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아버지를 죽이고 떠나는 길의 방향,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윤진현 문화비평] 아버지를 죽이고 떠나는 길의 방향,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1.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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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과수원뮤지컬컴퍼니
사진 ⓒ 과수원뮤지컬컴퍼니

 

‘까라마조프 형제’를 ‘뮤지컬’로 만들었다! 이것은 대단한 용기이다. 아니 무모함이다. ‘뮤지컬’이 어떤 장르인지 안다면, 그리고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까라마조프의 형제>가 어떤 소설인지 안다면 이 두 단어의 조합에서 느끼는 기대에 얼마간 황당함이 섞여있다고 해도 이해할 것이다.  

‘뮤지컬’이란 음악과 노래로 만들어진 극이다. 당연하지만 그래서 줄거리는 단순하다. 예를 들어 ‘사랑한다’는 대사로 구애중이라고 해보자. 연극에서는 1분 내외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뮤지컬’에서는 이를 노래로 표현해야 하므로 최소 5분은 필요하고 서로 화답하며 이중창으로 이어지며 절정에 이르는 전개라고 치면 20분도 부족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사건으로 요약하면 다만 ‘사랑의 고백과 기쁨’ 정도이다. 음악과 노래를 중심으로 길고 복잡한 줄거리를 다루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소설 <까라마조프의 형제>와 비슷하게 견줄 만한 규모의 작품이라면 빅토르 위고 원작의 뮤지컬 <레미제라블> 정도를 예를 들 수 있을 뿐인데, 이 작품에는 동원되는 인물의 수는 기백명에 이르고 상연시간도 평균 3시간 이상이다. 이 작품은 소설의 복잡하고 다성적인 언술을 많은 인물과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음악적 입체성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단순 비교가 불가능한 비용과 역량의 영역이다.  

최근 대학로에서 상연되는 소규모 뮤지컬의 경우, 대체로 5명 이하의 등장인물로 꾸려지며 러닝타임은 100분 이내가 일반적인 만큼, 작품 나름이라고는 해도 300~400면 규모의 웬만한 장편소설의 각색조차 만만치 않다. 하여 국내 번역본 기준 1,200면 이상의 대작 <까라마조프의 형제>는 뮤지컬이 아니라 일반 연극으로 각색한다고 해도 보통 일이 아니다.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모험정신을 일단 칭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진 ⓒ 과수원뮤지컬컴퍼니

물론 그럼에도 이 위대한 소설을 연극으로 재편하려는 시도는 이미 1910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부터 있어왔고 그때 쓰여진 자크 코포의 각색 작품은 우리나라에도 1982년 극단 신협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소개되었었다. 이 작품은 러닝타임 3시간의 대작으로 당시 평단의 호평과 지지를 받으며 여러 번 재상연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 또한 소설 <까라마조프의 형제>의 위대성을 충분히 그려냈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까라마조프의 형제>의 위대성은 말 그대로 ‘소설적 위대성’의 영역에서 구현되는 바, 이를 극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매우 복잡하고 창의적인 미적 변환과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과정에는 정답이 없다.

근대 이후 정립된 인간의 내면에 대한 치열한 통찰과 형상화를 주요 목표로 삼고 있는 근대 노블(novel)의 미학적 목표와 사건을 중심으로 다양한 해결방식을 고민하는 드라마의 미학적 목표는 모두 인간적이지만 핵심은 아주 다르다. 빼어난 원작 소설의 성취를 각색한 드라마에서 느낄 수 없어 실망하는 일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심지어 빼어난 소설을 빼어난 드라마로 만드는 요령은 아직 정립되어 있지 않다. 여전히 각색의 성패가 작가의 역량에 좌우된다는 뜻이다. 이는 때로 순수한 창작과정을 능가하는 예술적 역량을 요구한다. 고통스럽고 지난한 시간이 필요하다.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과수원뮤지컬컴퍼니의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그런 의미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covid19로 엄혹한 공연환경이지만 이미 지난 3월부터 3개월 이상 공연을 이어가고 있는 점도 대단하거니와 2018년 초연된 이래, 벌써 3번째 공연이면서도 뮤지컬 관객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어내고 있는 점도 대단하다. 그러나 관객의 주목을 받는 작품이란 이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가야 할 의무가 있는 법이다. 2018년 공연에 비해 음악적 표현이나 배우의 기량은 놀랄 만큼 성장한 터라 이제는 이 작품의 인문학적 의미와 극적 해석에 대해서도 첨언할 수 있을 듯하다. 

하나의 작품이 대중들에게 두루 관심을 받아 롱런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성공은 무엇 때문일까? 뮤지컬 공연계를 염두에 두면 이 작품의 성공은 사실 조금 기이하게 보인다. 대중적으로 인지도 높은 스타 배우가 총출연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애가 빛나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스토리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겨주는 것도 아니다. 너무나 큰 대작을 각색한 것이기 때문에 소설 <까라마조프의 형제>를 정독한 사람이 아니라면 소설 속의 어떤 장면을 대사로 구성한 것인지도 모호하고 심지어 가사의 전달이나 사건 이해가 용이하지 않은 부분까지 있다. 

사진 ⓒ 한국증권신문 DB

관객 입장에서 분명한 것은 한 가지이다. 아버지 표도르가 있고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스메르쟈코프라는 네 아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 중 하나가 아버지를 죽였다. 누가 아버지를 죽였는가? 자식들은 모두 아버지와 갈등하고 있어서 모두 다 혐의가 있다. 드미트리가 제일 의심스러웠지만 범행을 부인하고, 이반도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했으나 알리바이가 있고, 알료샤는 수도사이기 때문에 그럴 리 없고, 결국은 스메르쟈코프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자복한다. 스메르자코프는 죄를 인정하고 자살한다. 사건을 정리하고 보니 이 작품은 일종의 수사드라마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관객은 스스로 수사관이 되어 인물들의 진술을 판단하고 결론을 내린다고 볼 수 있다. 간단하고 명료하다.

