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평 시사논평] '캐러밴'에게는 가깝고도 먼 미국
[양문평 시사논평] '캐러밴'에게는 가깝고도 먼 미국
  • 양문평 고문
  • 승인 2019.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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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난민, 가난 원인 상당 부분 미국과 관계에서 생겨
-장벽을 넘어야 하는 캐러밴에게 미국은 한없이 멀다

남미에서 미국으로 가려는 캐러밴들에게 새해니 뭐니 하는 말은 사치다. 그들에게는 ‘새해’ 자체가 없다. 있는 것은 지난해부터 그들을 가로막는 장벽과 그것을 지키는 CBP(미국 국경관세국경 보호청) 요원들뿐이다.

새해 첫날도 멕시코 쪽에서 150명의 온두라스 출신 난민이 미국 국경을 몰래 넘어가려 했고 CBP는 최루탄으로 응답했다. 그런 광경을 보면 우선 “미국이 부자 나라가 돼서 이웃 가난뱅이들 때문에 무척 시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미국과 남미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난민들이 그처럼 가난하고 처참하게 된 원인의 상당 부분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생겨났다는 데 눈길이 간다. 그래서 다음 순간 너무나 복잡하게 얽힌 미국과 남미의 관계에 어리둥절해질 수도 있다.

1823년 12월3일 미국 제5대 대통령인 제임스 먼로가 ‘먼로 독트린’을 발표한 이후부터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다. 먼로가 의회에서 연두교서 형식으로 발표한 이 독트린의 골자는 (1)미국은 유럽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니 (2)유럽도 미주의 일에 간섭하지 말아야 하며 (3)유럽이 미주 대륙 국가를 식민지화 하거나 전쟁을 하려 하면 이는 미국에 대한 전쟁으로 간주하고 대응하겠다는 것이었다.

얼핏 느닷없어 보이는 이 선언은 엉뚱하게도 나폴레옹 전쟁과 관련이 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스페인은 본국이 점령당해 남미의 식민지에 신경을 쓸 수 없었고 그 상황을 틈타 남미의 식민지들이 대거 독립을 쟁취했었다. 그러다 나폴레옹전쟁이 끝나서 몸을 추스른 유럽 국가들이 다시 남미에 눈독을 들이자 미국이 이를 제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첫눈에도 놀라운 선언이다. 불과 40년 전 독립전쟁을 끝낸 신생국 미국이 자기네 나라나 챙길 일이지 어찌 북미에다 남미 대륙까지 보호하겠다고 나선단 말인가. 더욱이 남미는 앵글로색슨 족과는 딴판인 스페인과 포르투갈 인들이 주도해온 대륙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당시의 유럽 세계를 좌지우지 하던 오스트리아의 명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그 선언에 코웃음을 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른 유럽 지도자들도 그런 반응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먼로주의로도 불리는 먼로 독트린은 손상되지 않았다.

나폴레옹 전쟁이후 최대 강국으로 등장한 영국은 남미와의 무역을 중시하였고 그러려면 남미가 스페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상황이 더 유리해서다. 남미국가들로서는 미국이 남미의 경찰을 자처하는 게 아니꼬울 수도 있었으나 그들 역시 신생 독립국으로써 정신이 없던 시절이어서 그걸 따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다 해가 갈수록 미국은 강력해지면서 남미의 경찰이 되는 것은 물론 남미의 어른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먼로 독트린도 ‘진화’의 과정을 거친다.

