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Ending 앞에서 Continue를 상상하라!… 뮤지컬 '엔딩노트'
[윤진현 문화비평] Ending 앞에서 Continue를 상상하라!… 뮤지컬 '엔딩노트'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1.12.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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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에 친구들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같은 내포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하며 어떤 질문이 더 본질적인 것인가 꽤 오래 고민하며 토론한 적이 있었다. 질문에 비해 고려해야 하는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던 우리는 출처 모르는 우울을 공유하며 급기야 유언장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또래의 우울이란 넘치는 생명력과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라 이 유언장 유행은 곧바로 코미디 소동이 되었다. 뭔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대뜸 “내가 이 세상을 뜨게 되면!”을 외치며 볼펜이나 머리핀, 카드, 간식 따위를 서로 중구난방 유증하고는 깔깔거렸다. 이 요망한 장난이 끝난 것은 물론 선생님의 경계 때문이었다.

뮤지컬 <엔딩노트>를 보고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청소년기의 유언장 소동이 떠올랐다. 무대와 객석에 가득한 젊은이들 덕분에 더욱 그랬다. 그때 우리들을 말리던 선생님의 심경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한창 신나게 놀면서 행복해야 할 청소년 제자들의 유언장 놀이가 선생님께는 씁쓸하고 안쓰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입시를 앞두고 그 모든 즐거움을 억눌러라 강요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어서 더욱 불편하셨을 것이다. 

‘엔딩노트(Ending note)’란 보통 죽음을 앞둔 이들이 자신의 희망과 사후 처리 사항을 적은 것이다. ‘유서’가 주로 감정과 상황을 드러내고 ‘유언장’이 사회적 처리사항에 집중된다면 ‘엔딩노트’는 죽음에 직면해서 느끼는 희망과 삶에 대한 감사, 사후의 장례 따위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죽어가는 이에 대한 인간적 존엄과 사회적 협력과 지원을 기반으로 한다. 어떤 것이든 인간이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대단히 인간적이며 사회적인 상상력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뮤지컬 <엔딩노트>는 진실로 죽음이 임박한 이들의 슬픔과 혼란과 고통이 드러나듯 묵시적이고 모호한 사건으로 가득하다. 에디의 질병과 아버지의 부재라는 두 가지 전제가 다소 장황하고 광상적인 대사 속에 섞여 있어 사건의 인과가 쉽게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관객으로서는 얼마간 당황스럽기도 하다. ‘죽음’이란 쉽게 포획되지 않는 상황을 다룬다고 해도 이점은 보완이 필요할 듯하다. 초연의 한계를 넘어 진화해가는 것이 공연이니만큼 개선을 바란다.

더구나 ‘죽음’에 직면해서도 소망하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소명이고 운명이다. 든든하게 의지가 되는 부모와, 완벽하게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절대 약자인 유아기, 그럼에도 대다수 인간이 그토록 무력했던 어린 시절을 가장 행복한 시절로 그리워하는 것은 살기 위해 힘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모순이다. 그 점을 감안한다면 과유불급,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이들 형제의 희망을 구태여 살부(殺父) 정황과 연결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오히려 폭력적인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였을망정 죽음에 임박해서 그조차도 아름답게 기억하며 끝내 찾아낸 아름다운 가족의 순간을 소망하는 에디가 더욱 애틋하지 않은가.

극한의 빈곤 상태에서 죽어가는 젊은이와 그 형제가, 마땅히 사회와 기성세대로부터 받아야 했으나 전혀 받지 못한 보호만으로도 이들이 겪는 갈등은 충분하다. 이들이 겪고 있는 삶의 ‘엔딩’이란 문제는 에디의 질병에서 시작된 것이지 아버지의 사망에 따른 ‘가책’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뮤지컬의 주제를 확장해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사실 드라마에 음악이 결합한다는 것은 대상을 판단함에 충분히 시간을 갖고 선율로 해석되는 미적 요소를 수용하여 더 깊은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직접 대면하기 어려운 수많은 고통스러운 선택의 순간에 음악을 결합하여 생각할 시간을 확보하고 음악의 아름다움에 편승하여 더 많은 이해와 더 지혜로운 판단을 실현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음악의 아름다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간의 사건이 ‘사랑’이고 보면 음악과 드라마가 만난 ‘멜로드라마(melodrama)’가 남녀의 사랑이야기로 한정되어 간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음악과 함께 생각해야 할 인간의 일을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굳이 남녀의 사랑에 국한할 필요는 없다. 최근 들어 다양한 주제와 소재로 뮤지컬의 내용이 확장되어 가는 것은 충분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또 하나 다행한 것은 뮤지컬 <엔딩노트>가 미래없는 타나토스의 탐닉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죽어가는 동생 에디와 에디를 돌보는 형 알피는 수수께끼의 사나이 A와 함께 끝없이 삶을 회고하고 삶을 소망한다. 이들은 그리운 고향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싶어하기도 하고, 가족과 단란했던 순간을 꿈꾸기도 하며, 사랑하는 형에게 해주고 싶은 것, 죽어가는 동생에게 해주고 싶은 치료 따위를 꿈꾼다. 요컨대 이들의 희망은 ‘ending’이 아니라 ‘continue’를 위한 것이다.

생명이 충만할 때,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삶에 표하는 경의의 한 방법이다. 삶이 끝났을 때, 또는 끝날 때 어떤 모습이길 원하는가? 무엇을 돌아보기를 원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때로 삶을 더 진지하고 소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nding’을 앞두고 삶을 사랑하며 삶을 채워하는 ‘계속’의 상상력을 갖는 것! 이것이 이 순간을 제대로 사는 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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