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살아있는 자는 살았으니 죽은 자의 죽음을 생각하자,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윤진현 문화비평] 살아있는 자는 살았으니 죽은 자의 죽음을 생각하자,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1.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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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프로젝트그룹 일다

2019년 초연되었던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가 국립정동극장 무대에 다시 올랐다. 프랑스의 작가 마일리스 드 케랑갈의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1인극으로 교통사고를 당한 한 청년의 심장을 24시간 동안 다른 심장병 환자에게 이식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원작 소설은 기본적으로 심장을 따라가는 카메라 시점을 전지적 시점과 결합한 작품으로서 생명 행위로서 ‘장기 이식’을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행위를 아름답게 여기고 소생의 가망이 전혀 없는 뇌사 상태의 인간에게서 장기를 적출하여 다른 생명을 살리는 일을 고귀하다고 느낀다. 당연하지만 우리는 생명을 죽음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생명을 살리는 것을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로 여기므로 이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일일까? 죽음에서 생명을 만들어내는 눈물겨운 여정에서 살아있는 심장의 주인이었던 청년 시몽 랭브르의 감정과 상황, 그를 보내는 연인과 부모와 이웃들의 후회와 절망과 인간애,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의료진과 장기이식 코디네이터의 노력, 심장을 이식 받은 환자 등 수 많은 사람들의 상황과 상태, 감정과 이성과 판단의 추이를 따라간다. 그러면서 역설적이게도 살아난 자의 생명을 순수하게 예찬하기보다 한 사람을 살리고 수선하기 위해 단시간 내에 해치워야 하는 비인간적인 잔인한 결정의 연속을 숨죽이고 바라보게 된다.

심장의 원래 주인 시몽 랭브르는 19살의 건장한 청년이다. 그는 위험한 서핑을 즐기고 건강한 신체만이 감당할 수 있는 스릴과 모험을 만끽한다. 이는 모두 펄떡펄떡 뛰는 그의 심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시몽에게 불의의 교통사고가 닥치고 우연하게도 뒷자리에서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있던 청년은 앞자리로 튕겨 나가 결국 뇌사(腦死)에 이른다. 뇌 활동이 정지되어 이제 시몽의 죽음은 불가역적이다. 그러나 심장을 비롯한 그의 신체, 그의 장기는 아직 죽지 않았다. 살아있는 신체 기관을 해당 기관에 문제가 있는 이들에게 이식하여 타인의 생명을 연장한다는 대의가 도전적으로 인물들과 관객 앞에 제기된다.

사진 ⓒ 프로젝트그룹 일다
사진 ⓒ 프로젝트그룹 일다

  

죽음을 규정하는 ‘뇌사’라는 새로운 기준은 장기 이식이라는 획기적인 의료행위를 가능하게 만든 혁명적인 발상전환이었다. 뇌가 활동을 정지하여 죽음은 확정되었으나 아직 심장이 뛰고 있는 짧은 시간, 모든 일은 결정되어야 한다. 이 사태에 직면하는 이들의 일상은 대단히 평범하다. 의사의 피로와 간호사의 로맨스, 코디네이터 등의 평온한 아침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돌연하게 닥쳐오는 죽음 앞에서 절망하는 시몽의 부모와 연인과 이웃과의 격렬한 대조는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더구나 의료진은 망자의 가족을 설득해 장기 적출에 동의하게 만들어야 한다. 살아있는 자들에게 대단히 침착하고 인간적이지만, 동시에 망자의 거부 의사가 없는 한 이식을 강행할 수 있다는 의료법의 조문을 숨기고, 짧은 시간 피 마르게 재촉하는 극단적인 결정을 아직 심장이 뛰고 있는 자식의 부모에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아직 심장은 살아있으나 뇌는 죽은 인간이 있다고 치자. 전통적으로 이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유족 입장에서 가족의 죽음은 사망 후에도 긴 시간을 거쳐야만 수용 가능한 일이다. 곧 사망할 것이 확실하다고 해도, 심지어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서도 방문 너머 익숙한 공간에서 끝없이 마주치는 망자의 모습은 금세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더 간단히 비유할 수도 있다. 입장을 바꾸어서 내가 시몽이 되어 누워있다면 나의 심장이나 간, 폐, 안구 따위를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결정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소중한 가족의 유품이 있는데, 누군가 꼭 필요하다고 어서 달라고 재촉하고 있다면 쉬이 동의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소설을 연극으로 만든다면 가장 주목해야 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갈등은 다른 이를 살린다는 대의로 무장한 의료진과 자식과 연인을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는커녕 그게 무엇인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의 입장 차이이다. 연극의 갈등은 관객에게는 진지한 판단과 결정을 요구하는 실재하는 삶의 문제이다. 죽느냐? 사느냐?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나 만날 가능성이 있는 다양한 문제제기를 우리는 충분히 생각하고 진지하게 토론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유족과 마찬가지로 관객은 이 갈등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할 시간이 없다. 심장은 곧 시몽을 떠나 다른 이의 몸에 이식되고 부작용 없이 무사히 심장을 뛰게 될 때, 관객은 저도 모르게 안도하며 다행이라 기뻐한다. 그리고 극장을 나서면서야 시몽의 부모가 겪을 고통을 뒤로 한 채 수혜자의 생존을 해맑게 기뻐했다는 사실에 새삼 가책을 느끼게 된다. 

