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평 시사논평] 보수-‘병역비리당’이라는 뫼비우스의 띠
[양문평 시사논평] 보수-‘병역비리당’이라는 뫼비우스의 띠
  • 양문평 고문
  • 승인 201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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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 18일 황교안 전 국무총리와 관련해 “도로 병역비리당이 돼서는 안된다”고 말한 것은 얼핏 식상한 그림이다. 홍준표는 그날 유튜브 1인 방송 ‘TV홍카콜라’ 1000만 조회 축하 생방송에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대선 패배를 거론하며 “(당시 한나라당은) 좌파들이 쳐놓은 덫에 빠져 병역비리당이 됐다”며 “보수가 경계해야 할 가장 큰 문제가 병역비리 문제다”고 말했던 것이다.

바로 그 이회창의 병역 비리 시비만 해도 12년 전의 일이다. 당권을 노리는 정치인들이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풍속도도 대한민국 역사만큼이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여당이나 야당이나 사정이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홍준표의 말이 새삼 눈길을 끈 것은 한 때 한국당의 대표였던 지도급 인사가 자기네 정당이 ‘병역비리당’이었다고 천명한 것이어서 다.

그런 발언에 대한 한국당의 반응도 눈길을 끈다. 평소 자기네 정당에 대해 사소한 비난만 들어도 경끼들린 듯이 반발하는 우리나라 정당들의 그 열화 같은 대변인들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문제는 ‘병역 비리’라는 낙인이 당하고도 대범한 척 하거나 못들은 척 하기에는 너무 심각한 비리라는 점이다.

그것은 뇌물 수수혐의 같은 것과도 차원이 다르다. 바로 홍준표도 대법원 판결까지 받아야 했던 뇌물 혐의는 오늘날 여와 야를 불문하고 정치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모든 정치인들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 같은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병역비리도 별게 아닐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병역을 요령껏 피하는 것이야 말로 ‘능력’으로 통하는 면도 있지 않는가. 아니, 우리 사회의 귀족적인 면면들이 모이는 어떤 자리에서는 병역을 필한 사람이 오히려 을로 취급되기도 한다. 석연치 않은 사유로 병역을 필한 사람들이 병역을 필한 사람들보다 더 일찍 사회에 진출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거기에다 ‘더 건강하고 원기왕성하게’ 일해서 출세한 경우는 헤아릴 수도 없다.

하지만 홍준표가 제기한 문제가 눈길을 끄는 것은 정치인들의 일이고 그것도 ‘보수’의 기치를 들고 있는 정당의 일이어서 다. 지난해 11월 대법원이 양심적 병역 거부에 무죄판결을 내리자 한국당과 보수언론들이 격한 반발을 보였던 사실을 떠올려도 그렇다. 홍준표가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병역미필자라고 지적한 것도 보수 세력의 국방에 대한 관심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임종석은 ‘병역미필자’가 아니라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아서 ‘병역면제자’가 됐다.

아무튼 한국 정치계의 ‘보수’는 영국의 보수당 같은 의미의 보수와는 차원이 다르다. 오늘날 한국당의 지지 세력이 표방하고 있는 ‘보수’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라는 ‘혁명공약’을 내세우고 혁명이 아닌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에 이른다.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소장은 금방 중장과 대장을 거쳐 대통령이 됐다가 피살되지만 그의 지지 세력들은 온갖 진화를 거쳐 오늘날도 제1야당으로 건재해 있다. 그들의 정당 간판은 무수히 바뀌었으나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으면서 반공을 독점하듯이 운신하는 모습은 변함이 없다.

그것은 태극기 부대에서 흔히 보는 군복차림들이 말해준다. 제대한지도 오래된 노인들이 태극기 부대 모임이면 군복을 차려입고 나오는 것만 봐도 ’보수= 반공+국방‘이라는 공식은 상식으로 굳어졌다. 문제는 그런 군복차림 시위대가 무색하게 보수 정치인들의 지난날을 들춰보면 현재의 진보 정치인들보다 더 군복을 싫어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보수‘와 ’병역비리당‘이라는 물과 불처럼 상극인 두 용어가 우리나라 정치판에서는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말이 돼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병역비리당‘의 정치인들이 줄곧 진보정치인들을 용공이나 그 비슷한 범주로 몰아넣고 있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은 수학과 기하학 그리고 물리학의 역학이 관련된 ’뫼비우스의 띠‘라는 이상한 곡면을 떠올리게 한다.

뫼비우스의 띠란 벨트처럼 긴 사각형의 두 끝을 꼬아서 연결해 두는 모양의 도형 같은 것이다. 그것은 경계가 하나밖에 없는 2차원 도형이 돼 그것을 벨트식으로 돌리면 양면이 번갈아 나타난다. 우리 정치사에서도 보수는 곧잘 ’병역 비리 당‘으로 비난을 받으면서도 다음 순간 ’반공 +국방 정당‘의 모습이 돼서 정권을 잡기도 한다.

