 앞으로도 서태지-이지아 광풍은 최소 1주일은 더 갈 것이다.

한편 서태지-이지아 스캔들이 터지기 바로 직전까지 대중문화계 최대 화젯거리는 바로 복고풍 음악을 고집하는 남성 듀오 UV가 일으킨 신드롬이었다. 새 싱글 ‘이태원 프리덤’이 음원 차트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이들에 대한 분석으로 연예미디어는 들썩였다. 그리고 이 같은 열기는 SBS 8시뉴스에서까지 UV 집중분석 꼭지를 내보내면서 가히 정점으로 치달았다. 대중가수의 지상파 방송사 메인뉴스 등장은 과거 서태지와 아이들 정도나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다면 UV와 ‘이태원 프리덤’ 전에는? 그 전엔 영화 ‘위험한 상견례’가 화제의 중심에 서있었다. 영호남 지역갈등을 소재로 한 로맨틱 코미디다. 다소 자극적인 소재 탓에 초반부터 기세를 잡아 주말 흥행 1위를 차지하더니 이제 200만 관객까지 돌파한 상황이다. 첫 주연을 맡은 송새벽과 이시영은 모두 A급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처음엔 영화, 그 다음엔 음악, 그리고 나선 가수와 배우가 만난 세기의 스캔들.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흐름이다. 이렇게 골고루, 순차적으로 대중문화계 화젯거리는 흘러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림으로 그린 듯 차례로 벌어진 위 세 이슈들 간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른바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서태지-이지아 스캔들부터 보자. 계속되는 폭로성 보도에 따르면, 서태지와 이지아가 결혼한 시점은 무려 14년 전이라고 한다. 1997년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1990년대 중후반의 서태지 위상과 당대 대중문화계 상황, 그리고 당시와 지금 사이 연예인의 서로 다른 사생활 관리 등을 다룬 분석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면서 연예미디어는 ‘1990년대 회고담’ 분위기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애초 서태지 자체가 ‘과거의 사람’, 노스탤지어를 부르는 존재라서다.

한편 남성 듀오 UV 역시 노스탤지어를 부르는 존재이긴 마찬가지다. 새로 내놓은 ‘이태원 프리덤’은 런던 보이즈의 ‘할렘 디자이어’를 레퍼런스로 두고 있듯 1980년대 디스코팝을 재현한 싱글이다. 직전 EP ‘집행유애’가 듀스로 대변되는 1990년대 뉴잭스윙을 재현한 바 있으니, UV는 갈수록 더 이전으로 가고 있는 셈이다. 그만큼 노스탤지어성이 점점 더 돋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끝으로 ‘위험한 상견례’는 노스탤지어니 뭐니 따로 분석할 필요조차 없다. 애초 영화의 배경 자체가 1980년대 후반이다. 공교롭게도 ‘이태원 프리덤’의 원천이 된 시대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 세 이슈, 두 건의 상품과 한 건의 스캔들이 당대 최고 화제로 떠올랐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일단 현 시점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상품이나 사건이 잘 먹힌다는 판단을 해볼 수 있다. 확실히 그럴 만하다. 노스탤지어 자극성 이슈는 일단 미디어 보도 측면에서 유리하다. 현재 대중문화계 흐름을 대변하는 연예미디어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기자들은 대개 30대, 전체 방향성과 이슈를 좌지우지하는 부장급은 40대다. 1980~90년대에 강한 노스탤지어를 지닌 연령층이다. 그러니 이들을 자극하는 노스탤지어성 콘텐츠가 등장했을 시 당연히 미디어 보도 측면에선 우위에 서게 된다.

