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평 시사논평] ‘사주(四柱)’가 센 민족- 영웅 살라딘을 배출한 쿠르드 족
[양문평 시사논평] ‘사주(四柱)’가 센 민족- 영웅 살라딘을 배출한 쿠르드 족
  • 양문평 고문
  • 승인 2019.10.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주(四柱)가 세다“는 말이 있다. 좋은 말은 아니다. 사주는 사람이 태어난 년 월 일 시를 바탕으로 하지만 통상 ‘운수(運數)’와 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두 단어의 쓰임새는 다소 다르다. 운수라는 말에는 운수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이 공존한다. ‘운수대통’이란 말은 흔히 쓰이는 말이다.

하지만 사주란 말은 대부분 부정적으로 쓰인다. 어떤 사람이 턱없이 출세하거나 횡재를 하면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는 해도 ”사주가 좋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가 턱없이 불행을 당하면 ”그 사람 사주가 좋지 않다더라“는 말은 자주 쓰인다.

사주가 세서 불행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여러 모로 괜찮아 보이면서도 잘 풀리지 않는 사람이다. 따라서 타고나기를 불구나 허약하게 생긴 사람, 유난히 머리가 나쁘거나 추하게 생긴 사람들은 아예 ”사주가 나쁘다“는 말도 들을 자격이 없다. 대체로 몸이 멀쩡하고 인물도 좋은 데다 머리가 나쁘지 않아 학벌도 좋은 사람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들이 곧잘 사주 탓을 듣는다.
사주는 개인만이 아니라  민족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다.

최근 미국에 버림받아 수백 년에 걸친 고난의 행진에 다시 나서야 하는 쿠르드족을 볼 때 새삼 ‘사주가 센 민족’이라는 말이 머리를 스친다. 물론 그것은 생년월일시와는 무관한 ‘사주’다. 쿠르드족은 사람으로 치면 ‘건장한 민족’이다. 통상 ‘건장하다’는 말의 가장 큰  기준이 몸집이라면 한 민족의 건장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 민족의 숫자라 할 수 있지 않는가?

쿠르드 족은 사주가 험해서 정확한 인구도 알려지지 않았으나 4000만 안팎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구 4000만이면 세계 35위인 수단(4200만)보다 아래고 36위인 이라크(3900만)보다 위다. 그 아래에는 폴란드 캐나다 사우디 말레이시아 등 한다하는 나라들이 포진하고 있다. 네덜란드처럼 작은 선진국의 인구는 2배 이상 웃돈다.

사람이 몸집이 건장하면 얼마나 좋은가? 머슴으로 쓰이건 사원으로 쓰이건 건장한 몸은 환영받는다. 하지만 그런 몸집도 사주가 세면 행운이 아니라 눈물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몸집이 크고 건장해 폭력배 같은 것으로 풀려 신세를 망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쿠르드 족의 경우 가장 큰 비극은 나라가 없는 것이고 나라를 가질 수 없게 된 가장 큰 원인이 바로  그 큰 몸집이다. 4000만이나 되는 인구가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란 등 4개국에 걸쳐서 살고 있기에 그들이 나라를 가지려면 그 4개국이  국토를 쪼개 줘야할 판이니 오늘날 세계에서는 잠꼬대 같은 소리다.

한 나라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하기도 힘든 판에 4개국을 상대해야 하니 얼마나 절망적인가. 그렇다고 그 가운데 한 나라에서만 독립을 하기도 어렵다. 한 나라에서 쿠르드 족이 독립하면 다른 나라의 쿠르드 족도 독립하려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어서 인접국들이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며 그 나라를 도우려 든다.

한마디로 쿠르드 족이 살고 있는 나라들은 이웃나라의 쿠르드 족 독립도 ‘남의 일’이 아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도 터기 군이 자기 나라가 아니라 시리아에 거주하는 쿠르드 족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쿠르드 족이 거주하는 그 4개국은 이웃들이 흔히 그렇듯 수만 가지의 갈등을 빚고 있으나 쿠르드 족의 독립 움직임에 관한한 대체로 동병상련의 입장이다.