그래선지 홍준표가 거론했듯이 이회창은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으로 패했으나 이명박은 본인이 병역을 미필했어도 청와대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명박은 ’기관지 확장증‘으로 군복무가 면제됐다고 해명했으나 반대세력은 물론이고 그의 지지세력 내에서도 공감하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따라서 뫼비우스의 띠 식으로 그들의 시운을 평가하자면 불운한 이회창이 출마한 시점에는 그 벨트의 ’병역비리당‘이라고 써진 면이 국민들에게 비칠 때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명박의 경우는 ’반공+국방 정당‘이란 면이 비칠 때다.

새삼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홍준표를 역성들어 ’만성 담마진‘이라는 생소한 병으로 병역을 미필한 황교안이 한국당 대표가 되는 것을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한국당 자체가 병역 비리 당이니 그 당 후보들을 찍지 말라는 말도 아니다.

교묘한 기계가 아니라 수 천만 국민이 참가하는 정치판에서 어떻게 물과 불같은 ’보수‘와 ’병역비리당‘이 뫼비우스의 띠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데 새삼 눈길이 가서다. 그것도 잠시거나 어느 한 인물의 경우도 아니다. 가령 어느 뛰어난 인물이 한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을 경우 그의 장점이 아까워 그 약점을 눈감아 주는 상황은 가상할 수 있다.

병역비리와는 무관하지만 우리 정치판에서 그 비슷한 그림이 현실적으로 있었다. 이명박이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그는 전과13범이라는 공인된 허물 말고도 그에게 혼외자가 있다는 루머가 파다했었다. 그 때 한 목사가 설교에서 ”설령 우리 이명박 장로님에게 혼외자가 있다 해도 우리 교인들은 그분의 신앙심과 경제대통령으로써의 능력을 살려야 하니 그에게 투표해야 합니다“라는 취지로 열변을 토했던 것이다.

문제는 한국의 보수 세력들이 5·16쿠데타가 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병역을 기피하는 전통이 이어져 온 점이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대통령을 필두로 김황식 국무총리, 정운찬 국무총리, 정정길 대통령실장, 원세훈 국정원장 등 수많은 병역미필자들이 주변에 진치고 있었다. 여기에다 이번에는 만성 담마진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는 황교안까지 가세했다.

그가 2013년 국무총리 후보 인사청문회를 받을 때 전해철 민주당 의원은 "10년 간 병역 면제 처분을 받은 365만 명 가운데 담마진으로 인한 경우는 불과 4명이다"고 지적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보수정당이 반공 및 국방 정당으로 행세할 수 있는 정치판의 뫼비우스의 띠가 통용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민주국가에서 그런 사회현상의 1차 책임은 언론에 있다.

그래서 새삼 언론을 돌이켜 보면 한국 언론계를 주도하는 유력한 보수 언론이야 말로 뫼비우스의 띠 같은 속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것은 보수언론들이 이명박의 ’전과 13범‘이라는 전력이나 BBK의혹을 거의 묵살한 채 그가 부자인 점을 들어 ’경제 대통령‘이라는 이상한 논리로 그를 부추겨 준 것과도 다른 이야기다.

보수 언론들이 남북경협을 ’퍼주기‘로 매도하거나 천안함 사건을 대서특필한 그 지대한 반공과 국방에의 관심을 10분의1만 정치인들의 병역에 기울였다면 한국 정치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난해 11월 대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에 무죄를 선고하자 보수정치인들과 보수 언론이 노발대발하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도 내면을 들여다 보면 개운치 않은 여운이 남는다.

보수언론들은 아직도 함량미달의 댓글들을 대서특필해 이를 비난하고 있다. 병역필자들의 ”나는 양심이 없어서 군대에 간 것인가?“하는 댓글이 대표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양심‘과 헌법에서 말하는 ’양심‘의 뉴앙스가 다르다는 것을 잘 아는 언론이 이를 외면한 것이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일반 병역필자보다 무슨 특혜를 받게 된다는 듯한 논조도 사실을 오도한 것이다. 그것은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더 장기적으로 복무할 가능성도 있어 현실적으로는 손해 볼 여지가 있다는 점을 묵살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모든 젊은이들에게 양심적 병역거부의 선택권을 줘도 받아들이는 수는 극소수로 국방에 심각한 문제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한마디로 보수 언론은 정치인들의 병역비리에는 무한히 관대하면서도 양심적 병역거부 등에서는 한없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식이이서 국민을 헷갈리게 한다.

그런 언론이 남북화해 국면에서 더 추상같은 반공의 잣대를 들이대어서 국민들은 더 헷갈릴 수도 있다. 그처럼 두 개의 다른 얼굴을 보이는 ’뫼비우스의 띠 언론‘의 그 어느 면을 우리는 믿어야 할까?  그 어지러운 장단에 맟추어 춤을 추어야 하는 우리 사회가 너무 불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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