그 19세기가 다 가기전인 1898년 미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쿠바를 독립시키고 쿠바의 관타나모를 사실상 점거해 해군기지를 건설했다. 나아가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과 괌을 빼앗아 아시아에도 거점을 잡는다. 그래서 미주에 대한 유럽의 침략을 두려워 해 방어적으로 보이던 미국은 공세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쿠바 독립이라면 몰라도 아시아의 스페인 식민지를 차지한 것은 유럽 문제에 간섭한 것이자 아시아 문제에 관여한 셈이 아닌가. 그러다 세기가 바뀌기 바쁘게 미국은 1차 대전에 참가함으로써 세계의 경찰로 변신했다. 그러는 동안 남미에서는 미국이 세계의 경찰을 넘어 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등장하는 ‘대형(Big Brother)’ 같은 존재로 군림하게 됐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먼로 독트린과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먼로 독트린이 없었어도 미국은 그 길을 갔을 것이다. 따라서 먼로 독트린은 미국이 신생 독립국의 딱지를 떼고 미주의 어르신이 될 만큼 강해졌다는 선언 정도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남미의 도처에는 미국의 농장이 들어섰다.

1928년 콜롬비아에서 일어난 ‘바나나 대학살’ 사건은 기념비적이다. 미국의 과일회사인 유나이티드 흐루트 컴퍼니(UFC) 소유의 농장에서 농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자 UFC는 콜롬비아 정부를 위협했다. 그래서 콜롬비아 정부군은 도시의 광장에서 기도들이고 있는 파업자와 그 가족들을 “5분 안에 쓸어버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정부군은 기관총을 난사해 2~3000명을 살해했다.

남미에 수많은 미국 공장이 들어서며 남미 전역이 미국 시장같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남미의 풍속도같이 돼버린 쿠데타 치고 미국과 무관한 것은 찾기 어려웠다. 1973년 칠레 육군참모총장으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미국CIA의 작품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 쿠데타 군부의 총질에 3000명 이상의 무고한 인명이 사라진 대신 피노체트는 큰 유산을 후손에게 남길 수 있었다.

최근 들어 남미에서 쿠데타가 뜸해진 것 같지만 남미 군사동향을 살피는 ‘대형’이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새해 설날 브라질 대통령으로 취임한 자이르 보이소나루가 미군 기지를 유치하고 싶다고 말해 남미 전역을 놀라게 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는 ‘남미의 트럼프’라는 이름값을 한 셈이다.

지난해부터 미국에 가려는 캐러밴들의 모국인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및 과테말라 등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미국산 쿠데타에 절은 나라들이다. 새해 첫날 장벽을 돌파하려던 난민들을 배출한 온두라스의 경우를 보자. 1821년 독립한 이 나라가 20세기말까지 겪은 수 백 건의 쿠데타나 반란 등을 정확히 꿰는 역사가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것을 ‘창세기의 혼돈’으로 치더라도 밀레니엄이 바뀐 2009년에도 온두라스는 좌파적인 마누엘 셀라야 대통령이 쿠데타로 쫓겨났다. 이에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미국이 쿠데타의 배후다”면서 자국군대에 비상경계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이 나라는 쿠데타 못지않게 바나나로도 유명해 ‘바나나 공화국’으로도 불린다. 그곳 바나나 농장의 위용은 콜롬비아의 그것을 능가해 철도부설권까지 얻어냈다.

그처럼 바나나가 넘치는데 왜 굶주린 난민들은 고향을 떠나려할까?

물론 그 바나나 농장들을 경영하는 미국 기업가들은 현지 주민들의 배고픔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그들은 자기네 개발에 방해되는 환경운동가들에게는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선지 환경 분야의 노벨상이라는 ‘골드만 환경상’을 받은 온두라스의 ‘숲 지킴이’ 베르타 카세레스 여사는 오랜 세월 협박을 받다가 2016년 끝내 무장괴한에게 피살되기도 했다.

그 점에서는 엘살바도르도 비슷하다. 이 나라는 1969년 온두라스와 축구전쟁을 일으킨 사이지만 미국의 조종을 받는 군부가 미국 기업들을 깍듯이 모시는 것은 쌍둥이처럼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온두라스가 ‘바나나공화국’으로 불리고 엘살바도르는 ‘커피공화국’으로 유명한 정도다.

