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인 J에게" -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
"나의 연인 J에게" -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
  • 김충교
  • 승인 2011.12.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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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있습니다.

벌써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소처럼 일만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현업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메워나가고 있습니다.

일하지 않으면 당장 생계가 어렵다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하는 이유가 생계만을 위해서라고 단언하기는 조금 그렇습니다.

물론 그에게 놀고먹을 만큼의 재산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먹고사는 문제만을 따지자면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이미 아이들은 다 컸고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들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본인 역시 절제력이나 자제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무계획적인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호사로 여기는 것이라 해봐야 한두 잔 반주를 하는 정도입니다.

그것도 특별한 취향이 있어 분위기를 잡는 것도 아닙니다.

막걸리 몇 잔이 고작입니다.

오버를 한다 해도 소나 돼지고기를 구우며 소주를 기울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범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막 청년이 될 무렵 가세가 기울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반듯하다는 소리를 들어온 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반듯한 것만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간혹 남의 눈을 속이기도 하고 기만하기도 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부모를 대신해 가장 아닌 가장으로서 그는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부딪치면서 모욕도 당했고 처참함에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자존감과 품위를 잃지 않으려 울분을 삼켰습니다.

그렇게 사느라 그는 고집스럽고 완고해졌습니다.

보수적인 틀에 가로막힌 것은 물론이구요.

해서 요즘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에 불만이 많습니다.

어쩌지 못한다는 자식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고생을 모르고 자라서 끈기가 없다고 혀를 찹니다.

한마디로 생활력이 부족하게 보이는 겁니다.

엉거주춤하며 하고 싶은 일에 연연하는 젊은이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생활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 그가 가진 삶의 원칙입니다.

다른 것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자의반 타의반 그의 생활이 그래 왔으니까요.

가세가 기울어 해체의 위기에 직면한 가족을 부모님 대신 지켜야 했습니다.

일찍 세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혼자 살 궁리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는 그런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처한 현실이 가져다준 부담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세월이 지나 과거가 잊힌 후 그런 사실을 누가 알아주지도 않았습니다.

서운하기도 했지만 회한으로 묻어버렸습니다.

저간의 복잡한 사정이나 상황을 토막 내 해체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으니까요.

그것은 치부를 드러내는 것으로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기 위해 그는 다시 맨발로 시작했습니다.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면역이 생겼습니다.

몇 번의 시련과 좌절을 겪었지만 시간은 망각과 함께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몸은 힘들고 마음은 바쁩니다.

평생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애를 써도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사석에서 그가 말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그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음이 텅 비어 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Hysteria Cyberiana)'라는 의학용어가 있습니다.

일종의 신경전환증으로 심리적 장애가 신체적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시베리아 지역의 농부들에게서 증상이 나타나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시베리아는 광활한 땅입니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어디를 둘러보아도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평선 뿐 이랍니다.

이런 곳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가 있습니다.

그는 해가 뜨면 나가서 농사일을 하고 해가 지면 돌아오는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사방이 벌판인 대지 위에서 하루 종일 힘든 노동을 합니다.

방향도 알 수 없는 곳에서 땅을 일구고 잠시 허리를 폅니다.

보이는 풍경은 동서남북이 똑같습니다.

흐름이 무의미할 정도로 시간도 정지해 있습니다.

그렇게 느껴지는 겁니다.

움직이는 것은 태양이 이동하는 모습 뿐 입니다.

그러나 태양이 이동하는 움직임은 사람의 눈에 잘 포착되지 않습니다.

뜨는 곳이 동쪽이고 지는 곳이 서쪽이라는 사실만 구체적입니다.

태양이 머리 위에 있으면 한낮이라고 가늠할 정도이지요.

시간과 공간이 정지해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농부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사방은 꽉 막혀있고 출구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농부는 더 이상 버틸 힘을 잃게 됩니다.

쉽게 말해 미쳐버리는 겁니다.

농부는 무턱대고 태양을 따라갑니다.

서쪽으로 향하는 태양을 따라 쉬지도 않고 몇 날 며칠을 걸어갑니다.

결국 농부는 어느 밭이랑 사이에 지쳐 쓰러져 죽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출구도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쳇바퀴 돌아가는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뜯어도 삶은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다가가면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행복은 항상 저 멀리에 있습니다.

잡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헛손질에 그치기 일쑤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곳의 현실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설사 훼손되고 닳아지더라도 버티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지금 이곳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요.

해가 바뀌고 있습니다.

또 어딘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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