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말’을 통제하던 시대에서 우리는 정말 벗어났을까?… 연극 '보도지침'
[윤진현 문화비평] ‘말’을 통제하던 시대에서 우리는 정말 벗어났을까?… 연극 '보도지침'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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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을 빼앗긴 채로 새로운 근대세계를 열어가야 했던 까닭에 한국의 근현대사에는 분노를 넘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 황당한 사건이 적지 않았다. 대한제국 시절 여러 경로로 창간된 신문 등이 국권을 잃으면서 모두 폐간되거나 일제의 통제 하에 들어가고 소위 민족지라는 몇몇 신문들도 온 한반도가 들고 일어나 목숨을 걸고 만세를 불렀던 3·1운동 이후에야 그 덕분으로 겨우 창간되었으되 일제의 검열 밖에서 언론의 자유를 누렸던 순간은 결코 없었다. 해방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에 의해 구축된 통제의 시스템은 한국사회에 더욱 밀착하고 체화되어 가며 대단히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그래서 1986년 '월간 말'에서 ‘보도지침’을 폭로했을 때, 당시 나는 구상유취 일개 대학생에 불과했지만 이에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기보다는 이 공공연한 언론 통제의 관행, 권력과 야합하는 언론의 만행을 이 기회에 뿌리 뽑아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에 불타올랐었다. 

연극 <보도지침>은 그 시절의 혈기를 돌아보는 계기였다. 2021년에 1986년을 돌아본다면 35년 전, 이미 한 세대도 더 지난 과거이지만 1980년대의 역사적 과제가 성취되었다기보다는 복잡해졌다고 이해하고 있는 자로서, ‘보도지침 사건’의 현재적 의미를 되짚어 보기에는 매우 유용한 시간이었다. 

‘보도지침’은 인간의 ‘말’을 지시하고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권력에서 시작한다. 요컨대 이는 평등한 인간이 아니라 우열적 인간, 불평등한 인간을 전제로 한다. ‘보도지침’을 극적 대상으로 삼았을 때, 가장 문제적으로 도전해야 할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불평등을 승인하는 권력과 그에 복종하고 협력하는 세력은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게 이와 싸울 것인가? 그 시대는 확실히 불평등을 승인하는 사회였으니 지금은 충분히 평등한가?

관련 재판이 근 10년이나 지속되어 최종적으로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법정이 극적 배경으로 등장한 것은 이상하지 않다. 다만 월간 말에 ‘보도지침’이 폭로되었을 때, 이를 유죄라고 생각한 국민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법적 유무죄 판결을 법정이며 극장이며 광장인 무대에서 새삼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역사소재를 무대에서 다루는 것은 과거라고 해도 여전히 현재적 해석이 가능하고 현재적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정작 ‘보도지침’을 지시했던 진짜 반민주세력의 불법은 논죄되지도 처벌 받지도 않았던 바, 인간을 서열화하고 평등이란 민주적 이상을 부정하는 세력이 여전히 온존하고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첫 발을 함께 같은 동아리 안에서 시작한 인물이란 설정은 창작자의 자유이다. 기실 대부분 인간은 같은 시작점을 갖고 있지 않지만 극적 전개를 위해 같은 출발점을 상정하는 것은 납득 가능하다. 더구나 그 시절 동아리 신입생에게 가해지던 이해할 수 없는 폭력적 처우는 폭력에 저항하던 모든 이들이 동시에 자행하는 것이기도 했으니 회고로부터 반성이 시작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각기 다른 길, 다른 삶을 택하여 한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 법정에서 적으로 만나게 되었다면 이들을 갈라놓은 실체에 대한 질문과 분석이 있어야 했다. 그 엄혹한 시대를 싸우며 견뎌낸 사람을 예찬하는 것이 연극 <보도지침>의 목표일 수는 없지 않은가. 연극 <보도지침>에서는 이러한 질문 없이 당대의 외침이 재현되고 엄혹한 권력의 공포와 이에 타협하는 지식인의 고뇌가 핍진하게 재현되는데 그치고 말았다. 하여 당대의 보도지침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불분명하였다. ‘말’을 통제할 수 있는 시대에서 우리는 확실히 벗어났을까?

오세혁의 작품을 여러 편 보았지만 늘 아이디어가 빛난다. 모든 작품이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하여 발전해가기 마련이므로 작가로서 칭찬할 만한 지점이다. 그러나 아이디어만이 앞서가는 작품은 미완성의 작품이며 쉽게 선동이나 권위주의나 편견의 조장이나 심지어 관객에 대한 아첨으로 경사되기 쉽다. 마땅히 경계할 일이다. 

사소한 예로 ‘월간 말’을 ‘월간 독백’이라 각색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월간 말’이 목표했던 그 간절하고 핍진한 목표, 억압되고 은폐되어 시민에게 가닿지 못하던 사회 정의를 단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달하고 싶어 고군분투하던 ‘말’ 지의 목표를 동시대에 목도한 자로서 그들의 ‘말’을 ‘독백’으로 번안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월간 말’이 진력했던 살아있는 언론, 바른 언론으로 향하던 헌신은 ‘독백’이란 단어로는 아무리 후하게 생각해도 제대로 보여줄 수 없다. 

아마 작가 자신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구구하게도 ‘독백이란 한 사람의 인물에 의해 행해지는 누구로부터도 방해받거나 매개되지 않는 다소 긴 발화를 말한다.’는 부연설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극적으로 ‘독백’이 필요한 순간은 사건을 주동해가는 인물의 내면에서 발생한 갈등을 관객이 알아야만 사건의 다음 단계를 이해할 수 있을 때이며 뮤지컬이나 오페라로 보자면 ‘아이엠(I am)’송으로 배우가 자신의 기량을 다하여 관객의 박수를 직접 끌어낼 때이다. 

충분히 성숙한 작품은 언제나 작가 개인의 의도 이상을 보여주며 관객 자신의 것이 된다. 좋은 작품은 발표되면, 작품이 제기하는 크고 작은 문제를 감당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을 모두의 몫으로 수용하게 된다. 다시 생각해 보자. ‘월간 말’을 오늘날 각색한다면 가장 적당한 단어는 무엇일까? 여전히 동의할 수 없는 하달과 그에 대한 복종이 역연한 권력의 세상에서 그때의 ‘보도지침’은 지금은 어떤 형태로 살아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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