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추리소설 ‘천재들의 비극’] 제24화- 썸 타는 시간
[과학추리소설 ‘천재들의 비극’] 제24화- 썸 타는 시간
  • 이상우 추리작가협회 이사장
  • 승인 2020.1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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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지의 살인범은 토머스 제퍼슨 기술고등학교 동창생 남자 셋 중에 범인이 있을지 모른다는 나의 생각은 날마다 굳어져갔다.
그러면 세 남자 중 한수지와 진짜 사귄 동창은 누구인가?
유성우는 자기가 애인이었다고 서슴없이 표현했다. 
그리고 실제로 한수지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 같았다.
국립 바이오 연구소의 권익선, 그는 노골적으로 오민준이 범인이라고 찍는다. 
그러면 한수진이 사랑한 남자는 누구인가?
참으로 알쏭달쏭하다.
내가 고심하고 있을 때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추리 작가님이시죠? 저 영지예요. 한수지 동생 한영지.”
한영지는 한 번도 본 일은 없지만, 하도 많이 들어서 낯익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요? 반갑습니다. 그런데 웬 일로 전화를 다...”
“어머니가 바이오 컴퍼니에 연락해서 선생님 전화번호를 알고 있더군요. 좀 뵈었으면 해서요. 언니 일도 있고 해서...”
정말 뜻밖이었다.
“좋아요. 언제 어디서 만날까요?”
“지금 어디 계세요?”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책을 좀 고르고 있는데...”
“그러면 30분 뒤 윤동주 옆에서 만나요.”
“예? 윤동주라니...”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 소공원 벤치에 가면 윤동주가 있어요. 그럼 있다가 봐요.”
어떻게 보면 당돌한 여자지만 밉지는 않았다.
나는 신간 소설 몇 권을 사서 백팩에 넣고 지하도를 건너 소공원으로 갔다.
윤동주의 시가 있는 벤치의 동상 옆에 여자가 앉아 있었다.
단발머리에 어깨가 푹 파인 연두색 라운드 티셔츠와 흰 핫팬츠의 여자였다.
긴 목에는 흰 머플러가 하늘거렸다.
옆얼굴만 보아도 굉장한 미인이었다.
한수지와 미모를 다툴 정도였다니까.

“안녕 하세요.”
내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가서 여자의 등 뒤에서 속삭이듯 말했다.
“선생님. 정확하게 30분 지키셨네요.”
여자는 뒤로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선생님은 훨씬 젊어 보여요.”
훨씬 젊다니, 비교할 게 없는데 그런 어법을 쓰는 것도 이상하지만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러나 여자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보고 있었다.
셀프 촬영 모드를 잡고 있으니 핸드폰이 거울이 아닌가.
나는 여자 옆에 앉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영지예요.”
여자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얼떨결에 여자의 손을 잡았다.
‘아!’
나는 탄성을 지를 번했다.
부드럽고 짜릿했다.
여자의 손은 나에게 이상한 전율을 느끼게 했다.
아니 전율이 아니라 상쾌한 전류가 짧게 흐르는 것 같았다.
십 수 년 전 아내 엄정현과 처음 만났을 때 느낀 그 전류였다.
나는 갑자기 심장이 꿈틀거렸다.
얼굴을 마주 보았다.
꼭 어디서 본 것 같은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름다웠다.
커다란 눈과 작은 입술, 뾰족한 턱이 아내와 비슷했다.
“선생님 .”
“예.”
“저를 위해 시간을 얼마나 내 줄 수 있어요?”
다시 독특한 어법이다.
“원하는 만큼 낼 수 있어요. 작가는 언제나 시간이 자유랍니다.”
내 말이 약간 떨리지나 않나 하고 내가 걱정을 했다.
왜 일까? 
왜 이 여자가 나를 사로잡을까?
“그럼 됐어요. 내차로 조용 한데 가서 이야기 좀 해요.”
영지가 일어섰다.
키가 거의 나만하다. 
나도 남자치고 작은 키가 아닌데, 그러고 보면 엄청 늘씬한 키다. 
핫팬츠 아래로 쭉 뻗은 다리가 환상적으로 멋있다.
나는 영지를 따라 공원 옆 골목에 세워둔 검정색 그랜드 카니발 차로 갔다.
“차가 크네요.”
내가 운전석 옆에 올라타면서 말했다.
차에서는 재스민 향내가 은은하게 코를 자극했다. 
여자의 차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연극을 하자니까 가지고 다녀야할 의상이나 도구가 많아서요. 차가 좀 지저분해요.”
영지는 나를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콧등에 잔주름이 잡혔다.
귀여웠다.
“자유로 쪽으로 달리면 어떻겠어요. 차안에서 이야기하면 참 좋아요. 누가 들을 염려도 없고, 경치를 내다보면 서로 표정을 읽느라고 신경 쓸 것도 없고요.”
처음부터 느낀 것이지만 정말 화법이 독특하다. 
아니 신선하다.
“언니 일은 참 안 됐습니다. 전번에 집에 간 일이 있거든요. 어머님만 뵈었지만...”
내가 먼저 한수지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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