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평 시사논평] 회갑 맞은 쿠바혁명...'체게바라' 정신은 계속된다
[양문평 시사논평] 회갑 맞은 쿠바혁명...'체게바라' 정신은 계속된다
  • 양문평 고문
  • 승인 2018.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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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어 2019년 1월1일이 되면 쿠바는 설날보다 몇 배나 큰 쿠바 혁명의 회갑을 맞는다. 그럼에도 떠들썩한 잔치 분위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물론 회갑이야 동아시아의 풍속도지만 서양에서도 60주년 잔치라면 떠들썩할 만도 한 일이 아닌가. 특히 20세기 후반의 세계를 들썩이게 했던 쿠바 혁명의 60주년이라면 그 작은 섬나라가 들썩여야 제격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분위기가 잠잠한 것은 오늘날 쿠바의 처지와 무관하지 않다.

1959년 1월1일 피델 카스트로를 중심으로 한 혁명군이 폴헨시오 바티스타의 부패한 정권을 뒤엎어 11년이나 집권했던 그 장기 독재자가 망명했을 때의 감격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실은 10년 전의 50주년 기념식도 요란하지는 않았다. 서양의 경우 회갑은 몰라도 50주년은 반세기라 해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런 쿠바 혁명의 회갑 분위기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진실성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회갑의 본질은 인간의 수명이 짧았던 지난날에 한 사람이 자신이 태어났던 간지(干支)가 되돌아오도록 오래 살았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부유한지 가난한지 그리고 출세를 했는지의 여부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미국의 앞 바다에 떠있던 쿠바 혁명이 침몰하지 않은 채 60년을 견뎌낸 것 자체가 얼마나 대견스러운 일인가. 그 혁명의 불을 끄려고 그처럼 부심했던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비록 희미하나마 아직도 꺼지지 않은 쿠바 혁명의 불길을 볼 때 어떤 감회일까도 궁금한 일이다.

그 60년 동안 쿠바 혁명이 당한 수난사는 20세기의 냉전사(冷戰史)와 겹치다시피 했으나 그 냉전이 끝난 뒤에도 쿠바 혁명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더 가혹한 수난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것은 이번의 회갑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혁명 2년 뒤인 1961년 4월16일 쿠바가 사회주의국가를 선언하자 바로 다음 날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쿠바의 우파 망명자 1500명을 무장해 쿠바를 침공한 사건은 상징적이다. 이듬해 10월에 닥친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이 섬나라가 지도상에서 자취를 감추느냐 마느냐를 넘어 지구가 무사할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쿠바가 겪은 진짜 수난은 그처럼 세계의 매스컴을 요란하게 장식한 사건들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쿠바를 침공할 명분을 얻기 위해 자작극을 시도하거나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 같은 지도자들을 암살하려는 등의 음모로 집약되는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e)’ 같은 것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이따금 매스컴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정확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미국이 쿠바 경제를 고사시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손’과 ‘보이는 손’을 부지런히 뻗쳐온 것도 잘 알려진 일이다. 원래 쿠바는 지정학적으로 미국이 재채기만 해도 감기가 걸릴 만큼 미국의 바람에 약한 처지다.

쿠바라는 나라의 탄생 자체가 미국-스페인 전쟁의 산물이니 쿠바에게 미국은 대부(代父)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쿠바의 태생적 흔적은 아직도 미국이 쿠바 영토에서 차지하고 있는 관타나모 기지로 남아 있다. 그것은 태생적 흔적으로 끝나지 않고 피그만 사건 당시는 미국의 쿠바 침략을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런 냉전 시대가 끝나자 세계는 환호했으나 쿠바는 냉전의 차가움보다 더 차디찬 현실과 마주했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 공산권이 붕괴했으니 쿠바로써는 땅이 꺼질 듯 한 지진을 당한 셈이나 대서양을 격한 덕분인지 무너지지는 않았다. 다만 훨씬 가난하고 외로워졌다. 그런 저런 수난을 겪어가면서 어느덧 ‘쿠바’라는 이름은 ‘아름다운 경치의 가난한 나라’로 통용되다시피 했다.

1950년대의 자동차들이 굴러다니니 마치 ‘장미 공주’ 동화의 백년 잠에 빠진 왕국처럼 시계가 혁명 당시 시점에서 멈춰버린 모습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경사가 없지는 않았다. 미국의 손아귀에 놓여 있듯 했던 라틴아메리카 주민들이 점차 잠에서 깨어난 것이 좋은 예다. 여기에다 최근 이 지역에서 세를 얻고 있는 중국의 존재로 미국의 외골수 쿠바 고립화가 어렵게 된 점도 있다. 그런 바탕에서 좌파 정부들이 생겨나 소련의 붕괴로 궁해진 석유를 베네수엘라가 헐값에 공급해 주기도 했다.

