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학평론] 찬란한 슬픔이여 영원하라
[윤진현 문학평론] 찬란한 슬픔이여 영원하라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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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을 앞두고 김영랑과 윤동주의 시를 음미하며
좌측부터 김영랑, 윤동주 시인 / 사진 ⓒ 강진군 등
좌측부터 김영랑, 윤동주 시인 / 사진 ⓒ 강진군 등

 

김영랑의 시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란 작품이 있다. 교과서에 실려 있으니 학창시절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라는 도저한 역설의 구절을 한 번쯤 모두 들어보았을 듯하다. 사실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는 한용운의 드높은 정신세계나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는 온몸으로 밀려드는 김소월의 감성과 비교해보면 김영랑의 시어는 아름답기는 해도 무언가 2% 부족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를 배우던 고등학교 시절, 모란이 피는 5월은 하필이면 중간시험이 있는 달이었다. 에메랄드빛 하늘은 꿈꾸듯 푸르고 찬란한 5월의 햇빛은 학교 돌담에서 속삭이고 있는데 우리는 교실에 갇혀서 시험공부를 해야 했으니 ‘찬란하다’는 단어와 ‘슬픔’이란 상반된 느낌의 단어가 인접하여 빚어내는 역설은 온몸으로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문학공부를 본격적으로 하면서 김영랑의 작품이 지닌 한계도 알게 되었지만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보여주는 세계의 진실도 좀 더 가까이 알게 되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든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시의 화자는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고 있다. ‘모란’은 무엇일까? 전통적으로 모란은 화중왕(花中王), 꽃 중의 임금님, 꽃 중의 꽃, 최고의 꽃이다. 화자는 가장 중요한 것, 좋은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시의 화자가 ‘기다리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현가능성을 막론하고 ‘기다림’이란 강력한 소망의 행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일제강점기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기다림의 대상은 당연히 국권의 회복이다.
 
그런데 기다림 다음은 무엇일까? 당연히 ‘만남’이다. 만난 다음에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도 있고 환상이 깨져서 헤어질 수도 있지만 일단 만나야 그 다음이 결정된다. 그런데 이 시에는 놀랍게도 모란을 만난 순간이 없다. 모란이 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다짐은 굳건하지만 다음 구절에서 곧바로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로 비약해 버린다. 

모란이 피기까지 그토록 기다리던 시의 화자가 활짝 핀 모란과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사라지고 천지에 모란이 자취도 없어진 순간으로 건너뛰고 만다.

이것이 식민지다. 국권을 잃었다는 것은 활짝 핀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국권이 있다고 해도 내 삶이 활짝 피지 못할 수도 있고 그것이 내 책임이라거나 혹은 사회나 정부 탓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삶이 내 뜻대로 활짝 핀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래야 ‘꿈은 이루어진다’ 또한 가능해진다. 

그러나 식민지의 한국인들은 모란을 기다려도 모란이 피면 모란 곁에서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향기에 취하며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울 것인가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피기를 기다리다가 바로 모란이 지는 순간, 천지의 모란이 자취를 감춘 상태를 슬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두려운 일이요, 국권이란 빼앗길 것이 못 된다는 판단이 사무친다. 국권이란 것을 빼앗기는 순간 내 삶의 기본값이 달라지지 않는가. 

국권을 잃은 결핍을 이겨내는 데 슬픔은 가장 강한 힘이었다. ‘찬란한 슬픔의 봄’에서 찬란한 것은 무엇일까? 봄볕이 내리쬐는 아름다운 교정을 이 시의 배경 이미지로 갖고 있던 나는 오랫동안 ‘찬란한’ 것은 ‘봄’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는 절반만 옳다. 시에서 ‘찬란한’은 ‘슬픔의 봄’을 전체를 수식하고 있다. 슬픔을 건너뛰고 봄만이 찬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슬픔’도 찬란하고 동시에 ‘봄’도 찬란하다. 

봄이 찬란하고 모란이 찬란한 데는 쉽게 동의가 되겠지만 슬픔이 찬란하다고?

그렇다. 슬픔은 찬란하다. 인간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모두 원초적인 감정이지만 슬픔은 근본적으로 타인을 중심에 둔 감정이다. 내가 어디를 다치면 나는 아프지만 남이 고통을 느끼면 나는 슬퍼진다. 다른 존재의 간난신고에 공감하는 이 원초적 감정은 인간이 다른 존재와 공존하며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다. 우리를 더 나은 삶, 더 나은 존재로 만드는 ‘슬픔’이 어찌 찬란하지 않으랴.

 

팔복 윤동주 자필
팔복 윤동주 자필

 
‘슬픔’이 ‘찬란하다’는 것을 깨닫자, 또 한 명의 민족시인 윤동주의 <팔복>이란 시도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을 여덟 번 반복하고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는 마무리 구절로 이루어진 이 단순한 시는 얼핏 보면 절망처럼 읽힌다. 영원히 슬픈 것이 무슨 복이란 말인가? 

이 단순한 시는 성서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되는 극진한 위로와 축복의 선언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윤동주는 이를 아주 단순하고 매우 핵심적인 하나의 감정, ‘슬픔’으로 응축한다. 슬퍼할 줄 아는 자는 다른 존재, 다른 생명의 괴로움과 어려움에 공감할 줄 아는 자다. 그런 자들은 다른 존재와 공존할 줄 알고 공존하기 위해 노력한다. 함께 슬퍼하며 함께 문제를 해결하며 함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실천할 수 있다. 함께 사는 삶을 시작하는 첫 번째 감정 ‘슬픔’이 영원하다는 것이 어찌 복이 아니랴.

돌이켜 보면 국권 잃은 나라에서 혼자만 생각했으면 충분히 잘 먹고 잘 살았을 많은 분들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고 온 나라 백성의 처지를 슬퍼하며 자신을 내놓았기에 광복이 있었다. 그 시작이 기미년 3월 1일 만세운동이니 이는 단지 하루가 아니라 그해 봄 온 나라를 울렸던 것이다. 흰 모란처럼 온 나라에 피어서 붉은 모란꽃잎으로 뚝뚝 졌지만 하나하나가 꽃 중의 왕, 모란꽃 같았을 터이다. 

오늘 다시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팔복>을 음미하며 일제강점기를 기억한다. 음미할수록 모란이 핀 순간을 누리지 못하면서도 혼자 눈 돌려 혼자 기쁨을 찾지 않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올곧게 대면했던 선열께서 가르친 찬란한 슬픔의 힘을 다시 생각한다. 우리 민족이 슬픔을 아는 존재, 슬퍼할 줄 아는 존재로 영원하길! 하여 공존과 연대의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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