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환경·직급체계·인사평가 등 실리콘밸리式 수평구조로 전환
CE+IM 통합한 Set부문장에 한종희 사장...반도체는 경계현 사장
승진 안한 이재용 부회장, 신경영 30주년 맞춰 '회장 승진' 하나
"마누라, 자식 빼고 모두 다 바꿔라."
지난 1993년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호텔에는 삼성그룹 경영진들과 해외 법인장들이 모두 모였다. 삼성 수뇌부를 한 자리에 모은 이는 바로 故이건희 회장. 이 회장은 그 자리에서 '신(新)경영'을 공표하며 혁신의 시작을 알렸다. 글로벌 초일류기업 삼성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나 삼성그룹이 다시 한번 태풍급 변신의 시작을 알렸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1월 미국 실리콘밸리를 방문하고 귀국한 후 "현장의 처절한 목소리와 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느꼈다"고 말한 후 삼성그룹이 곧바로 대대적인 혁신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 근무시스템부터 인사평가까지 모두 쇄신
지난 11월29일 삼성전자는 수평적 조직을 지향하는 새로운 인사제도를 공개했다. 이 인사제도는 이재용 부회장의 의지가 적극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운 인사제도의 핵심은 ▲유연하고 수평적인 조직으로 변화 가속화 ▲임직원들의 몰입과 상호협력 촉진 ▲업무를 통해 더 뛰어난 인재로의 성장 등이다.
삼성전자는 당초 4단계로 구성됐던 직급단계를 운영해왔다. CL1(Career Level)로 시작해 CL4가 그것이다. 이중 CL2(사원·대리급)과 CL3(과장·차장급)의 경우 각각 10년 정도의 근무기간이 있어야 승격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번 인사제도 쇄신을 통해 이 같은 단계가 모두 사라지고 'Pro(프로)'라는 호칭이 도입됐다. 업무 상과와 직무 전문성에 따라 빠른 승진이 가능해진 것이다.
또한 부사장과 전무로 나눴던 임원 직급 역시 모두 부사장으로 통합했다. 성과자를 능력에 따라 빠른게 승진시키고, 30~40대 임원급을 배출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근무 환경도 달라진다. 삼성전자는 주요 거점에 공유 오피스를 설치 및 확보하고 사업장 내에 자율근무존을 마련해 언제든지 업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실리콘밸리 방식의 근무환경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인사평가 방식도 대대적인 혁신한다. 고과 평가방식에서 고(高)성과자 10%를 제외하고 나머지 90%에 대해 '절대평가'로 전환해 임직원 간 소속감 및 협력도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스포츠에서 사용되는 FA(프리에이전트) 제도도 도입해 같은 부서에서 5년 이상 일한 임직원들에게 다른 직무를 선택할 수 있게 하거나 부서 전환도 가능케했다.
◆ 삼성전자 수뇌부도 전원 교체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전자 사업부문 경영진도 모두 교체하는 초강수를 선택했다. 삼성전자의 주력사업군이라는 반도체(DS)·생활가전(CE)·IT모바일(IM) 등을 맡고 있는 부문장을 일괄 교체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7일 정기 사장단 인사를 통해 CE부문과 IM부문을 '세트(Set)' 부문으로 통합하고, 신임 세트부문장에 한종희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사장)을 부회장을 승진시켰다. DS부문장은 삼성전기 대표를 맡아왔던 경계현 사장을 지목했다.
새롭게 삼성전자 사령탑에 오르게 된 한 부회장과 경 사장은 내년 3월 정기주주총회 때 신임 대표이사로 선임될 예정이다.
삼성전자는 이번 정기사장단 인사를 통해 회장 승진 1명, 부회장 승진 2명, 사장 승진 3명, 위촉 업무 변경 3명 등 총 9명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먼저 DS부문장을 맡던 김기남 부회장은 삼성종합기술원 회장으로 승진했다. 권오현 전 회장에 이어 삼성전자 내 회장직에 오르는 두번째 샐러리맨 신화가 된 것이다. 김현석 전 CE 부문 대표와 고동진 전 IM부문 대표는 모두 고문으로 물러났다.
