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도식 너머 인간 변화를 기대하여... 뮤지컬 '레드북'
[윤진현 문화비평] 도식 너머 인간 변화를 기대하여... 뮤지컬 '레드북'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1.07.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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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북> 상연이 시작되었다. 2017년, 2018년에 이어 세 번째이다. 재능 있는 작가의 재미있는 작품이 거듭 공연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재공연이란 단순히 캐스트만 변경된 같은 작품이어서는 부족하다. 작품의 배우가 바뀌고 극장이 바뀌면 물론 일부 변화는 수반되기 마련이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를 들면 최은희의 ‘춘향’과 장미희의 ‘춘향’, 조여정의 ‘춘향’이 다르듯이, 인물의 성격은 배우와 결합되며 복잡하고 입체적인 현실성을 띠기 마련이다. 

더구나 공연은 회를 거듭하고 해를 거듭할수록 더 치밀해지고 더 높은 완성도를 성취해간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확정된 작품이 반복되는 영화와는 결정적으로 다르게 관객과 무대가 함께 성취하고 변화해가는 예술, 바로 공연예술이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수많은 작품들이 망작이라는 혹평을 뚫고 변신하면서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 여기에서 핵심은 공연이란 진화하는 예술이란 점이다. 

물론 이런 생각과 기대조차도 그런 기대가 가능한 작품에서나 제기될 만한 것이다. 
“괜찮다. 그러나 더 괜찮을 수 있다. 좀 더 생각해 봐라.”
<레드북>은 더 요구하고 싶은 작품이다. 

시대적 배경은 보수적이고 위선적이던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여성 안나는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지만 쉽지 않다. 이때 한때 시녀로 일했던 바이올렛 부인의 유산을 들고 바이올렛 부인의 손자인 변호사 브라운이 찾아온다. 안나는 브라운의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게 되지만 그녀와 일하는 것이 불편했던 브라운은 그녀에서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라고 권유하고 안나는 여성작가들의 잡지 <레드북>을 발견하여 여성문학회 ‘로렐라이 언덕’에 가입하여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쓴다. 그녀의 소설이 실린 잡지 <레드북>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이들에게 관심이 생긴 호색한 평론가 딕 존슨은 평론을 핑계로 안나를 추행하려 하지만 안나는 온 힘을 다해 저항한다. 그러나 비겁하고 사악한 딕 존슨은 안나의 작품을 ‘음란물’로 몰아 고소하고 안나는 추방될 위기에 처한다. 사랑에 빠진 변호사 브라운은 안나를 도와 이 위기를 극복하고 둘은 사랑에 성공한다. 

이 작품에는 한국 현대 문화계의 어두운 풍문, 성차별에서 추행과 폭행에 이르는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범죄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깔려 있다. 이 작품이 발표된 즈음부터 한국사회에 밀어닥친 ‘미투(me too)’ 이슈를 생각해보면 이 작품의 시의성 또한 중요한 장점 중 하나라 할 것이다. 

게다가 ‘젠더’ 문제는 여성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지난한 문제다. 설득과 변화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인간과 평등을 중심에 둔 새로운 가치의 정립과정을 요구한다. 이것은 목소리 높이는 선언이나 순간의 결단으로 충분하지 않다. 지루하고 디테일한 일상의 변화를 수반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즉 오늘의 성차별 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성과 남성의 연대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브라운의 협력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레드북>의 서사는 하나의 정답을 품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극적으로 제기하는 이유는, 문제를 해결하는 정답을 간명하게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의 성차별 문제는 남녀의 협력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대답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정답이라 오히려 답 같지 않다. 답을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누가 모르냐? 그러니까 어떻게?’라고 다시 힐문할 만하지 않은가?

무대 위에서 인물의 행동을 통해 답을 찾는 극적 문제는 인간의 실천을 선제적으로 가늠할 수 있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너무나 재능 있고 매력적인 안나에게 공감하고 함께 분노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안나를 도울 것이냐? 즉 브라운의 변화이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납득하기 힘든 초강력 에너지이므로 브라운이 안나를 사랑하여 그녀를 힘껏 돕는 것은 그 자체로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역시 충분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기나긴 성차별의 역사를 남녀가 함께 이겨낸다고 할 때, 우리는 돌연한 사랑의 힘에 의해 개별적이고 예외적으로 극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사례들이 쌓여가기만 해도 중요한 기반이 된다. 그러나 이때 스포트라이트는 ‘사랑’, 위대한 ‘사랑’이 받게 된다. 말하자면 안나가 위기를 극복하고 성공한 것은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빠진 조력자 브라운이 있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평범한 소위 ‘신사’ 브라운은 어떻게 ‘안나’를 돕게 되었을까? 사랑은 위대한 것이지만 한 사회의 보수적 기준에 도전하는 진보적 가치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랑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가치’는 설득과 동의를 통해서만 확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듯 중요한 철학적 변화를 동반하는 지난한 설득과 동의의 과정은 대체로 자신과의 깊이있는 대화를 통해 가능하다. 

브라운에게는 이미 이를 가능하게 하는 설정이 있다. 할머니 ‘바이올렛의 서사’이다 일찍이 미망인이 되어 사랑하지도 받지도 못하던 세월, 안나의 조언으로 정원사와 사랑하게 된 바이올렛은 말년을 행복하게 산다. 이것을 정원사의 방문과 같은 뻔한 방식으로 양념에 그치게 할 것이 아니라, 다만 욕구불만이었던 할머니가 사랑이 충족됨에 따라 원만하고 순한 성격으로 변화했다는 한정된 설명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어떤 감정이고 어떤 행동인가를 브라운 스스로 찾아내는 과정으로 동반되었다면 어땠을까? 자신에게 이미 있었던 사실을 깨닫고 이로부터 일상과 성격의 다양한 측면이 조정되면서 세상과 사물을 보는 시선이 변화하는 중요한 과정이 필요하다. 인물 성격의 개연성으로 보면 사랑에 빠져서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변했기 때문에 다른 인간적 매력을 깨닫고 다른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안이한 브라운의 성격은 이 작품을 그저 ‘잘 만들어진 연극(well-made play)’의 도식에 머물게 한다. ‘잘 만들어졌다’니까 칭찬으로 알 수도 있지만 이는 형식만 남고 인간을 위한 성취에는 이르지 못한 작품을 가리킨다. 변죽만 울린 로맨틱 코미디에 머물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소재와 재능 있는 음악, 재간 있는 배우들로, 한 발 더 나아가고 싶지는 않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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