군부 독재와 이에 저항하는 좌파세력의 갈등으로 폭력조직이 발호하는 것도 두 나라가 비슷하다. 한 가지 더 유명한 게 있다면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성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1980년 군부의 총격에 사망한 점이다. 그 사건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로메로 대주교가 원래 보수적인 사제로 해방신학과는 반대의 입장이어서 그가 1977년 대주교에 임명되자 군부가 안도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아무리 온건하고 보수적인 사제라도 엘살바도르의 비인도적인 상황에서는 기도만 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멕시코와 접경해 있고 따라서 미국과도 더 가까운 과테말라의 경우 이들 두 나라보다 더 많은 ‘미국과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미국이 과테말라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매독 실험은 압권으로 인류사에 남을만한 사건이었다. 당시 개발된 페니실린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해 과테말라의 교도소 수감자나 매춘부 또는 군인 등 5500명을 일부러 매독에 감염시켜 실험한 것으로 그 가운데는 9세의 소녀도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런 나라이니 미국을 업은 군사쿠데타가 성행하고 이에 반발하는 좌파운동이 거세지면서 치안이 부재하는 지옥이 된다는 말은 싱거운 이야기다. 1951년 등장한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의 민주행동당 정부가 토지개혁으로 ‘바나나 대학살’의 주역이었던 UFC의 토지를 국유화 하려 하자 CIA의 조종을 받은 쿠데타가 일어나 아르벤스는 1954년 국외로 쫓겨나야만 했다. 아르벤스가 남긴 게 있다면 그 쿠데타의 참상을 알게 된 체 게바라가 반미 혁명의 의지를 불태워 쿠바 혁명에 매진하게 한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남미는 쿠데타와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나는 좌파의 혁명운동의 악순환이 이어져 왔다. 그 소용돌이의 전망은 아무도 알 수 없으나 그로 인해 분명히 드러난 결과는 있다. 치안 부재와 그로 인한 범죄다. 여기에다 최근 캐러밴을 배출한 나라들은 미국이 가까워서 또 다른 범죄가 성행한다. 거대한 마약 소비시장인 미국이 가까워 마약범죄마저 성행한 것이다. 미국으로 인한 쿠데타와 이로 인한 좌우 갈등에다 마약범죄까지 극성을 부린 결과는 엄청난 살인율로 나타난다.

브라질의 싱크탱크 이가라페 연구소가 발표한 2017년도 국가별 살인율을 보면 엘살바도르가 인구 10만 명 당 60명으로 1위를 기록했고 자메이카(56) 베네수엘라(54) 온두라스(43) 멕시코(20)가 뒤를 따르는 등으로 중미지역이 석권하고 있다. 다만 이 조사에서는 4위인 온두라스의 경우 줄곧 엘살바도르와 1위를 다퉈왔다.

캐러밴에 나서는 많은 사람들은 왜 그처럼 고생을 하느냐는 질문에 배고픔보다는 목숨이 위태로워서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캐러밴이 발생한 원인에서 미국의 책임은 몇%일까? 답은 0이다. 그런 것은 너무 분명하면서도 역사의 셈법에서는 무시당해왔다. 그것은 마치 일본의 조선 침략의 결과 한반도가 분단돼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났으니 일본이 책임지라는 논리와 비슷하다. 그러나 일본의 배상 문제에서 그런 소리는 전혀 없었다.

물론 미국인들도 그런 사정을 거들떠보는 기미는 없다. 그것은 캐러밴을 막겠다며 장벽을 쌓자고 한 나머지 행정부를 마비시키는 셧다운을 초래한 트럼프를 두고 한 말도 아니다. 장벽에 반대하는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장벽이 없어도 그 캐러밴 군상은 난민 심사를 받아야 하고 그 과정은 남미에서 미국이 남긴 발자취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남미 난민들은 지난날 베트남에서 몰려온 보트피플이나 예멘과 시리아에서 피신해온 중동 난민과 같은 기준으로 심사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캐러밴에게 미국은 가깝고도 멀다. 장벽을 넘어야 하는 캐러밴에게 미국은 한없이 멀다. 그러나 남미를 살피는 대형에게 남미는 한없이 가깝다. 아니, 그 대형은 오늘도 남미 안에 자리 잡은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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