2019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공연사진 / 사진 ⓒ 우란문화재단, 프로젝트그룹 일다
사진 ⓒ 프로젝트그룹 일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우리는 생명을 존중하고 소중히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인데! 그러고 보니 ‘수선하다(Réparer)’라는 비인격적 표현이 눈에 들어온다.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시스템이다. 요컨대 불과 10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불가능한 수술을 해내는 지난한 과정이 다만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성과인 것이 아니라 시몽을 인격적으로 생각하기 어렵도록 세세하게 분산된 수많은 인간들의 역할 덕분에 가능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선 심장 이식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뇌사’라는 새로운 기준의 정립이었다. 그리고 ‘뇌사’를 판정한 환자의 주치의는 장기 적출 수술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환자를 돌보던 의료진에게 장기를 적출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할 수 있다는 것일까? 장기의 적출과 이식의 과정을 주도하는 것은 전문 코디네이터이다. 그러면서 정작 적출수술은 장기를 필요로 하는 의료진이 찾아와 직접 집도한다. 이들에 대한 과하게 세밀한 히스토리의 소개는 그들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움직임을 멈춘 망자를 잊고 그의 시신을 대상화하는 과정인 듯하다. 기증자의 부모는 수혜자를 궁금해 하고 수혜자는 기증자를 궁금해 하지만 심장이 인격화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인간적 감정은 생존에 불필요하거나 위험하므로 모두 은폐된다. 생명의 일부이되 수선의 대상이 되고 마는 이 깊은 균열을 우리는 계속 당연하게 내버려두고 수혜자의 생존을 기뻐하는 것으로 덮어두어도 좋은 것일까?

기이하게도 이러한 문제의식은 작품이 끝나고 극장에서 한참 멀어지고서야 비로소 분명해졌다. 이렇듯 상식적인 문제제기조차도 지연되는 상황은 이 작품이 모노드라마라는 사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소설에서도 장황하고 구구하며 세세한 여러 인물에 대한 묘사가 인간을 수선의 대상으로 삼는 내포로부터 미끄러져 마치 우리는 이 만큼 인간에 관심이 깊이 있다는 점을 과시하는 듯하지만 공연에서는 더 한층 빨라진 속도와 1인극이란 일방적인 메시지 발신 방식 때문에 더욱 더 강화된다. 

본래 1인극은 배우의 연기력이 중심이다. 그러면서 모든 시선은 단 한 명의 배우에 집중된다. 더구나 이 작품의 엄청난 대사와 장면 및 배역의 빠른 전환은 그야말로 거대한 파도를 타듯 깊은 사유의 시간 없이 미끄러져 지나게 만든다. 물론 장편소설을 사실상 통째로 들려주는 엄청난 대사량도 놀랍거니와 무려 16개의 배역을 소화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소화하는 배우들의 역량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관객은 배우의 이 현란한 연기에 집중하느라 정작 무엇을 보았고 무엇이 자신들 앞에 던져진 것인지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 만약 여러 배우가 각 인물을 보여주었다면 우리는 인물과 인물 사이에서 이들이 처한 현실과 일상과 인간적 결정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비인간적인 회피의 측면을 통찰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살아있는 자는 무사히 수선을 마친 듯하다. 하여 지금부터 시몽과 시몽을 잃은 자들의 입장에 대해서도 조금 더 생각하고자 한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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