그러나 단순히 이렇게만 생각해볼 것도 아니다. 손뼉도 짝이 맞아야 소리가 난다. 아무리 미디어 보도가 줄기차게 이어진다 해도 이를 소비하는 대중 입장에서 그에 호응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렇다면 위 세 이슈들은 어떻게 손뼉의 ‘다른 짝’을 찾은 걸까. 따지고 보면, 위 세 이슈들은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손뼉의 ‘다른 짝’을 찾았다. 그러니 일종의 패턴 화된 성공전략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일단 서태지-이지아 스캔들부터 살펴보자. 서태지가 전성기 시절 결혼한 사실이 있다는 보도 자체가 상당히 큰 건인 건 맞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렇게까지 커질만한 건 아니었다. 서태지의 전성기는 이미 10여 년 전, 솔로 2집 ‘울트라매니아’ 당시까지로 봐야 한다. 이후부턴 그 열혈 팬덤이 음반을 다량 구입해주고 관련 상품들에 집착하면서 위상이 유지됐을 뿐이다. 더 이상 대중적 뮤지션, 대중연예인이라 보기 힘드니, 보도가 나더라도 기껏해야 하루치 이슈였을 것이다.

결국 서태지의 결혼 및 이혼 보도가 ‘현대적 이슈’로 거듭나 ‘대박’이 나게 된 것은 오히려 그 상대인 이지아의 존재 탓으로 보는 게 옳다. 이지아는 ‘바로 지금’ 대중의 이목을 끌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서태지 같은 과거의 전설이 아니다. 2007년 MBC ‘태왕사신기’로 정식 데뷔해 불과 연기생활 4년 차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선도와 인지도가 비슷한 수준으로 상승해있는 ‘딱 좋은 화젯거리’ 시점의 연예인이다. 거기다 알 수 없는 과거 등으로 대중적 호기심 역시 높아진 상태였다.

결국 ‘과거의 확고부동한 노스탤지어’를 지닌 서태지가 30~40대 미디어관계자들의 이목을 끌어 한 쪽 손뼉이 되고, ‘지금의 신선한 화젯거리’인 이지아가 연예뉴스 주소비층인 10~20대에 동시대적 감각을 불어넣어 다른 한 쪽 손뼉이 됐다는 것. 그렇게 손뼉이 맞아 큰 소리를 냈고, ‘광풍화’ 되기 딱 좋은 조합이 나왔다는 것이다.

UV 신드롬도 사실상 같은 맥락이다. UV가 계속 재현하고 있는 뉴잭스윙, 디스코팝 등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건 현대적으로 잘 먹혀들어갈 만한 장르들은 아니다. 그저 마니아층에만 어필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그에 개그적 감수성을 섞긴 했지만, 그 상태 그대로는 그냥 엽기 그룹으로만 남게 된다. 유세윤 개그 프로젝트 팀 정도다. 신드롬이 되진 못한다.

정작 UV가 현재 대중음악 주소비층인 10~20대에 어필한 부분은 전혀 다른 데서 찾아봐야 한다. 음악 그 자체가 아닌 태도, 그리고 그 태도의 중심을 차지하는 노래의 ‘가사’들로 봐야한다. 생각해보면 UV는 그 복고지향 음악적 방향성과는 달리 가사만큼은 다분히 현대적인 상황들을 다뤄왔다. 그것도 현재 10~20대가 느낄 갈등과 선망의 지점들을 정확히 짚어냈다. 자신들 눈앞에 놓인 사회문화현상들을 유머러스하게 소화해낸 것이 바로 UV가 10~20대 소비층에 어필할 수 있었던 진정한 원동력이었다는 것.

예는 많다. 21세기 들어 유행어가 된 ‘쿨’함의 피로에 대해 토로(?)한 ‘쿨하지 못해 미안해’, 청년 실업으로 ‘프리터’ 생활자들이 늘어난 현실에 정확히 그 비애를 전달한 ‘편의점’ 등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이태원 프리덤’마저도 21세기 현실에 부합된다. 이태원이 젊은 층의 놀이공간으로 크게 부각된 건 사실 몇 년 안 된다. 이전까진 어딘지 음습하고 불온한 장소로만 여겨졌다. ‘버거킹’ 사건 이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이태원 프리덤’은 ‘버거킹’ 사건 따윈 전혀 모르는 현 10~20대에 신천지로 등극한 이태원에의 찬가다.

