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소통을 막는 진짜 장애를 적시하라...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윤진현 문화비평] 소통을 막는 진짜 장애를 적시하라...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2.02.1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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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노네임씨어터컴퍼니
사진 ⓒ 노네임씨어터컴퍼니

 

희곡을 읽는 것은 연극을 보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 문학 장르의 일원으로서 희곡이 ‘읽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희곡은 시나 소설과 달리 문자텍스트로서 자립적이지 않다. 희곡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2차원 문자텍스트를 3차원 무대언어로 유연하게 변환할 수 있어야 한다. 얼마간의 훈련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니나 레인(Nina Raine)의 <Tribes(부족, 역제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은 이러한 변환이 왜 필요한지, 얼마나 재미있는지 한 번에 보여주는 정말 빼어난 작품이다. 

한 가족이 식탁에 모여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자, 생각해보자. 우리가 식탁에서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온 가족이 단일한 주제로 한 사람씩 차례차례 발언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은 가까이 앉아있는 두세 명이 음식이나 일상과 같은 주제로 따로따로 대화를 나누기 쉽다. 이런 상황을 문자 텍스트로 쓴다고 생각해보자. 소설에서라면 ‘우리 가족은 두셋씩 머리를 맞대고 수다를 떨었다’는 설명과 함께 작품 전개에 중요한 대사만을 직접 인용하는 형식일 것이다. 그러나 희곡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여러 명이 발언하고 있다면 텍스트에서는 여러 명이 각기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하나하나 알려주어야 한다. 

 

 

    “이 땅콩들 다 썩었어.” 


    “다 집에서 기른 거야.” 


    “그 자식은 발정난 개새끼야.” 


    “아니거든.”


    “나도 알아. 40개는 깠는데, 한 개도 먹을 만한 게 없어.”


    “나이가 육십이야. 너한텐 너무 늙었어.”

 

사진 ⓒ 노네임씨어터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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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부족>의 도입부이다. 독자는 각 대사 앞에 씌어진 다니엘, 베스, 크리스토퍼, 루스라는 인물 이름을 매번 같이 읽는 것이 아니라 도입부의 무대지시에 따라 무대를 상상하며 식탁 주변에 인물을 앉게 하고 각 인물이 말하는 것을 듣듯이 읽어간다. 막이 열리면 아들 다니엘과 어머니 베스는 먹고 있는 땅콩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아버지 크리스토퍼와 딸 루스는 루스의 남자친구에 대해 논쟁하고 있다. 아들 다니엘이 땅콩을 40개나 깠지만 먹을 만한 게 없이 다 썩었다. 아들이 불평하자 어머니 베스는 집에서 기른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루스는 육십 늙은이를 사귀고 있다. 딸이 부모 연배의 남성을 사귀는 것을 찬성할 수 없는 아버지 크리스토퍼는 신랄하게 비난하고 딸은 반발한다. 

이 6개의 대사만으로도 이들 인물의 성격은 웬만큼 짐작 가능하다. 우선 다니엘은 기본적으로 불평이 많고 그러면서도 집요하고 스스로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먹을 것도 없는 썩은 땅콩을 40개나 까면서 불평을 할까? 아버지 크리스토퍼는 입이 거칠고 타인에 대해 함부로 말하며 다른 이의 기분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권위주의적인 성격이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기로 딸의 면전에서 어떻게 딸의 연인에 대해 저렇게 상스러운 말을 할 수 있을까? 루스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성을 사귀고 있다. 연애에 대해서 다소간 위축되어 있을 수 있다. 어머니 베스는 되도록 긍정적인 사고, 타협적 사고를 하는 인물로 보인다. 독자/관객은 작품에서 발신되는 정보를 지속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이들이 어떤 성격이고 어떤 문제에 직면해 있는지 판단해 가면서 작품을 읽거나 본다. 

이 작품을 읽을 때, 독자는 누가 누구와 대화를 하고 있는지를 염두에 두면서 두 팀의 대화를 구분해야 한다. 첫째, 둘째, 다섯째 대사와 셋째, 넷째, 여섯째 대사가 섬세하게 구분되면서도 거의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둘씩 짝지어 각기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소리는 뒤섞여 구분하기 어렵고 이렇게 화제가 섞이고 있으니 목소리는 당연히 점점 높아져 왁자지껄 시끄럽다. 그런데 무대설명에 의하면 등장인물은 5명이다. 아주 시끄러운 4명과 아무 대사 없이 조용한 1명, 벌써 이상하다. 저렇게 시끄러운 대화 상황에서 왜 빌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을까? 작품의 도입부는 가장 기본이 되는 갈등의 양상을 보여준다. 시끄러운 4명과 조용한 1명의 대립이 예상된다. 

사진 ⓒ 노네임씨어터컴퍼니

희곡을 읽고 연극을 볼 때, 독자는 자신이 머릿속으로 그렸던 장면과 무대 위에 재현된 장면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핀다. 개인적으로 나는 빌리가 무대 안쪽에서 이들 인물과 관객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빌리는 관객과 마주 보는 위치에서 얼마간 소외된 채로 자기들끼리 떠드는 4명의 인물을 얼마간 슬프고 얼마간 원망하며 얼마간은 경멸을 담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 이때 빌리의 시선에서 관객은 가족의 연장일 수 있지만 관객은 빌리의 표정에 공감하며 빌리에게 시선을 집중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언제나 감각적인 해석을 보여주는 박정희 연출은 놀랍게도 빌리의 등을 보여준다. 빌리는 관객을 등지고 앉아 가족들의 대화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심지어 대화에 참여하는지 아닌지도 불분명한 상태로 초반 몇 분을 보낸다. 가족들의 화제가 루스의 애인 주제로 기울고 아버지 크리스토퍼를 따라 누이를 비아냥대기 시작한 다니엘 덕분에 감정이 격해지고 갈등이 고조될 무렵, 이를 막고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어머니 베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빌리의 팔을 만지며 다시 화제를 땅콩으로 돌려 ‘먹었니?’라고 질문할 때까지 빌리의 이러한 상태는 계속된다. 