‘까라마조프’를 이렇게 단순하게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단순, 명료함 덕분에 되다 만 수사물 같은 ‘브라더스 까라마조프’가 인기를 모으면서 대중적으로 성공한다고 대답할 수는 없지 않은가. 

최근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갈등 중 하나를 꼽는다면 ‘세대 갈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세대갈등’이란 것은 유사 이래로 언제나 있어왔다. 패트리사이드(patricide, 殺父)의 욕망이란 신화적으로 보면 제우스가 아버지 크로노스를 제압하여 무간지옥에 가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를 현실적 언어로 해석하면 무한한 시간(크로노스)을 아들 제우스는 아버지 신으로서 자식을 낳고 대를 이어가는 가부장제란 방법을 통해서 극복한다는 의미이다. 즉 신화적인 의미에서 젊은 세대는 언제나 기성세대를 제압하고 새로운 세계의 주인으로서 왕좌를 차지하기를 욕망한다. 드라마에서 젊은이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기성세대는 언제나 반동인물이기 마련이고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기성세대는 언제나 패배하고 몰락한다. 이것이 신화의 역학관계 연극에서 재현되는 방식이다. 평범하고 보수적인 현실에서는 대체로 이 정도 형식으로 갈등관리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 새삼스러울 것 없는 당연한 갈등이 새삼스럽게 사회 전면에서 강조되는 것은 이상하다. 한 사회에서 패트리사이드의 욕망이 문화적으로 전면에 드러난다는 것은 그만큼 세대간 갈등이 심화되고 세대교체의 요구가 점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진 ⓒ 한국증권신문 DB
사진 ⓒ 한국증권신문 DB

<까라마조프의 형제>가 지닌 위대성의 하나는 역사적 격변을 원형적 갈등 위에서 보편적으로 형상화해냈다는 점이다.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고 역사적‧종교적‧문화적으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던 대격변기에, 낡아빠진 시대의 추악한 표도르란 인물이 지닌 집요하고 강인한 생명력과 완전히 다른 성격과 직업을 가진 그의 네 아들이 공통되게도 아버지의 죽음 또는 아버지의 소거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이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격렬하면서도 대단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설파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 도덕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이들이 선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은 인간인가를 판단하기 이전에 이 작품을 통해 독자는 아버지와 갈등하고 아버지를 제거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는 자식들의 시간을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이는 단순히 표도르가 부도덕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아들 드미트리나 이반 또한 모순되고 비인간적인 까라마조프적 품성의 계승자로서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의 힘을 강렬하게 느끼고 있지만 마성적인 드미트리나 이성적인 이반은 고사하고 고귀한 신성의 세계에 귀의한 알료샤조차도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과 가치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판단을 확언하지 못한다. 과거에 대한 판단과 평가가 중요한 것은 이를 지침 삼아 미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비판할 때, 이 기준에 미래의 가치가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부친살해를 실행하는 스메르쟈코프의 원시적 행동력 앞에 작중 인물과 독자가 동시에 느끼는 당혹감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스메르쟈코프 역 박준휘 / 사진 ⓒ 한국증권신문 DB
스메르쟈코프 역 박준휘 / 사진 ⓒ 한국증권신문 DB

과거의 표상으로서 표도르는 제거되었고 드디어 까라마조프 집안에는 변화의 계기가 생겼지만 이를 실행한 스메르쟈코프는 자살해 버리고 남은 형제의 미래도 확실치 않다. 즉 변화의 계기가 반드시 변화의 방향과 가치를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인식에 도달하는 순간, 등장인물과 독자들은 공동의 책임감과 무력감을 동시에 절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컨대 이 작품은 역사적 격동기의 격렬한 변화를 신화적인 부친살해의 화소를 통해 적극적으로 형상화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결단이 새로운 세계의 가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세대교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이들이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를 준엄하게 질문하고 있다고 하겠다. 

위대한 고전을 누리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범인찾기와 같은 간단한 방법으로 첫 발을 떼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거니와 이것이 계속 의미가 있으려면 두번째 발걸음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도 누구든 알 일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나서 자식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같은 자리에서 죽을 것인가? 헤맬 것인가? 목표를 세울 것인가? 소설에는 약자에게 저지른 폭력을 반성하고 사과하는 간단한 에필로그가 있다. 까라마조프의 형제가 더 나은 삶을 위해 해야 할 실천이 무엇인가를 암시한다고 보아도 좋다.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또한 더 나은 작품을 위해 다음 걸음이 이어지길 희망한다.   

 

윤진현

윤진현(Yun, Jinhyeon)

연극평론가

 

인하대 국어국문학 박사

인하대 프론티어학부 강사
 

 

윤진현(尹振賢) 연극평론가는 인천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지역문화 운동을 펼치고 있다. 드라마와 문화콘텐츠의 변용에 대한 '신화와 드라마, 극적 상상력으로 고전 다시 쓰기'등의 강의를 통해 지역사회에 감춰진 진주와도 숨은 작가를 발굴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윤진현은 인하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는 <이순신과 영웅의 쇄신><김재철과 조선연극사><애니메이션 삼국지의 종류와 변용>등이, 저서로는 <행복한 인천연극> <풍경, 함세덕> <조선 서민국의 구상과 탈 계몽의 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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