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리어가 다만 인간일 수 있는가?… 창극 '리어'
[윤진현 문화비평] 리어가 다만 인간일 수 있는가?… 창극 '리어'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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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국립극장

 

국립창극단의 창작 창극은 갈수록 노련하다. 새로운 레퍼토리가 공개될 때마다 설레며 기다리게 된다. 고전이란 인류 공통의 유산이다. 굳이 국적을 따져 창극으로 다룰 만한 작품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은 편협하다. 무엇보다 표현이 달라지면 해석도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의 소리로 표현되는 인간 군상을 보면서 인간과 삶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시간은 참으로 귀하고 기껍다. 더구나 이번에 새로 공개된 창극 <리어>는 국립창극단의 세대교체가 분명히 느껴져 더욱 신선했다. 

판소리에서 시작한 창극은 그 때문에 종종 판소리의 하위 장르거나 아류쯤으로 이해되어 왔다. 판소리에서 시작하여 창극 분야로 전신한 1세대 명창들의 경우는 이를 구분하지 않았고 심지어 여러 가지 새로운 표현이 필요한 영역에서 드러나는 미숙함 때문에 판소리의 깊이를 창극이 따르지 못한다는 평가까지도 일부 타당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판소리와 창극은 다르다. 개인적인 취향이나 선호는 있을지언정 상하, 우열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기원이 같아도 표현과 향유 방식이 다른 장르는 얼마든지 있고 그런 경우 더 이상 같은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 이미지로 비유하자면 판소리는 한 명의 광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넣은 점 하나를 찍고 이 점에서 실을 자아내듯 풀어내는 선(線)의 예술이다. 그에 비해 창극은 각 인물의 갈등과 앙상블의 조화, 그 극적 역학에서 분출하는 새로운 메시지와 감동이 어떻게 형상화되는가가 훨씬 중요한 면(面)의 예술이다. 

보통 연극에서 1인극을 하듯 창극 배우도 1인 공연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판소리 광대의 공연과 추구하는 바가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국립창극단 1세대 원로배우 안숙선 명창은 판소리꾼이면서 동시에 창극 배우였다. 그래서 안숙선 명창은 <춘향가> 완창 무대에서나 창극 <춘향전>에서나 우열과 경중을 따지기 어려운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국립창극단의 새로운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김준수나 유태평양은 안숙선 명창과는 다르다. 이는 절대로 소리의 수준이나 역량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굳이 편협함을 무릅쓰고 요약하자면, 안숙선 명창의 무대는 판소리에서나 공연에서나 일관된 기준으로 향유되는 소리의 무대이다. 그러나 만약 김준수가 개인 공연을 선보인다면 여기에는 하나의 기준이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관객이 열광하는 지점이 안숙선 명창과 다를 것은 당연하다. 

이는 드디어 판소리에서 독립한 창극의 배우가 등장했다는 의미이다. 소리를 하면서 소리의 속도와 율격과 고저를 타고 자연스럽게 감정을 드러내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설득이 가능한 진짜 창극의 배우가 등장했다. 어찌 흥분하지 않으랴.

그뿐이 아니다. 이번 창극 <리어>에서는 놀랍게도 소리의 화음을 보여주었다. 사람이 바뀌면서 음악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국립창극단이 내적으로 얼마나 열려 있으며 얼마나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작창 한승석과 음악감독 정재일의 협력으로 탄생한 음악에서는 말 그대로 윤이 났다.

게다가 물을 사용한 무대는 멈추지 않고 흐르며 요동치는 인간의 삶과 본성과 욕망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위압적이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무대 장치도 좋았다. 수많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왕’으로서의 ‘리어’가 아니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인간 ‘리어’의 무대로 족하였다.