이 경우, 관객은 이들 가족처럼 빌리의 존재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고 있다가 무엇인가 전환이 필요한 순간, 의식적으로 드러내는 관심의 대상으로 빌리를 발견하게 된다. 더구나 식탁의 맞은편, 다니엘과 크리스토퍼 다음에 앉아있던 빌리는 그때서야 가족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질문한다. 이러한 맥락은 빌리의 성격이 매우 입체적이며 간단치 않음을 보여준다. 빌리라는 인물의 이러한 성격만으로도 좀더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할 정도지만 일단은 생략하자.

사진 ⓒ 노네임씨어터컴퍼니

한국어 번역 제목은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이므로 독자/관객은 이 작품의 등장인물을 ‘가족 구성원’으로 국한해서 볼 위험이 있다. 그러나 연극에서 등장인물은 표면적으로는 현실세계의 인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처럼 보여도 대부분의 경우에 그 이면에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원형적 상상력을 내포하고 있다. 원제 ‘부족(Tribes)’은 이 작품의 등장인물이 의미하는 상징성을 좀 더 광범위하게 드러낸다고 할 것이다. 요컨대 이들 인물은 현실세계에 있을 법한 어떤 가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마다 현실세계의 사회적 통념, 태도, 가치 등을 대변한다. 

예를 들면 아버지 크리스토퍼는 소위 ‘상식’을 대변한다. 그는 교사 출신으로 사람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온갖 지식을 알고 있고 언어의 중요성을 이해하며 그래서 중국어를 배우고 일본문화를 즐긴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수화’는 배우려 하지 않는다. 자기 필요에 따라, 치우친 지식 및 가치체계의 문제점을 이해할 필요도 없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바로 ‘상식의 상태’이다. 이에 대립하고 있는 것은 물론 빌리이다. 빌리는 청각장애인으로서 듣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시각적 정보가 대단히 중요하다. 청각장애인에게 ‘수화’는 바로 이러한 시각성을 극대화한 언어이다. 

그러나 아버지 크리스토퍼는 빌리의 청각장애가 빌리를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빌리에게 수화를 배우지 못하게 하고 입술을 읽어 대화내용을 파악하는 독순술을 가르친다. 즉 타인의 상태를 이해할 능력이 없는 자가 타인의 상황을 규정하고 필요한 것을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나머지 가족은 크리스토퍼의 권위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상식’의 세계 안에서 얼마간 온정적이거나 얼마간 필요한 방식으로 빌리와 관계를 맺지만 이들은 이미 다수이다. 혼자인 빌리를 둘러싼 세계의 모순은 이미 첨예하다. 

물론 한 존재가 성장하면서 세계와 불화하고 세계와 소통하기 어려운 것은 응당 겪는 일이다. 굳이 빌리의 청각장애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생각해보면, 그 어떤 장애가 없을 때도 말하기도 어렵고 듣기는 더 어렵지 않던가. 이 작품에서 빌리의 청각장애는 우선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성찰의 계기로 삼을 수 있으려니와 더 나아가 현실사회의 불통은 존재를 위한 결정권이 당사자나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더 힘센 권력을 가진 자에게 있을 때, 얼마나 증폭되는지를 보여준다. 무지한 권력이 편협한 결정을 강요할 때, 소통불가능이란 현실의 문제는 더욱 악화된다.

즉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빌리는 일차적으로 이 사회의 청각장애인이 겪는 높은 인식의 벽과 비인간적 차별과 가당찮은 대응방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는 결정할 권리를 가진 자가 그 적절성과 객관성을 부당하게 확신하면서 자신의 판단과 결정을 당사자에게 강요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왜곡된 시작은 사태의 핵심을 끊임없이 우회하며 본질을 은폐한다. 청인이었지만 청각을 잃어가고 있는 실비아를 만나 수화를 배우고 청각장애인과 어울리기 시작한 빌리는 가족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직장을 구하고 사랑을 시작한다. 그러나 곧 직장에서 난관에 부딪치고 실비아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고 좌절하며 독립은 흔들린다. 이러한 과정은 누구에게나 복잡다단하다. 빌리가 청각장애인이기 때문에 그에 한정하여 발생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병렬되고 있는 다니엘의 잘못된 행동과 틱 장애, 루스의 무기력은 빌리의 청각장애와 병렬되는 보조플롯이다. 말하자면 편협한 크리스토퍼의 세계에서 인간 대부분은 행복하거나 성공하기 어려우며 서로의 발목을 잡고 발전을 방해하며 상처 입히고 불행하게 만들기 쉽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은 의외로 가깝다. 소통은 단일한 경로로 한정할 필요가 없다. 도대체 왜 수화와 독순술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단 말인가. 음성언어와 수화와 독순술을 왜 우열로 구분해야 한단 말인가. 차이를 차별로 사용하며 타인을 위한다는 명분과 더 낫다는 착각으로 판단을 강요하지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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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2022-02-19 10:52:33
기호 1,2,3,4는 답 안나온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유세차빌리고 옷사입고 알바쓰고, 답 안나온다.
기호6에서 답안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 대선시 기호6번이 답이었던것처럼
허경영 대통령 대선후보 기호6번이 답안지다.
박정희 비밀보좌관 허경영만이 과거정치경력과 능력이 이나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