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허술한 짜깁기로 만들어진 불가해한 세계... 뮤지컬 '마마, 돈 크라이'
[윤진현 문화비평] 허술한 짜깁기로 만들어진 불가해한 세계... 뮤지컬 '마마, 돈 크라이'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1.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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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커처(caricature)’란 회화 영역에서는 주로 인물을 소재로 익살스럽거나 풍자적인 효과를 살린 그림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학 영역에서 ‘캐리커처’는 조금 더 복잡한 의미로 사용된다. 외적 형식은 놀랄 만큼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해당 장르의 존재 목적이나 미적‧역사철학적 의의 등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지 못하고 또 아무 데도 기반을 두고 있지 못하며 결국은 완전히 무의미하게 다만 오락거리로 존재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물론 극 분야에서 이러한 캐리커처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연극은 무대 위에서 실재하는 배우의 몸과 무대장치와 조명, 심지어 무대 그 자체로도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기에 텍스트로 환원되는 세계 외에도 공연에 동원된 온갖 요소로 관객을 만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이 뮤지컬의 외관을 갖고 있다면, 춤과 노래까지 포함되니 공연을 구성하는 그 수많은 요소들, 예를 들면 극적 사건, 미술, 음악, 무용, 배우 등 수많은 요소들 중 최소 한 가지는 관객과 만나 의미와 사유와 사랑과 보람을 제공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기에 공연에서 캐리커처를 만나는 것은 진실로 드문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무대 위해 구현된 세계가 인간의 그 어떤 요소와도 무관하고 무의미하게 오락거리로 존재할 때, 결국은 이를 ‘캐리커처’라고 칭할 수밖에 없다. 

<마마, 돈 크라이>는 2010년 초연되어 벌써 11년 성상을 견뎌왔다. 시간이란 가차 없는 평론가를 견디어내며 살아남은 작품이라면 그 자체로 얼마간은 경외의 자세로 만나는 것이 온당하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인지, 무엇을 봐야 했는지 오롯이 낭패스러울 뿐이었다. 최근 여러 작품을 두루 보면서 대단하다거나 가슴 벅찬 감동까지는 아니더라도 크든 작든 저마다 나름의 문제의식을 갖고 작품에 임하고 있다고 생각한 작은 믿음과 자부심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공연 분야에서는 웬만하면 떠올릴 필요가 없던 ‘캐리커처’라는 단어가 앞을 가로막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원론에서 시작하자. 공연이 제공하는 인간적 의미란 때로 거대한 역사나 심오한 철학과 연관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소소한 부드러움이나 사랑스러움 같은 순간적인 기쁨도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마마, 돈 크라이>에서 보여준 인물은 최소한의 인간적 개연성도 결여되어 있었고 배우의 연기는 부자연스러웠으며 가창력은 미흡하고 무대는 맥락 없이 요란하고 사건은 여기저기에서 온갖 화소를 끌어다 기워 붙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논리는 고사하고 그럴 듯한 가능성조차도 부족하다.

타임머신이란 시간을 넘어서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투사한 기계로서 탄생한 것이다. 타임머신을 발명했다는 상상은 시간을 지배할 수 있게 되면 인간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통찰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수많은 작품 속에서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인간의 문제는 시간을 넘나들 수 있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의 문제는 언제나 인간으로서 어떤 선택을 하고 행동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과거로 돌아가 어떤 후회되는 결정을 바꾼다고 해도 그 이후의 변화 역시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자, 그렇다면 프로페서V의 문제는 무엇인가? 메텔의 사랑이다. 타임머신을 발명했고 이제 과거로 가서 사랑을 성취하고 싶다면 차라리 사랑의 신을 찾아가는 것이 순리 아닌가. 아니 타임머신보다 차라리 사랑의 묘약을 만들어보는 것이 낫지 않은가? 천재 과학자 교수라면!

