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달렸을까. 김종서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산길을 간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마침내 타고 가던 말이 멈추어 섰다.
“다 왔으니 이제 말에서 내리시오.”
김종서는 누군가가 부축해 주어서 말에서 내렸다.
“이제 이 눈가리개를 풀어주시오.”
김종서가 점잖게 요청했으나 아무도 김종서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시오.”
김종서는 어느 집안으로 인도되어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눈가리개가 풀렸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단 위에 놓여 있는 불상이었다. 탱화도 걸려 있었다. 어느 절의 대웅전인 것 같았다, 촛불을 여러 군데 밝혀놓은 것으로 보아 아직도 밤중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가 어느 절이오?”
김종서가 산발한 머리에 가죽 옷을 입고 있는 젊은이를 보고 물었다 비슷한 차림을 한 남자 몇 명 더 있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그들은 김종서를 그냥 앉혀 놓은 채 모두 나가버렸다. 김종서는 늘 메고 다니던 활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은 놀랍게도 여자였다. 초록색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조선 전통 의상인 녹요홍상이었다. 머리는 곱게 빗어 뒤로 땋아 늘어뜨리고 붉은 댕기를 맸다. 이목구비가 선명한 젊은 여자였다.
김종서가 영문을 몰라 주춤하고 있는 사이 여자는 두 손을 이마에 올리고 김종서를 향해 큰절을 했다.
“아니, 저...”
김종서는 어쩔 줄 몰라 엉거주춤 절을 받았다.
젊은 여자는 큰 절을 한 뒤 다소곳이 앉아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 득희입니다. 홍득희...”
여자는 갑자기 목이 멘 듯 말끝을 흐렸다.
“뭐라고? 네가 득희라고? 10년 전 경원에서 본 또리란 말이냐?”
정말 놀란 사람은 김종서였다. 얼떨결에 득희의 처음 이름이었던 또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예. 그 때 아저씨가 득희라고 이름을 지어 주셨지요. 동생은 석이라고 지어 주시고.”
“맞다, 맞아. 살아 있었구나. 그래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김종서는 득희의 뺨이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어 다가가려다가 과년한 처녀라는 생각이 들어 주춤했다.
“아저씨!”
득희는 김종서를 바라보며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네가 득희라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겠느냐? 그런데 석이는 어디 있느냐?”
“멀리 떨어져 있는데 곧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홍득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는 아저씨가 떠난 뒤 여진족 친구들과 홀리온 장군 밑에서 자랐습니다. 조선 마을로 가고 싶었으나 관군의 횡포가 무서워 홀리온 땅의 조선인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거기서 글을 조금 배우고 무술도 익혔습니다.”
“결혼은 하였느냐?”
“아닙니다.”
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 입고 댕기를 맨 홍득희의 모습은 한양 어느 양반집의 규수 못지않게 품위가 있어 보였다.
“그럼 네가 소문에 듣던 홍패 두목이란 말이냐?”
김종서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질문을 했다.
“아저씨 용서해 주세요.”
“소문대로 네가 화척 여두목이란 말이구나.”
“아저씨...”
홍득희는 계속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래 왜 이런 짓을 하고 다니는지 사정이나 좀 들어보자.”
그때 방문이 열리고 간단한 술상이 들어왔다. 상 위에는 술병과 술잔 하나, 그리고 돼지고기 안주가 있었다.
“시장하실 텐데 목이나 축이시라고....”
홍득희가 술잔에 술을 부었다.
“득희야.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짓이 얼마나 큰 죄인지는 아느냐? 목숨이 열 개라도 부지하기 어려운 죄를 짓고 있는 거야.”
김종서는 술잔은 본 체도 않고 걱정부터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