그 뿐 아니리 2012년 콜롬비아에서 열린 미주회의(OAS)정상회담에서 남미 국가들은 쿠바를 초청하지 않는 미국에 반기를 들어 쿠바가 참가하지 않는 차기 OAS정상회담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미와 중남미의 35개국이 참가한 이 정상회담에서 미국 편을 든 것은 캐나다뿐이었다. 그래서 2015년 4월 파나마시티에서 열린 OAS정상회담에는 라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이 참석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반세기만에 첫 미-쿠바 정상회담을 갖기도 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바로 그해 쿠바와 미국이 국교를 정상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국교 정상화일 뿐이다. 미국은 자신들의 식민지 정부 같던 폴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을 뒤엎고 미국이 투자한 자산을 몰수한 쿠바 혁명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 국교 정상화는 중국식 표현을 빌리자면 ‘화평연변(和平演邊)’ 전략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 국가를 혁명이나 쿠데타로 무너뜨릴 수 없자 경제나 문화 교류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시키는 수법이다. 그 전략은 손자병법으로 치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병법에서 나오는 부전이승(不戰而勝)이다.

이솝 우화의 태풍과 해의 경주에 비유하자면 햇살을 비추는 방식이다. 물론 피그만 침공은 태풍전략이었다. 그런 정도의 화해마저도 도널드 트럼프가 백악관에 들어서자 ‘오바마 지우기’를 서둘러 쿠바는 또 다시 곤욕을 치루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도 극단까지 가기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상황이 녹록치 않다. 그래서 회갑을 맞은 쿠바혁명은 많이 달라진 듯하면서도 또한 변화가 없는 듯도 하다.

쿠바에는 아직도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혼이 어른거리는 느낌이 없지 않다. 그것은 피델 카스트로가 죽기 전에 이미 그의 혁명 동지이자 아우인 라울 카스트로가 국가평의회 의장 자리를 이어 받았다가 올해 그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공산당 서기장 자리는 유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실은 라울의 아들 알레한드로도 내무부 보안국 총수라는 요직을 점하고 있다. 그런 것보다는 피델 카스트로의 동상이 없다는 데서 그의 존재가 더 눈에 띄는 듯 하다는 말이다. 그는 유언으로 일체의 동상이 세워지지 않은 것은 물론 그의 이름을 딴 거리나 건물도 없다.

그것은 90세의 장수를 누리며 ‘늙은 독재자’라는 험담도 들었던 피델 카스트로의 진면목이기도 하다. 그런 광경에서 사람들은 ”역사가 나를 용서하리라“고 했던 피델의 음성을 듣는다. 공교롭게도 7명이나 되는 피델의 자녀들은 아무도 공직에도 나서지 않았다.

대조적으로 체 게바라의 동상은 쿠바 혁명의 발상지 격인 산타클라라에 높이 서서 혁명을 말하고 있다. 쿠바 혁명 8년만에 39세의 나이로 비명에 간 게바라의 동상이기에 그것은 물론 위압적이지 않은 혁명 아이콘으로 너무 적절하다. 그 동상은 그가 생전에 그가 자신의 딸인 일디타에게 편지로 했던 말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어른이 됐을 때 가장 혁명적인 사람이 되도록 준비해라. 이 말은 네 나이에는 많이 배워야 한다는 의미다. 정의를 지지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나는 네 나이에 그러지를 못했다. 그 시대에는 인간의 적이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서 지금은 인간이 인간의 적이 아니라는 식의 표현은 그가 너무 일찍 죽어서 생긴 오류 정도로 봐주자. 체 게바라의 모습은 그 밖에도 남아 있다. 모든 것이 1950년대 수준인 듯 낙후한 여건과는 어울리지 않게 발전한 쿠바의 의학과 의료체계다. 거기엔 의사출신 혁명가 게바라의 <사람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고 의사는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직업>이라는 이념이 배어 있다. 그래서 1993년 세계보건기구는 쿠바를 소아마미 바이러스가 근절된 최초의 나라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쿠바 의학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말년에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드나들어 더 유명해졌다. 그래서 쿠바는 유명한 의사 배출국이 됐고 그들은 아직도 활략하고 있다. 그 의사 수출로 최근 남미가 술렁거리기도 했다. 바로 쿠바 혁명의 환갑날 브라질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될 극우파 당선자 자이르 보이소나루가 브라질에서 활략하는 약 1만 명의 쿠바 의사들을 사실상 내쫓아 귀국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의사 수출로 어려운 경제에 도움을 받는 쿠바에게나 아마존 일대의 어려운 의료 환경에 도움을 받는 브라질에게나 득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열대의 트럼프’라는 별명에 만족하는 보이소나루를 말릴 수는 없는 일이다. 보이소나루는 그 뿐 아니라 자신의 취임식에 쿠바 대통령 격인 국가평의회의장(미겔 디아스카넬)을 초청하지도 않았다.

그는 어쩌면 그날 쿠바와 베네수엘라 등과 국교단절을 발표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그것은 쿠바 혁명의 회갑 기념 선물로는 극히 흉한 것이나 지금까지 그보다 몇 배나 무서운 서북풍을 많이 맞아온 쿠바로써는 간지러운 남풍일 뿐이다. 더욱이 브라질에 극우 정권이 들어선 대신 지난 7월의 멕시코 대선에서는 좌파인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가 당선돼 쿠바 의사들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

남미는 그런 식으로 흘러가고 그 속에서 쿠바 혁명은 숨을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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