그런데 이 작품은 아프로디테가 아니라 오히려 ‘영원’이란 끔찍한 시간적 저주에 갇힌 드라큘라에게 찾아가 사랑을 이루려 한다. 시작부터 모순이다. 게다가 연극에서는 한 인물의 일방적인 욕망은 용납하지 않는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찾아온 자를 만난 드라큘라는 어떻게 행동할까? ‘영원’이란 시간 속에 갇힌 드라큘라라면 타임머신을 타고 온 자를 뱀파이어로 만들 궁리를 하느니 타임머신을 타고 자신이 뱀파이어가 되는 잘못된 선택을 한 순간으로 돌아가 과거를 되돌리고 싶지 않을까? 

물론 때로 인간은 어리석어서 인과를 잘못 판단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의 주인공은 말하자면 ‘천재’, 12살에 정규교육도 받지 않고 대학에 입학했고 15살에 교수가 되었다는 이른바 ‘프로페서(professor)’이다. 

이 인물은 모친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다. 부친을 잃고 모친이 울고 있을 때, “울지 마세요. 엄마, 착한 아이가 될게요.”라고 노래하는 데서 제목이 나왔다. 제목만 보면 기성세대와 불화하는 한 천재가 어떻게 이를 극복하거나 견뎌내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일 것 같다. 그러나 모친과 원만하지 못한 관계는 여타 여성과 제대로 관계 맺기를 하지 못하는 미숙한 인간으로 이어진다. 이에 절망한 ‘프로페서V’는 소개팅도 하고 스타일 개선의 노력도 기울이지만 결국 모두 실패하고 때맞춰 당도한 뱀파이어 잡지를 보고 뱀파이어가 되어 메텔의 사랑을 얻겠다고 결심하고 타임머신을 연구하여 15세기 루마니아로 가서 드라큘라를 만난다. 

V의 이상적인 여성이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메텔’이라는 설정도 어이가 없지만 이른바 ‘창작의 자유’란 것이 있으니 일단은 넘어가자. 우연찮게 타임머신을 만들어 가정용 전기를 이용해서 과거로 간다는 설정도 그냥 넘어가고 과거에서 드라큘라 백작을 만나 영원한 시간을 갖게 된다는 설정도 그렇다고 치자. 요컨대 기존의 다양한 작품에서 이것저것 떼어낸 요소들조차 허울 좋게도 혼성모방이나 오마주 따위의 미명 하에 답습하는 일이 적지 않으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다만 다시 인물에 대해 질문하자. ‘인물(character)’란 사건에 필연성을 부여한다. 애초 이 캐릭터의 특징은 ‘천재’, 하늘이 내린 빼어난 지적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더구나 15살에 교수가 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프로페서(professor)’로 삼은 자이다. 이런 자에게 ‘연애’라는 난공불락의 목표가 생겼다고 치자.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 같은가? 고전적으로 대학을 상아탑이라, 학문연구와 인재육성의 사명감이 있어야 교수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문제가 닥쳤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을 하늘에서 떨어지는 아무 연관성 없는 우연의 연속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물이란 인물의 막이 오르기 전부터 있어온 ‘인물의 시간’을 통해 설명되는 것이다. 그냥 단순한 천재가 아니라 ‘프로페서’라는 정체성을 제시한 바에야 읽고 찾고 실험하고 설명하고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드라큘라를 만나면 드라큘라 피를 연구해서 그 진실을 밝히려는 소동이 도리어 자연스럽지 않을까? 영원한 시간에 갇힌 존재라면 그 영원한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상과제로 삼는 것이 당연하듯이.

이들 등장인물의 형상화에는 심지어 일부 조롱과 혐오의 뉘앙스마저 없지 않았으나 이것이 의도된 것인지,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인 캐릭터의 구축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생성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드라큘라의 여성코스튬이나 여성에게 접근하는 프로페서V의 행동에는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고 인간에 대한 존중이 결핍되어 있다. 배우의 연기와 가창에서 실수가 잦은 점 또한 어쩌면 작품의 이러한 비인간적 측면이 영향을 미친 결과가 아닐까 의심스럽다.

연극이나 뮤지컬은 언제나 인간의 문제에 귀 기울이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해결하며 즐거워하는 장르이다. 특정 대상에 대한 지속적이고 집착적인 관심보다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책임과 진전을 내포한다. 연극, 뮤지컬의 관객들이 더 큰 시야로 공연에서 보여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함께하는 더 큰 사랑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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