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무엇을 위하여 의심하는 것인가? … 연극 '붉은 낙엽'
[윤진현 문화비평] 무엇을 위하여 의심하는 것인가? … 연극 '붉은 낙엽'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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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국립극단
사진 ⓒ 국립극단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현대철학의 출발점을 이루는 데카르트의 이 저명한 명제는 신 중심의 중세에서 벗어나는 주체로 ‘생각하는 인간’을 전제하고 있다. 견고한 중세적 제도와 교리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을 출발점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의 원형은 프랑스의 비평가, 앙투안 레오나르도 토마스(Antoine Léonard Thomas)의 1765년 소논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말은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Puisque je doute, je pense puisque, je pense j'existe.).”였다. 즉 ‘생각’은 ‘의심’에서 시작되었고 ‘의심’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자명한 것에 대한 ‘의심’은 진실을 향한 첫 걸음임에 분명하다. 경직된 중세교회의 교리와 사회적 제도를 인간 중심의 사회로 재편해 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의심은 매우 필수적이고 매우 유용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때의 수단이 아니라 근현대 사회, 사유하는 인간의 근본을 이루는 자질이다. 그러나 이는 양면의 칼날이다. 일방적인 장점, 강점만은 아니다.

인간 사회는 상당 부분 ‘믿음’을 중심으로 지탱한다. 증거가 있어야 믿는다고 반박할 수도 있지만, 보고도 믿지 않는 경우도 많고, 보지 않고도 믿어야 진정한 믿음이란 신념 또한 현재형이다. 말하자면 ‘믿음’이란 대단히 본원적이며 직관적인 것이다. ‘의심’을 전제하기보다는 의심 너머에 존재하는 토대에 가깝다. 말하자면 ‘회의하는 인간’은 사유의 전개를 위한 철학적 명제이지 실재하는 세계의 전제일 수는 없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의심과 믿음이 공존하고 병진하는 세계에서 존재를 확신할 수 있을 것인가? 연극 <붉은 낙엽>은 ‘생각하는 인간’으로 시작한 현대인의 존재적 기반을 뒤흔들며 그 너머를 바라보기를 요구한다.

사진 ⓒ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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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 작은 마을. 평범한 10대 지미는 부모와 함께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이웃집 워킹맘 카렌은 갑작스레 펑크 난 시터 대신 지미에게 어린 딸 에이미를 봐달라고 부탁한다. 지미는 기꺼이 에이미를 돌보러 다녀온다. 문제는 이튿날, 에이미가 실종되었다는 것! 아버지 에릭은 아들의 귀가 상황을 반추하며 아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지미가 경찰의 용의선상에 오르자 카렌은 지미를 범인으로 확신하고 몰아세운다.

에릭은 자신의 아들이 그럴 리 없다고 믿으면서 한편으로 의심이 커지는 것을 막지 못한다. 급기야 지미는 물론이요 형제와 아버지, 죽은 어머니와 누이, 아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의심의 칼날을 휘두르며 자신과 가족을 난도질한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한 카렌은 끝내 에이미를 죽였다고 지미에게 총격을 가하여 지미는 사망하고 만다. 그러나 진짜 범인은 피자 배달원이었고 그의 수상한 행동을 기억해낸 지미의 제보로 에이미는 기적적으로 생환한다. 작품의 에필로그는 성장한 에이미가 결혼소식을 알리고 떠난 뒤, 아들도 잃고 아내도 떠나고 핏빛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집에 홀로 남은 에릭을 비춰보인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과 그로 인해 파탄에 이르는 현실은 우리에게 흔한 일이다. 그래서 때로 인간들은 진실을 두려워 회피하기도 하고 맹목을 믿음으로 착각하며 모순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한다. ‘회의하는 인간’을 출발로 삼고 있는 현대인에게는 끝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인 것일까? 

사진 ⓒ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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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수천 년 이어져 온 연극은 질문의 방식이 다르다. 연극은 선택과 문제해결의 예술이다. 토머스 쿡(Thomas H. Cook)의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연극 <붉은 낙엽>은 소설이 노정하고 있는 뼈아픈 현대적 한계를 넘어 인간의 실천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소설 붉은 낙엽은 매우 흥미롭고 긴장 넘치는 작품이다. 작가 토머스 쿡은 추리소설 작가로 시작하여 인간의 불안한 내면을 스릴 넘치는 문체로 파헤치는데 출중한 능력을 보여준다는 정평을 얻고 있다. 소설에서는 키이스(지미)의 아버지 에릭과 에이미의 아버지 빈스의 갈등이 중요한 축을 이루며 대문자 아버지(Father)의 나라, 미국의 주요 가치에 대한 문제제기를 겸한다. 이들 아버지는 집요하지만 성급하고 합리적이지만 과학적이지 못하며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려 노력하지만 진정한 아버지에는 결국 미달하고 만다. 이 소설은 1차적으로는 미국적 가치에 대한 깊은 회의를 제기한다.