사진 ⓒ 국립극장
사진 ⓒ 국립극장

창극 <리어>에서 ‘리어’는 화려하고 위압적인 군왕 ‘리어’에서 시작하기보다는 은퇴하여 자식들에게 나라를 맡기고 편안히 쉬고 싶은 늙은이의 욕망에서 시작한다. 이는 <심청전>의 분별없고 어리석은 심봉사와 방불하였다. 아니다. 심봉사는 눈을 뜨고 싶다는 강력한 소망이라도 있었다. ‘리어’는 도대체, 왜, 갑자기, 나라를 분할하여 자식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유유자적 편안히 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 것일까? 창극 ‘리어’는 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 ‘리어’를 드러내는 전략으로 볼 수도 있지만 정치적 배경을 소거하여 인간적 의미에 집중하는 접근이 원작의 역동성을 상당 부분 포기하게 만든 점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원작에서 ‘리어’의 비극적 결말은 운명적으로 주어진 역할은 자의로 회피할 수 없다는 데서 시작한다. 군왕이 나라를 분할하여 자식에게 맡긴다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군왕으로서 낙제이다. 권력은 다음 왕권이 예정되어 있을 때조차도 불확실성을 기반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힘을 기르도록 긴장을 늦추지 않는 법이다. 권력이란 그 자체가 생물 같은 것이라 만만하거나 허약한 자가 쉽게 휘두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권력은 아버지에게서 자식으로 당연히 상속되는 것이 아니다. 자식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싶다면 권력을 감당할 수 있는 자로 키우는 것이 먼저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어의 세 딸은 모두 권력을 계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감언이설로 부친을 현혹하여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거너릴과 리건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백성의 운명이 걸린 정치권력의 분할 과정에서 축자적이고 자기 과시적인 정답을 고집하는 코델리아 또한 국가 권력을 계승하기에는 한참 미달이다. 코델리아에게 거짓 사랑의 맹세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 리어왕이 저지르는 어리석은 국가 분할의 현장에서 국가와 백성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효과적으로 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코델리아 또한 그러한 준비, 그러한 지혜를 갖고 있지 않았으니 이미 현재의 왕을 떠난 권력이 새로이 안착할 곳은 없었고 그럴 때, 민생이 파탄에 이르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물론 원작 <리어왕>이 그대로 재현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럼에도 창극 <리어>의 목표대로 인간 ‘리어’의 내면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도 안타고니스트 거너릴과 리건의 성격은 대단히 중요했다. 

그런데 여기에 정말 중요한 미적 문제가 있다. 우리 판소리는 ‘사악함’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소리의 미학은 ‘과유불급(過猶不及)’에 기반한다. 예를 들어 가장 인간적 깊이를 드러낼 수 있는 ‘슬픔’의 감정은 ‘슬프되 비통함에 이르지 않는 애이불비(哀而不悲)’를 미적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그간 창극에서 이 감정을 지평을 넓히는 데 혼신을 다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니 그 성공적인 사례가 <트로이의 여인들>이다. 우리 판소리에 죽음을 앞둔 ‘춘향’이나 자식을 잃은 ‘심봉사’의 절절한 감정이 있기는 해도 소리는 비통함으로 정면 대결하기보다는 해학적인 묘사나 새로운 가능성 따위로 슬픔을 지나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는 1인 광대가 진행하는 장르적 특성 때문이기도 한다. 1인 광대가 극단적 감정에 빠지면 다음 장면으로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극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인물은 자기 상황과 감정에 충실하여야 오히려 갈등과 다른 배역의 리액션이 쉽다. 

사악한 인물도 마찬가지이다. 전통 판소리에 등장하는 변사또나 뺑덕어멈, 거북이, 심지어 조조 같은 반동인물에 약간의 사악함을 포함되어 있으나 대체로 해학적 자장 안에서 해석될 뿐, 거너릴과 리건을 표현할 만한 사악한 성격의 소리는 부재한다고 해도 좋다. 더구나 이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에드먼드 또한 파멸로 치닫는 극단적인 정도에 이르기는 미흡하였으니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요 동인이 충분히 이해되고 표현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거너릴과 리건은 마치 한 인물처럼 해석된 듯하다. 강력한 리액션을 감당해야 했던 두 인물의 성격화가 소리로 충분히 드러나지 못하게 되자 전체적으로 극적 갈등이 내면화하면서 얼마간은 한스러운 탄식에 그쳤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때문에 거대한 정치 서사로 확대하지 못하고 다소는 안이하게 인간적 차원에 머무르고 말았다. 다행한 것은 코델리아에 대한 정도 이상의 미화는 없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왕비로서 프랑스 군을 이끌고 구원군을 자처하는 과정이 생략된 것은 당연하지만 덕분에 코델리아의 정치적 미숙성을 제대로 드러낸 것은 뜻밖의 수확이라고도 하겠다. 

좋은 공연은 새로운 발견을 견인한다. 그것이 비록 한계일지라도. 이번 <리어>를 통해 새삼 우리 소리의 인간미에 감동하였으려니와 언젠가 우리 소리로 표현되는 ‘사악함’이나 파멸에 이르는 타오르는 ‘성적 욕망’으로 온몸에 소름 돋는 경험을 하고 싶다. 곧 가능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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