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STOP WARS, 그 모든 전쟁을 멈춰라... 연극 '일리아드'
[윤진현 문화비평] STOP WARS, 그 모든 전쟁을 멈춰라... 연극 '일리아드'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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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이 투구가 쌓인 위로 육중한 기단이 있다. 그 어떤 엄청난 성과라도 사람 위에 세워진 것은 음험하다. 리사 피터슨(Lisa Peterson)과 데니스 오헤어(Denis O'hare)의 한국판 <일리아드(An Iliad)>는 무대 자체로 압도적인 메시지를 발신하며 시작한다.

공연장에 입장했을 때, 황석정은 집시 또는 신녀의 모습으로 타로카드로 관객의 운수를 점쳐주기도 하고 비밀스러운 음료를 조제하여 마시기도 하였다. 배우가 관객보다 먼저 공연장에 등장하여 관객을 맞이하는 모습은 공연장을 평범한 극적 공간이 아니라 진실이 전수되는 신비한 공간으로 규정하는 효과를 동반하였다. 그럼에도 무대에서 뿜어내는 인간주의적 메시지를 충분히 음미할 수 있도록 무대가 비어 있는 시간이 좀 더 있어도 좋았을 듯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일리아드>의 저자, 시인 호메로스는 맹인이 아니라 문맹이었다고 한다. 호메로스의 이 장려한 서사시는 씌어진 것이 아니라 불리워진 것이었고 신의 보호를 받는 서기관이 이를 받아 적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는 순간, 이 해석의 진위를 막론하고 노래와 시의 영험한 진실이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문해력(文解力)이 인간의 능력이나 등급을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이를 표현하는 능력은 문자 너머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리아드>의 이야기꾼은 호메로스의 후예, 호메로스가 혼신을 다하여 시간과 망각이란 거대한 장벽을 넘어서 남긴 기억과 이야기의 전수자이다. 

말을 기르며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안온하게 살고 싶었던 헥토르의 소박한 꿈이, 왕국을 사랑하여 목숨을 우선할 수 없는 순간을 이해하는 드높은 애국심과 덕성의 순간이, 같은 꿈을 가졌으되 같은 결정을 해야 했던 수많은 우리의 독립투사들, 더 나은 인간의 삶을 위해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내던졌던 수많은 이들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영웅도 사람이었다. 이 당연한 깨달음이 새삼스럽게 이어졌다. 생각해보면 가진 것의 다소, 능력의 고하를 막론하고 인간이 원하는 것은 거의 비슷하다. 같은 인간이었던 것이다. 위대한 <일리아드>는 신들과 영웅의 전투를 다룬 것이 아니라 전쟁에 동원될 수밖에 없던 인간의 서사였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헥토르의 용맹이 야기한 아킬레우스의 보복, 친구 파트로클로스에게서 빼앗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있는 헥토르를 마주한 아킬레우스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사랑하는 친구를 잃었고 그를 위해 복수를 다짐했으며 신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불사의 몸을 지녔으며 불멸의 명성을 지닌 고귀한 영웅도 전쟁에서는 인간을 위해 인간을 해치는 괴물과 대결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 결국은 자기 자신을 해치는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잔인하게 헥토르를 해친 아킬레우스에게 다시금 인간을 존중하는 정상적이며 고귀한 생각이 돌아온 것은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의 부정(父情),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사랑 덕분이었다. 전쟁을 이기는 것은 더 큰 용맹, 더 큰 전투능력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것이다. 

이 당연한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꾼이 차마 들려주지 못했던 이후의 이야기도 안다. 이 슬픈 장례기간에 그리스군은 목마를 만들었고 일리온은 함락되었으며 헥토르의 어린 아들 아스티아낙스를 탑에서 떨어뜨려 살해하고 헤카베와 안드로마케는 노예가 되어 그리스로 끌려가야 했다. 전쟁으로 희생된 젊은이를 애도한다면서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키고 또 다른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몰아왔으며 무고한 여자와 아이를 해치고 죽여 왔다.

우리는 언제 이런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언제나 이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를 전하는 이야기꾼의 소망대로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인가. 호메로스가 남긴 위대한 반전(反戰)의 서사시, <일리아드>는 우리에게 바로 이 점을 묻고 있다.

 

정해진 상연시간 100분을 훌쩍 넘겨 두 시간 가까이 무대에서 격렬한 에너지로 일리온의 이야기를 전한 내레이터 배우에게 다시금 경의를 표한다. 그렇지만 결국은 보지 못한 최재웅, 김종구의 <일리아드>도 반드시 다시 보고 싶다. 이것은 황석정 배우의 해석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기도 하다. 프로그램의 의상을 보면 어쩌면 최재웅, 김종구의 해석에는 귀환한 그리스 병사의 음성이 묻어있을 수도 있고 트로이의 패잔병 목소리가 들어있을 수도 있을 듯하다. 유명 동영상 플랫폼에서도 해외의 몇몇 <An Iliad>를 볼 수 있다. 어떤 작품은 종군기자의 느낌이었고 어떤 작품은 역사 선생 같은 느낌이었다. 

누구에게 이야기를 듣든 <일리아드>의 메시지가 바뀌지는 않겠지만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절대 극복할 수 없다는 좌절로 극장을 나설 수는 없다. 그것이 호메로스와 그의 전수자들의 뜻은 아닐 것이다. 

물론 황석정 배우의 마성적인 매력은 여성성과 더해져 ‘일리아드’가 신들과 인간의 어리석고 잔인한 싸움이라는 점을 온몸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어떻게’ 전쟁을 넘어설 것인가를 생각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는 신전의 사제에게 신탁을 받아 전쟁을 끝낼 수는 없다. 집시의 타로 속에서 종전(終戰)의 점괘를 얻을 수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죽은 손자 아스티아낙스를 끌어안고 울부짖던 <트로이 여인들>의 헤카베와 안드로마케가 떠오른다. 아들을 잃은 그녀의 저주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프리아모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되찾을 때 보여주었듯이 폭력을 끝내는 것이 폭력일 수 없다. 그 전쟁만 끝날 수는 없다. 모든 전쟁을 끝내야 한다. 

헥토르의 어머니 헤카베와 그의 아내 안드로마케의 비통한 절망은 현재형이다. 위대한 반전의 서사 <일리아드> 또한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같이 기원할 것이다. 이 삶과 현실의 노래가 어느 날에는 마지막이 되기를, 바람이나 천둥소리처럼 뜻은 사라지고 뮤즈의 손끝에서 다만 연주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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