쿠르드 족은 허우대만 큰 게 아니라 기질이나 지능도 다른 민족에 비해 손색이 없다. 그들은 인도유럽어족으로도 불리는 인도아리안 족이니 세계사에서 상당한 족보가 있는 민족이다. 현실적으로도 오늘날 이란에 해당하는 페르시아 인들과 언어적으로나 용모로나 구분하기 어려웠다. 십자군 침공 당시 이슬람 세계를 지킨 전설적 영웅 살라딘(살라흐 안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이 바로 쿠르드족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살라딘의 활략이 먼 옛날의 전설 같은 이야기라면 그 무시무시한 이슬람 무장단체인 IS(이슬람국가)를 몰락시키는 데 첨병구실을 한 쿠르드 전사들의 용맹은 생생한 기억이다.

하지만 그런 용맹한 기질도 사주가 세다보면 무용하거나 역으로 일을 꼬이게 해 비겁한 것만도 못할 수 있다. 바로 쿠르드 족의 그 용맹성으로 터키 등 주변국들은 그들을 더욱 위험시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민족의 사주는 어차피 있지도 않는 생년월일시가 아니라 태어난 장소가 더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셈이다. 다만 그 태어나거나 사는 장소를 기준으로 운세를 점친다는 말은 생소하다.

동양에는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라는 말이 있으나 그것은 운세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맹자가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며 인간들의 화합을 역설한 교훈 정도로나 볼 수 있다. 하지만 쿠르드 족을 보면  민족은 태어난  땅을 바탕으로 ‘사주’ 같은 것은 정해야 할 판이다.

쿠르드 족도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운세가 나쁘지 않았다. 바로 12세기의 살라딘의 경우가 그렇듯 민족들의 이동이 심한 중동에서 쿠르드 족이 핍박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아니 많은 쿠르드 족들은 산악지역에서 부족 단위의 유목생활을 했기에 국가나 민족 자체에도 관심이 없다시피 했다. 그러다 13세기부터 일어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중동의 수많은 민족들을 한 울타리에 포용했기에 민족이란 말 자체가 어색한 세월의 연속이었다.

문제는 그 오스만 제국이 20세기에 들어와 허약해진 데다 1차 대전에 끼어들었다가 패전한 바람에 마치 그림 퍼즐 장난감처럼 조각조각이 나면서다. 물론 ‘사주’가 좋은 민족들은 그걸 기회로 오스만의 지배를 벗어나 자신들의 민족 정통성을 찾을 수 있었다. 페르시아의 경우 1차 대전 이전에  투르크 계의 카자르 왕조를 입헌혁명(1905~11년)으로 무너뜨리고 독립하더니 1935년에는 ‘아리안의 나라’라는 뜻의 ‘이란’이라는 국호를 정하는 등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주가 억센 쿠르드 족에게는 그런 행운이 오는 듯 오는 듯 하다가 번번이 비켜나고 말았다. 1차 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쿠르드 족을 끌어들이기 위해 독립 국가를 약속했고 실제로 대전이 끝난 뒤인 1920년의 세브르 조약에서는 쿠르드 족이 많이 거주하는 쿠르디스탄 지역에 국가의 건설을 한다는 구상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조약에 불만이 많은 터키의 반발로 그리스-터키 전쟁이 벌어진 끝에  세브르 조약은 무효가 됐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1923년 체결된  로잔 조약에서는 그런 내용이 빠졌다. 그래서 쿠르드 족은 이제 독립국가가 된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란 및 아르메니아에 분산돼 살아야 했다. 