부회장에는 세트부문장으로 승진한 한종희 부회장과 함께 사업지원TF를 맡고 있는 정현호 사장이 승진했다. 사업지원TF는 삼성전자의 중장기 사업 전략 수립을 지원하고, 계열사간 협력을 통한 경쟁력 강화 역할을 맡고 있다.
삼성전자가 사업 수뇌부 3명을 동시에 바꾼 것은 지난 2017년 '권오현-윤부근-신종균' 체재 이후 4년 만이다. 당시 국정농단 사건으로 이재용 부회장이 검찰 조사 및 구속수감되면서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총수부재 시기를 맞아 비상조치를 했던 것이다.
반면 이번 수뇌부 교체는 사실상 세대교체를 위한 대규모 혁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래사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뇌부 교체라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정현호 부회장과 함께 눈에 띄는 인물은 이번 사장단인사에서 세트부문 법무실장으로 승진한 김수목 부사장(전 법무실 송무팀장)이다. 두 사람은 과거 미래전략실(미전실) 해체 당시 삼성전자를 떠났지만, 다시 복귀해 나란히 승진했다.
◆ 계열사 신임 대표도 모두 전자출신
삼성그룹은 7일 그룹 내 다른 계열사들에 대한 인사도 동시에 진행됐다. 삼성SDI, 삼성전기, 에스원의 경영진을 모두 교체했기 때문이다. 새롭게 선임된 경영진들은 모두 삼성전자 출신이란 점이 눈에 띈다.
삼성SDI는 전영현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키고, 신임 대표에 최윤호 삼성전자 사장을 내정했다. 전 부회장은 배터리 사업성장의 공로를 인정받아 부회장에 오른 것으로 해석된다.
신임 대표로 지목된 최 사장은 삼성전자 구주총괄 경영지원팀장, 사업지원TF 담당임원, 전사 경영지원실장을 역임했다.
경계현 신임 삼성전자 DS부문장(사장)이 맡았던 삼성전기에는 장덕현 삼성전자 부사장이 내정됐다. 장 사장은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메모리사업부 솔루션개발실장, LSI개발실장, 센서사업팀장을 맡았다.
에스원은 남궁범 삼성전자 사장이 내정됐다. 남궁 사장은 2013년 12월부터 삼성전자 재경팀장을 맡아온 재무통이다.
◆ 2년 뒤 新경영 30주년, '이재용 시대' 열리나
재계에서는 삼성전자의 이번 정기사장단 인사에 대해 '태풍급 인적 쇄신'이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역대급 실적을 기록했음에도 최고수뇌부가 모두 교체되는 등 변화와 혁신을 방점에 찍혔기 때문이다.
특히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달 말 미국 출장을 마치고 온 뒤 "냉혹한 현실을 느꼈다"고 밝힌 후 삼성전자가 대규모 쇄신에 나섰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이번 사장단 인사에 이 부회장의 '회장 승진'이 빠졌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가 이번 인사를 과거 故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에 비교하는 이들도 있다.
이건희 회장은 87년 회장에 취임한 후 5년이 지난 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본사 경영진 및 각국 법인장을 모두 참석시킨 비상경영회의를 통해 "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꿔봐라"라는 신경영을 선언한 바 있다.
이재용 부회장 역시 아버지처럼 '냉혹한 현실'을 깨닫고 삼성전자의 대규모 혁신과 쇄신을 통해 성과를 낸 뒤, 신경영 선언 30년이 되는 2023년 회장직에 오를 것이란 분석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재용 부회장이 귀국직 후 긴장감을 불어넣으면서 삼성전자에 다시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있다"며 "품질경영 경영을 통해 초격차로 나섰던 삼성전자가 이제는 경쟁자들이 따라올 수 없는 초일류기업으로의 도약에 나서겠다는 단호한 선언으로 읽혀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