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추리소설 ‘천재들의 비극’] 제49화 -생사를 건 결투
[과학추리소설 ‘천재들의 비극’] 제49화 -생사를 건 결투
  • 이상우 언론인·소설가
  • 승인 2021.05.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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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열어 보았으면 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거기서 커피 한 잔씩을 마시고 일어섰다.

“여기서 혜화동 쪽으로 조금 가면 파전 잘하는 막걸리 카페가 있어요. 어떠세요?”

“막걸리 집이 아니라 카페?”

“예, 막걸리도 이제 세련되었어요.”

한영지는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앞장서서 걸었다.

“자동차는 안 가지고 왔나?”

“예. 내부 청소 좀 맡겼어요. 전번에 친구를 태웠는데 향수를 쏟는 바람에 차 안이 온통 향수 냄새로 가득 차서 머리가 아팠어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냄새가 재스민 향이거든요. 그 냄새만 맡으면 골이 아파요.”

뭐야?

재스민 향수를 맡으면 골이 아프다고?

그럼 내가 그 차를 탔을 때 재스민 향수 냄새가 난 것이 그것 때문이었어?

대략난감.

바로 이럴 때 맞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그 선물을 취소할 테니 도로 돌려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막걸리 카페는 현대식으로 세련되게 인테리어를 한 집이었다.

드럼통 대신 원목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이 집 막걸리는 아저씨가 직접 담근대요. 맛이 괜찮아요. 파전도 일품이고요.”

한영지는 혼자 설명하면서 주문까지 했다.

내 의견은 전혀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만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재스민 향수 선물로 신경 쓰느라 한영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선생님이 대본 고치면서 베드 신을 모두 야외에서 스킨십 하는 걸로 바꾸어 놓으셨던데 그거 정말 잘 고치셨어요. 사실 저는 조연하는 그 빼빼 마른 남자 배우와 섹스 흉내 내는 것이 끔찍했거든요.”

사실 나도 한영지가 비록 연극이고 흉내 내는 것이지만 다른 남자와 정사를 갖는 것이 싫어서 대본을 고쳤던 것이다.

“맞아. 그게 극의 흐름과는 전혀 관계없는 관객 눈요기용 장면이었던 것 같아.”

“맞아요. 뮤지컬의 품위 문제도 좀 있어요.”

“영지는 진짜 베드신 해본 경험이 없나?”

나는 궁금하던 것 중의 하나를 물었다.

한영지가 많은 남자를 거느리던 날라리라고 한 오민준의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사생활에 관해선 노코멘트.”

한영지가 정색을 했다.

“아, 미안.”

나는 머쓱해서 막걸리 잔만 들이켰다.

“버지니아 시절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어. 언니는 세 남사친과 그 뒤 어떻게 되었지?”

나는 한수지와 오민준의 스토크 문제는 제쳐 두고 다른 궁금한 것을 물어 보았다.

한수지의 남자 친구들의 명예 결투 결과를 알고 싶었다.

만약 세 남자 중에 범인이 있다면 그들의 명예결투와 관련이 있을 것이었다.

세 번째 궁금증은 한영지 어머니의 애정 세계였으나 그것도 다음에 물어 보기로 했다.

한영지를 만날 일이 많은 것은 마치 재산이 늘어나는 것처럼 나를 흐뭇하게 했다.

“아, 그 오빠들 이야기 말이죠. 오빠들은 언니 몰래 마침내 일을 저질렀어요. 선생님, 이건 진짜 소설 감이에요.”

영지가 열을 올렸다.

한영지의 이야기를 요약해보면-.

두 차례에 걸친 명예 결투는 결국 승패 없이 끝났다.

영어 단어 이어 쓰기와 수학 문제는 모두 뛰어난 수준이라서 출제자가 손을 들 정도였다.

한수지는 동창회장의 송년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유성우와 권익선은 나란히 참석 했는데 오민준은 가지 않고 한수지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한수지가 하와이로 여행을 떠나버려 만나지 못하고 한영지와 함께 크리스마스 쇼핑만 다녀왔다.

한영지는 오민준을 싫어하지는 않았으나 언니의 남자 친구라는 생각 때문에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오민준은 한영지한테 한수지 못지않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동창회장 주최 파티에 참석한 유성우와 권익선은 악수를 하면서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성우야, 우리 얘기 좀 하자.”

언제나 적극적이고 말이 많은 권익선이 먼저 유성우를 불러내 파티 장 밖으로 나왔다.

알렉산드리아의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젖어 오색 네온사인으로 휘황찬란했다.

“칠면조 고기 안주해서 와인 한 잔 하자.”

권익선의 제의로 두 사람은 와인 바에 들어갔다.

“너, 한수지 포기해라.”

권익선이 와인 한 잔을 마시자마자 불쑥 말을 꺼냈다.

“절대로 안 돼. 너야말로 포기해라.”

“한수지가 나를 더 좋아하는데 너는 비겁하게 둘러붙어 있는 것이 창피하지도 않아?”

권익선의 도발에 유성우가 벌컥 화를 낼 것으로 예상했지만 의외로 침착했다.

“혼자서 그런 결론에 도달했냐? 그럼 본인 앉혀놓고 찍으라고 할까?”

“한수지가 누구니? 그런 바보 놀음에 응할 것 같아?”

“한수지가 누구를 좋아하는가는 본인에게 맡기기로 하고, 누가 한수지 곁을 떠날 것인가를 정하자.”

“또 결투를 하자고?”

유성우가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말라는 태도를 보였다.

“전번처럼 그런 시시한 결투 말고 이번에는 두 사람 중 한사람이 사라지는 결투를 하자.”

“사라지는 결투?”

“응.”

권익선도 담담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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