당시 미국은 영국과 함께 로잔 조약을 승인했고 그것은 쿠르드 족이 미국에게 당한 8차례의 배신 가운데 첫 번째였다. 하지만 당시는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크지 않아 그 배신은 거의 기억되지 않고 있다. 미국의 배신이 두드러진 것은 2차 대전이후 미국이 초강대국이 되어 중동에서 영국의 역할을 대행하면서부터다. 1958년 친서방적인 이라크왕국이 쿠데타로 무너지고 반영주의자이자 친 소련파인 압둘카림  카심이 집권하자 미국은 이라크의 쿠르드 족에게 무기를 공급해 독립운동을 부추겼다. 그러나 1963년 미국이 지원한 바트당이 쿠데타로 집권하자 미국은 각종 고성능 무기를 지원했고 바트당 정권은 그것으로 쿠르드 족을 초토화시켰다.

그러던 이라크에 다시 친 소련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은 쿠르드 족에게 또 무기를 공급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이 쿠르드 족에게 무기를 공급하려면 당시는 친미적이었던 이란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란은 쿠르드 족과 관련된 것이기에 이를 거부했다. 그것은 친미와 반미 노선으로 훗날 전쟁까지 벌였던 이라크와 이란이 쿠르드 족에 관한한 한통속임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였다. 

그 결과 미국의 지원을 믿었던 쿠르드 족만 수천 명이 후세인 정부에게 살육 당했다. 그러나 어지러운 중동 정세에서 이란은 호메이니 혁명으로 반미국가가 되고 그 혁명의 여파로 이란-이라크 전쟁이 나자 어느새 이라크는 친미 국가가 돼 미국의 지원을 받게 됐다. 그 전쟁의 막바지에 이라크가 화학무기 등으로 쿠르드 족을 약 20만이나 살상했고 미국은 이에 침묵했다.

그 후세인을 훗날 미국이 공격해 사형시킬 때의 큰 죄목 가운데 하나가 화학무기와 관련된 것은 우스꽝스러운 후세인의 사주를 탓할 일이다. 그런 식의 배신들이 이어지다 마침내 트럼프 치하의 미국이 8번 째 배신을 기록한 셈이다. IS소탕에 쿠르드 족을 요긴하게 써먹으면서 그들에게 독립국 건설의 꿈을 부풀렸던 그는 막상 IS가 사라지자 쿠르드 족을 늑대에게 맡기는 행태를 보였다.

그는  터키와 시리아 사이에 미군 1000명을 주둔하는 데 돈이 든다며 군대를 빼내고 터키는 기다렸다는 듯이 쳐들어 왔다. 하지만 그런 ‘돈 타령’으로 세계의 비웃음을 산  트럼프는 차라리 순진한 모습으로도 비친다. 사업가 출신인 그가 현학적이고도 고상한 어휘로 발뺌을 하거나 어려우면 눈 딱 감고 묵살도 능사로 하는 정치인 출신 대통령들의 수법을 배우지 못한 것만 같아서다.

배신한 것은 보수적인 공화당만도 아니다.  진보적이라는 민주당의 빌 클린턴도 나토 동맹국인 터키에 고성능 무기를 대폭 공급해 쿠르드 족 살육을 도왔다. 보다 크게 보면 미국만이 쿠르드 족을 배신한 것도 아니다. 미국의 철수를 비난하고 있는 유럽도 쿠르드 족의 고통을 분담할 용의는 없어 보인다. 터키와 돈독한 관계를 갖고 있는 러시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유럽이 트럼프의 얌체 정책을 비난하는 것도  쿠르드 족의 참상이 아파서라기보다는  그들의 몰락으로 IS가 부활해 유럽이 불안정해지는 데 대한 우려가 더 크다. 그런 한편으로는 쿠르드 족의 독립 문제로 중동의 정세가 들썩이는 것도 마땅치 않은 것이 그들의 속내다. 그래서 억센 사주를 타고난 쿠르드 족의 앞날을 제대로 예측할 수 있는  이는 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