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직업정신이냐? 개인감정이냐?… 뮤지컬 '웨딩플레이어'
[윤진현 문화비평] 직업정신이냐? 개인감정이냐?… 뮤지컬 '웨딩플레이어'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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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개지만 필자가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가족 중 한 명이 그러면 이제 작가가 되는 것이냐고 물었다. 어려서부터 글 잘 쓴다는 소리를 들었고 시키지 않아도 늘 시며 수필이며 소설을 그적이고 있었으며 가족들이 원하던 사범대학을 마다하고 문과대학으로 가서 한국문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작가가 되고 싶어서였다. 하여 그 모든 제도교육이 종료된 순간에 ‘작가는 언제 되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무척 당황했었다. 한국문학을 전공하면 으레 작가가 되는 줄 아는 무지보다도, 꽁꽁 싸서 파묻어버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치미 떼고 있던 나의 꿈을 집요하게 잊지 않고 있다가 박사가 되어 나름 축하받는 자리에서 꺼내놓은 혈육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요샛말로 현실가족이다. 그 갑작스러운 진실의 폭격에 애써 외면하던 나의 진짜 꿈이 백일 하에 맨 몸으로 드러났다. 물론 나는 그 꿈을 다시 잘 싸서 잘 묻어놓았다.

평단에는 작가가 되려다 못된 인간들이 평론을 한다는 말도 있고 연극계에는 배우하려다 못된 인간들이 연출을 하고 그마저 못한 인간들이 평론을 한다는 말도 있다. 언젠가는 시집을 한 권 내보리라, 언젠가는 지나는 사람3이 되어 무대에 서보리라. 이루기 힘든 꿈을 심연에 가라앉혀두고 오늘도 남의 작품을 보며 이러쿵저러쿵 숨은 진실을 찾겠다고 버둥거리고 있는 것이다.

뮤지컬 <웨딩플레이어>는 피아노를 전공한 한 젊은 여성의 ‘직업’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려서 피아노에 매료된 한 소녀, 아버지는 딸의 재능에 놀라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피아노 교육을 시작한다. 온 가족의 헌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예능계 사교육을 거쳐 드디어 대학 졸업연주회의 순간, 문자로 날아온 파혼 통보, 주인공 지원은 끝내 연주를 하지 못한다. 그녀가 피아노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친척의 결혼식 연주 덕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파혼으로 멈췄던 그녀의 연주는 결혼식에서 재개될 수 있었고 그때부터 ‘결혼식 연주자’로서 예식에 꼭 필요한 음악을 담당하는 ‘직업’을 갖게 된다.

그러나 헤어진 전 약혼자의 결혼식을 맡게 된 주인공! 그녀는 여기에서 연주를 하는 것이 옳을까? 피하는 것이 옳을까?

한 인간이 속해 있는 세계를 굳이 공적/사적 세계로 분할하여 혼동이나 간섭을 금지한 역사는 따지고 보면 유구하다. 옛날에도 정실관계로 공무를 처리하는 것은 금기였고 이를 어기는 것이 탐관오리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한 인간의 정체성이 공적, 사적으로 분할되는 것은 아니었다. 공적 세계의 정체성이라는 것도 실체적 개인 너머에서 축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 노동의 기계적 균질성을 요구하는 근대 사회에 들어와서 사적 영역은 비밀스러운 개인 영역으로 포장되어 지켜줘야 한다는 미명 하에 공적 영역의 고려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인간의 분열은 당연한 것이 된다. 요컨대 생산현장에 들어오면 실체적 개인은 중단되고 시스템의 일부, 기계적 일부가 되는 <모던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의 처지를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단연코 이것은 인간적이지 않다. 심지어 직업정신과 개인감정은 대등하지도 대립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당연하게 느껴지는 이 왜곡된 질문 앞에서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뮤지컬 <웨딩플레이어>는 작은 조약돌처럼 이 왜곡된 질문이 당연한 세계에 던져져 파문을 낸다. 

물론 지원이 두려움에 피했던 이전의 순간과 달리, 자신의 곤혹스러움을 이겨내고 결국은 전 약혼자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불러줄 수도 있다. 그것을 하나의 성장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성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정면돌파란 연주를 하든, 하지 않든 자신의 결정과 함께 결혼식 당사자들에게 자신을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계에서 발생한 일은 일방에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희망이나 바람과 다른 세계를 깨닫는 것도 하나의 성장이지만 이것은 이니시에이션의 입구에 불과하다. 예상되는 결과에 대해 유용한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것이 진짜 성장의 한 걸음이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지원이 가지 않기를 바란다. 이성적으로 해결된 문제도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보호하는 선택이 비겁함일 수는 없다. 

사족 같지만 <웨딩플레이어>는 단순하면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다. 공교육은 다만 보조역할일 뿐, 거대한 사교육 피라미드로 움직이는 예술교육의 내막은 수십 년 묵은 관행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대안의 모색이 없다는 점은 놀랍다. 또 ‘직업’과 ‘사랑’은 대등하지도 동일하지도 않는 삶의 요소인데, 유독 여성에게는 이것이 여전히 선택으로 주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피아노냐? 결혼이냐?” ‘결혼’이란 한 모퉁이일 뿐, 종점도 전환점도 아닐진대, 이러한 선택항이 실재하고 있다는 것도 따져볼 문제이다. 

재미있는 부분도 있었다.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의 어머니들이 촛불을 켤 때 쓰는 브람스의 왈츠, 평생 클라라 슈만을 짝사랑하면서도 정숙하고 진지했던 브람스의 음악이 결혼식에 쓰이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 아들, 딸을 결혼시키는 부모는 브람스처럼 자식을 사랑하되 평생 선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워낙 짝사랑이란 사랑을 하기는 해도 받는 것은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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