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어떻게 ‘동의’를 얻어 참 예술의 길을 갈 것인가?... 연극 '마우스피스'
[윤진현 문화비평] 어떻게 ‘동의’를 얻어 참 예술의 길을 갈 것인가?... 연극 '마우스피스'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2.0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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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란 헐리 작‧부새롬 연출, 연극 '마우스피스'
사진 ⓒ 연극열전

몇 년 전에 문단에서는 의미심장한 일이 있었다. 한 작품에 쓰인 대화가 작가의 지인과 나눈 카톡 대화를 그대로 옮긴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발화자는 자신의 내밀한 언어를 허락이나 양해도 없이 함부로 공개한 데 심각한 모욕을 느꼈고 이에 대해 사과와 작품 유통 중단을 요구했다. 이 사건의 경과나 결과와는 무관하게 이는 근대 문학, 나아가 근대 예술이 ‘작가’를 대표로 삼아, 이들의 표현을 대의(代議)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표현의 자유’로 보호하던 관행을 재고하는 계기가 될 만하다. 

요컨대 예술이 누리는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 것일까? 하늘 아래,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없다. 다른 이의 발언이나 표현을 어디까지 나의 작품 안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것일까? 어디까지가 순수한 창작이고 어디부터가 인용, 참고이며 어디부터가 표절인 것일까?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모욕이나 혐오를 유발하는 콘텐츠조차 표현의 자유로 보호되어야 하는 것일까? 

작가는 스스로의 예술적 상상력에 의지하여 있을 법한 이야기를 구축하고 독자는 여기에서 인간과 세상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는 감상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작가가 창작한 이야기, 다루는 이야기는 작가가 겪은 일, 들은 일, 조사하고 연구한 일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말하자면 작가가 순수하게, 그 어떤 근거나 자료도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진 ⓒ 연극열전
사진 ⓒ 연극열전

오랫동안 작가들은 원천 소스를 드러내기 위해서 혹은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풍자와 같은 미적 형식에서는 강력한 풍자대상을 왜곡하여 혹시 있을지 모르는 탄압에 대비하면서도 독자나 관객이 그 대상을 분명히 이해하도록 애썼고 해학이나 리얼리즘에서는 대언(代言)의 대상이 되는 약자의 프라이버시가 손상되지 않도록 미적 장치를 고심하였다. 

말하자면 문학, 예술은 주어진 천부인권을 누리지 못하고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에 대해 발언하지 못하는 약자의 마우스피스를 자처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당연한 소리지만 이야기가 이러한 원칙에서 동떨어져 원천 스토리 당사자에게 동의와 이해를 얻지 못하고 도리어 폭력을 가하고 상처를 입힌다면 의취와 무관하게 이는 문학으로서, 예술로서 함량 미달이다. 

물론 이러한 판단이 자로 잰 듯, 일도양단 가능하지는 않다. 사례별로 따지고 구분해야 할 요소가 많다. 연극 <마우스피스>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정면으로 다룬다. 

중년의 드라마 작가 ‘리비’와 그리기를 좋아하는 청년 ‘데클란’은 우연히 외진 절벽 길에서 만난다. 이 공간적 배경은 의미심장하다. 두 사람은 세상에서 뚝 떨어진 곳, 나아갈 곳 없는 절벽에 선 존재라는 공통점이 있다. 

미래를 꿈꾸지도 현재를 누리지도 못하는 불안한 청년 데클란은 외진 곳에서 그저 손이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고 창작력이 고갈된 중년 리비는 늙은 모친과 함께 살면서 드라마의 형식이나 반복하고 있을 뿐, 새로운 작품으로 대중을 만나본 지 오래이다. 

그런데 인간이란 놀라운 존재이다. 아무런 대안도 갖고 있지 않은 존재들이었지만 이들이 만나게 되자 새로운 길이 발생한다. 두 사람은 함께 카페도 가고 미술관도 가고 대화를 나눈다. 20여 살의 나이를 건너 서로의 필요를 채워줄 때, 이들은 아름답다.

그러나 한 순간 이들이 아름다웠다고 해도 이들의 관계가 계속 정당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들의 관계는 대등하지 않다. 이들은 서로 사랑을 느끼고 스킨십도 갖지만 사랑이 지속적이기 위해서는 두 사람 사이가 평등할 필요가 있다. 20여 년 나이 차이가 결정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진정으로 두 사람이 대등할 수 있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데클란과 리비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이들의 관계는 청년 데클란이 엄마와 계부에게 버림받고 아끼던 어린 여동생 시안까지 잃고 진실로 의지할 데 없을 때, 중년 리비는 데클란의 스토리를 발판 삼아 작가로서 재기가 가능해졌을 때, 특별한 한시적 상황에 의해 가능했을 뿐이다. 

이는 예견된 일이었다. 리비가 데클란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그의 그림에서 감지된 특별한 스토리 때문이었다. 리비는 데클란의 그림을 얻어 집에 돌아와 흐르는 물줄기에 자신을 맡기고 데클란의 그림을 보며 글을 쓰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리비는 애초부터 자신의 고갈된 창작력, 작가적 재능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데클란의 그림에서 발견하고 데클란의 그림과 이야기에서 활로를 찾았던 것이다. 

데클란을 미술관에 데려가고 데클란의 이야기를 들으며 작품 창작에 박차를 가하지만 데클란은 근본적으로 리비의 작업을 이해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리비는 스킨십에 솔직하지 못하고 데클란의 연락을 폭력적으로 거부하며 심지어 데클란의 스토킹에 피해자라도 된 듯이 위선적인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공포의 근원은 어디로 튈지 몰라 불안한 데클란이 아니라 데클란의 스토리를 약탈한 리비 자신에게 있다. 순간의 욕망으로 한참 젊은 청년과 성관계를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데클란의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공동의 프로젝트로 포장했던 작업을 데클란의 동의 없이 리비 개인의 창작으로 둔갑시킨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도대체 이야기의 주인은 누구인가? 

사진 ⓒ 연극열전
사진 ⓒ 연극열전

극적인 순간에 극적으로 목을 매어 파국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고통스러운 인생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문득 파국이 발생한다. 데클란이 들려주는 이 지고의 진실을 리비는 이해할 수 있을까? 

데클란의 스토리를 듣고 공감하고 함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데클란의 스토리에 확정된 양식을 대입하여 동의 없는 결론을 강요할 때, 이야기는 인간을 중심에 둔 이해와 동의가 아니라, 진짜 예술이 아니라, 정해진 양식과 이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그럴 듯한 모사품에 그치고 만다. 

예술의 창작 원리에 따라 응용된 리비의 작품이 곧 데클란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다. 이미 씌어진 이야기는 원천 스토리의 주인을 떠나 작가의 이야기가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물론 다퉈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과연 고통에 몸부림치는 데클란을 앞에 두고 그것이 옳은 일인가? 지금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취약한 청년의 스토리를 동의 없이 드러내면서 그것이 진정 예술인가?

우리의 진짜 고민은 마우스피스의 정당성을 다투는 데 있지 않다. 이 시대 예술이 어떻게 데클란의 동의를 얻어 데클란의 스토리를 함께할 수 있을 것인가? 연극 <마우스피스>가 던진 이 귀중한 질문에 우리는 계속 답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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