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우 실록 소설] 대호(大虎) 김종서 (1)
[이상우 실록 소설] 대호(大虎) 김종서 (1)
  • 이상우 언론인·소설가
  • 승인 2022.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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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소녀 

“나는 조선 백성이오. 이거 놓으시오!”

목청을 찢는 듯한 울부짖음이 숲을 뚫고 산골짜기로 퍼져 나갔다. 딸은 숨도 쉬지 못하고 갈대숲 뒤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엄마의 절규가 딸의 뼛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조선의 서울 한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국경지대, 함경도 경원의 사다노(斯多老) 마을. 여진 땅인지 조선 땅인지 모를 정도로 여진족과 조선 사람이 섞여 사는 곳이었다. 봄채소를 가꾸러 밭에 나온 엄마한테 조선 변경 수비대 병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딸은 마침 소피를 보러 갈대숲 뒤로 몸을 감추고 있던 참이었다. 

“얼굴이 제법 반반한데. 오랑캐 놈과 살기는 아까운 몸이야.”

엄마의 팔목을 잡은 조선 병사가 입가에 흐르는 침을 손등으로 훔치며 빙글빙글 웃었다. 

“나는 조선 사람 남편이 있는 몸이오. 놔 주시오.”

엄마가 목소리를 낮추고 사정했다.

“하하하. 너 같은 오랑캐 계집의 임자가 조선 사람이라고?”

병사는 엄마의 팔목을 더 세게 비틀어 쥐더니 숲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거 얼마 만에 맡아보는 여자 살 냄새야.”

숲속으로 따라 들어간 다른 병사가 엄마의 치마를 홱 잡아당기며 아랫도리에 얼굴을 갖다 댔다. 

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이는 비록 아홉 살이지만 병사들이 엄마를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저러다 엄마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은 일어서서 동네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따라 산속으로 짐승 사냥을 다니며 다져진 몸이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발걸음이 빠르고 체력도 강했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아! 놔라. 이놈아!”

엄마의 비명을 뒤로 하고 딸은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렸다. 

“아버지 큰일 났어요. 조선 병사들이 엄마를, 엄마를....”

집에서 노루 가죽을 다듬고 있던 아버지가 벌떡 일어섰다. 아버지는 파랗게 질린 딸의 얼굴을 보며 아내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직감했다.

“어디냐? 빨리 가자.”

아버지는 벽에 걸린 창을 재빨리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몸을 휙 날리다시피 하여 대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놈들 그만두지 못해!”

딸과 아버지가 숲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옷이 다 벗겨진 채 바지를 내린 병사의 몸 밑에 깔려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아버지가 창으로 엄마 위에 올라탄 병사의 등을 푹 찔렀다. 

“윽!”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엄마 몸 위에 엎어졌다.

“이놈 봐라!”

옆에 있던 병사 셋이 동시에 창과 칼을 휘두르며 아버지한테 덤벼들었다. 1대 3의 백병전이 벌어졌다.

“또리야, 어서 도망가라!”

아버지가 병사들의 창과 칼을 막아내면서 딸에게 소리를 질렀다. 딸 또리는 사람들을 더 불러와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동네로 달음박질 했다.

“얘야.”

또리가 동네 입구에 다다랐을 때 도포 차림의 낯선 선비가 또리를 불러 세웠다. 

“너, 조선 말 아냐?”

조선 사람보다 여진족이 더 많은 지역이라서 얼굴만 보고는 알 수 없기에 묻는 말이었다.

“예.”

또리가 다시 뛰어 가려고 몸을 앞으로 숙이는 순간 젊은이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서두르느냐?”

나이가 좀 들어보이고 체구가 작은 사람이었다. 어깨에 멘 활이 질질 끌릴 듯하였다. 함께 멘 화살통도 무거워 보였다. 그러나 빛나는 눈빛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우리 엄마하고 아버지가 나쁜 놈들하고 싸우고 있어요. 살려 주세요.”

선비의 아래 위를 황급히 훑어본 또리가 도움을 청했다. 

“거기가 어디냐?”

“저 개울 건너 숲속이어요.”

“그래? 어서 가보자.”

선비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녀가 앞장서서 달렸다. 소녀의 뜀박질이 어찌나 빠른지 선비는 숨을 헐떡이며 따라갔다. 

두 사람이 숲 근처에 이르렀을 때 이미 병사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인기척이 전혀 없는 숲속을 헤치고 들어서자 처참한 광경이 드러났다. 

소녀의 아버지가 피투성이가 된 채 아내 위에 엎어져 있었다. 아내는 발가벗겨진 채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남편의 몸 밑에 깔려 있었다. 마치 남편이 아내의 벗은 몸을 덮어주려고 일부러 몸을 포개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선비는 몸을 숙여 소녀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코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런 다음 목에 검지와 중지를 대고 한동안 지켜보았다. 

“두 분 다 돌아가셨다.”

젊은이의 말에 소녀는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울음소리는 전혀 새어 나오지 않았다. 

선비는 소녀의 어머니의 몸을 찢어진 옷으로 가려주었다. 그리고 남편의 시신을 아내의 몸 위에서 끌어내려 나란히 눕혔다.

선비는 현장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방에 핏자국이 낭자했다. 부러진 창과 찢어진 옷 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부러진 창에 새겨진 문양을 한참 동안 살피던 남자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네 말이 맞구나. 조선 병사들이야. 경원 주둔 병사들이로군.”

그때였다. 우악스러워 보이는 청년 패거리가 몰려왔다. 여진족이었다. 

“네 놈 짓이냐?”

여진족들은 선비를 보자 칼을 뽑아들고 거친 여진 말로 물었다. 

“아니오. 조선 병사들의 짓이오.”

선비가 서툰 여진 말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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