이런 상황이니, 맥락은 서태지-이지아 스캔들과 동일할 수밖에 없다.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음악적 방향성으로 미디어관계자들의 이목을 끌어 한 쪽 손뼉이 되고, 10~20대의 현실과 감성을 자극하는 재치 있는 가사들이 다른 한 쪽 손뼉이 돼 소리를 냈다. 그렇게 음원 차트를 점령하고 지상파 방송사 메인뉴스에까지 올랐다.

한편 ‘위험한 상견례’의 경우는 더더욱 이 같은 ‘양쪽 손뼉’ 공식에 더 잘 부합된다. ‘위험한 상견례’는 분명 1980년대 후반이 무대이고, 1980~90년대 정치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란 현 미디어관계자들이 민감하게 여기는 지역갈등 문제를 소재로 잡았다. 한쪽 손뼉이다.

그런데 문제는 ‘위험한 상견례’ 속 1980년대가 말 그대로 ‘무늬만 1980년대’라는 데 있다. 지역갈등을 다루면서도 1980년대적인 갈등과 편견, 아집, 대립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표피적이고 지엽적인 갈등요소들만 짚고 있다. 서로 다른 사투리나 해태 껌 안파는 부산 슈퍼 따위 에피소드들이 그것이다. 한 마디로 ‘위험한 상견례’ 속 지역갈등이란 정치사회적 역사와 배경이 완전히 거세된 갈등, 즉 지역 ‘사투리’ 갈등, 지역 ‘슈퍼’ 갈등에 가깝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 같은 가벼운 스탠스가 지역갈등 따위에 별 신경 안 쓰는 10~20대 계층에 오히려 더욱 어필할 만한 콘셉트로 거듭나게 됐다는 것. 너무 무겁거나 진지하지 않은 ‘사투리 잔치’가 다른 한쪽 손뼉이 됐다는 것이다.

결국 위험한 상견례→UV 신드롬→서태지-이지아 스캔들로 이어진 근래의 대중문화계 이슈 흐름이 알려주고 있는 건 하나다. 현 시점 대중문화산업 전략의 왕도(王道)는 바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세대 간 콘텐츠 가교의 성립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전략은 그간 한국을 제외한 세계 대중문화 선진국 시장이 모두 한 번쯤 고려해봤던 것이고, 또 성공을 거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이 괜히 올해에도 ‘그릿 호넷’ 등의 영화를 내놓으며 1960~70년대 TV드라마나 1980년대 호러영화들을 리메이크하는 게 아니다. 세대 간 콘텐츠 가교를 만들기 위해 하는 일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스페이스 배틀쉽 야마토’ 같은 1970년대 TV애니메이션의 실사판을 대담하게 블록버스터로 꾸며 만들어내고, 그보다 더 전의 과거를 다룬 노스탤지어성 영화 ‘올웨이즈: 3초메의 석양’ 등을 만들어내는 이유가 있다. 역시 콘텐츠 가교를 위해서다. 홍콩에서마저 최근 1987년작 판타지호러 ‘천녀유혼’을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역시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한국은 지금껏 너무 현재만, 그리고 앞만 보고 달리는 대중문화 환경에 시달려왔다. 진보와 혁신에만 신경 썼다. 그러나 그러다보니 여러 지점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나고 오히려 전혀 진보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치닫곤 했다. 미디어 전략도 펑크가 나고, 중장년 잠재소비층은 제대로 개발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제 한국 대중문화산업도 슬슬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와의 가교를 잇는데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다시 현 시점 대한민국 최대 화제로 떠오른 서태지-이지아 스캔들로 돌아가 보자. 얼핏 소모적인 폭로전의 느낌이 점차 강해지고는 있지만, 굳이 이 건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면 찾을 수도 있다. 바로 위와 같은 세대 간 콘텐츠 가교 개념에 ‘마지막 방점’을 찍어줬다는 의미 말이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통해 서태지와 이지아가 자기 커리어에 있어 획기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면, 이 같은 세대 간 콘텐츠 가교의 개념은 연예인 사생활을 관리하는 연예 매니지먼트 측면에서도 한번쯤 고려해볼 만한 사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엎치락 뒷치락 여러 콘텐츠의 운명과 그 관계 인물들의 운명이 뒤얽히면서, 대중문화산업은 단 한 치의 퇴보도 없이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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