연극으로 각색하면서 에이미의 아버지 빈스를 생략하고 홀로 에이미를 키우는 워킹맘 카렌으로 변경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 덕분에 아버지의 역할로 집중되는 미국적 주제가 산업사회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 보편적 상황으로 확대되었으며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편집증적인 오판은 더욱 개연성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진 ⓒ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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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소설에서는 시종 아버지 에릭을 화자로, 에릭의 관점에서 사건을 기술한다. 소설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은 독자가 주인공의 내면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유용한 미적 전략이다. 에릭은 불안에 떨면서도 꼬리를 물고 솟구치는 의심을 집요하게 추구하면서 아버지의 무능과, 어머니의 자살의 비밀과, 부적절한 형의 성적 판타지와, 고립되고 폐쇄적인 아들의 상황까지 모두 파헤쳐 내는 것을 넘어, 부당하게 아내의 행동까지 의심하는 데 이른다. 외견상 합리적으로 전개되는 의심과 추리 덕분에 독자는 에릭 입장에서 모든 인물의 깊은 내면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을 생생하게 대면하는 스릴을 경험하게 된다. 

연극에서는 에릭의 역할이 아무리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도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기술될 수는 없다. 하여 연극의 질문은 그 같은 스릴에 한정되지 않는다. 한때는 누구나 부러워했던 아름다운 저택, 유년의 곤궁과 고통에서 벗어나 자신의 힘으로 이룩한 스윗홈은 핏빛 낙엽에 휩싸인다. 바로 그 자리에 모든 것을 잃고 홀로 남은 에릭을 만든 것은 어떤 선택일까?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어떤 선택을 했기에 에릭은 이러한 파국에 도달했을까? 연극 <붉은 낙엽>이 묻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진실을 향한 의심과 질문을 멈추지 않으면서 동시에 사랑하는 이를 수호하는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답은 하나가 아니다. 무엇보다 우선 에릭의 두려움이 눈에 띈다. 공포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분명 자동차 소리를 들었는데, 왜 아들은 걸어왔다고 대답한 것일까? 에릭은 이 궁금증에 왜 처음부터 솔직하지 못한 것일까? 아마도 아들이 납치, 살인을 저질렀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내가 보기에는 착하디착한 내 아들이 끔찍한 살인마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에릭의 질문이 여기에서 시작했고 이에 답하며 그의 의심과 추리가 전개되었다면 어찌되었을 것인가? 에릭의 의심은 무엇을 위한 것이던가? 진실은 어떻게 에릭과 지미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김도영 각색, 이준우 연출 극단 배다의 <붉은 낙엽>은 2021년 제 42회 서울연극제에서 우수상을 수상했고 제 14회 대한민국 연극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공연은 이미 끝났지만 토머스 쿡의 소설 「붉은 낙엽」(고려원북스, 2013)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극적 질문을 품고 소설 「붉은 낙엽」을 읽으면서 믿음과 의심을 두 축으로 인간을 위한 출발점을 저마다 모색해 보며 다시 공연을 만날 날을 기다려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윤진현(Yun, Jinhyeon) 

-인하대 국어국문학 박사

-인하대 프론티어학부 강사

-문화비평가 

-연극평론가

윤진현(尹振賢) 연극평론가는 지역문화 운동을 펼치는 문화혁명가이다. 인천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드라마와 문화 콘텐츠를 지역의 역사와 접목시킨 '신화와 드라마, 극적 상상력으로 고전 다시 쓰기'등의 강의를 해오고 있다. 인천 지역사회에 감춰진 진주와도 숨은 작가를 발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윤진현은 인하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는 <이순신과 영웅의 쇄신><김재철과 조선연극사><애니메이션 삼국지의 종류와 변용>등이 있다. 저서로는 <행복한 인천연극> <풍경, 함세덕> <조선 서민국의 구상과 탈 계몽의 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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