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평 시사논평] "문재인, 지지율 보지 말고 오직 국민만 바라 보라"
[양문평 시사논평] "문재인, 지지율 보지 말고 오직 국민만 바라 보라"
  • 양문평 고문
  • 승인 2018.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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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갤럽이 14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45%수준이라는 보도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은 드디어였다. 마치 올 것이 왔다는 식의 그런 반응은 지난날의 대통령 지지율이 취임 초기에 높았다가 내리막을 걸어온 패턴이 변함없이 반복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취임 초는 잘 하고 있다는 긍정평가가 높고 잘 못하고 있다는 부정평가는 낮지만 갈수록 긍정평가는 내리막을 걷고 부정평가는 오르막을 걸어 어느 시점에선가는 그라프 상에서 그 두 선이 만나 X자를 이루는 게 어김없는 공식이 돼 있다. X자가 노무현이나 이명박의 경우처럼 임기 첫 해에 오느냐 그 뒤에 오느냐는 정도의 변수가 있을 뿐이었다. 그처럼 교차된 긍정과 부정의 선이 이명박이나 박근혜의 경우 다시 한 번 만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한 번 헤어지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드디어는 그런 전례 때문에 나오는 소리만은 아니다. 1년 반이 지난 현 정권의 보여준 모습을 볼 때 그간 너무 지지율이 높았다는 느낌이 더 크게 작용한 셈이다. 역사적으로 진보 정권이나 좌파 정권은 대체로 국정운용이 아마추어 적인 분위기를 띄는 게 상례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심한 듯 했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 집권한 것도 아니고 불과 9년 전에 국정을 운용한 경험이 있음에도 그런 흔적마저 사라진 느낌이었다. 더욱 위태로워 보이는 것은 그처럼 부족한 국정의 경륜을 자신감으로 채우려 하는 듯 한 모습이다.

아마추어 적인 자신감!

그럼에도 너무 높았던 지지율이 그 자신감에 힘을 실어주니 국정은 꼬이고 꼬이는 모양새였다김동연 경제부총리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의 마찰로 인한 정책의 혼란을 말하는 김 앤 장사건이 좋은 예다. 나라 살림꾼들 사이에서 그런 류의 마찰음이 일어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의 관점이 다 같을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런 마찰도 없이 돌아가는 정부야 말로 소신도 비전도 없는 정부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1년 반 가까이 방치한 것은 높은 지지율에서 오는 자신감이 낳은 안이한 대응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지지율의 성격이다. 그 지지율은 현재의 여권 세력이 잘했거나 공을 세웠거나 해서가 아니라 지난 여권 세력이 워낙 못해서 거저 얻다시피 한 것이다. 전 정권과 현 정권의 주도세력을 비교할 경우 그들은 대척적(對蹠的)인 모습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정권다툼을 했지만 그것은 지난날 중국의 국공(國共)투쟁처럼 혁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여당과 야당은 동반자 같은 관계다. 흔히 정치인을 물고기로 국민을 물로 비유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같은 물에서 노는 다른 종류의 물고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차이란 은어와 미꾸라지처럼 같은 물에서 살 수 없는 성향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 말이 너무 구름 잡는 소리 같다면 현 정권이 들어선 뒤 각료 등 고위층 인사가 임명될 때마다 대부분이 지난날의 떳떳치 못한 행적으로 곤욕을 치룬 것을 돌이켜 볼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이 태산을 넘듯 청문회를 넘거나 더러는 스스로 넘지 못해 대통령이 업어서 넘겨주기도 했다. 그랬던 면면들이 전정권의 실책으로 촛불이 켜지자 그 촛불의 힘을 빌어 갑자기 민주투사로 개선하듯 정권을 잡은 것이다. 백보 양보해서 그들의 민주 투사적 의지를 인정한다 해도 그들이 국정에 자신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정권의 가장 본질적인 자신감은 국민을 잘 살게 하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경제능력을 떠나 논할 수 없다.

문제는 경제가 민주주의나 기타 이념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와는 담을 쌓은 나치 정권을 보자. 1차 대전의 폐허 속에서 히틀러가 집권했던 1933년 독일의 실업자는 600만을 헤아렸지만 1937년에는 일단 완전고용을 자랑하다시피 하지 않았던가. 물론 히틀러는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정한 1차 대전의 패전에 따른 배상금을 갚지 않기로 한 것은 물론 군수산업으로 고용을 확대한 점도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연합군과 그처럼 건곤일척의 싸움을 할 수 있는 저력은 튼튼한 경제적 바탕에서만 나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정권은 아마추어적인 솜씨에다 이념을 앞세워 경제를 다루는 데서 여러 가지 파열음을 냈던 것이다. 그런 행보를 거침없이 이어온 배경에는 그 지지율이라는 허상이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경제문제를 떠나서도 여권의 지지율이 높아서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말썽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재명 경기지사를 둘러싼 소란도 지지율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를 둘러싼 온갖 소문에 야권 인사나 지지자들이 맞장구치거나 야유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여권에서도 일부 동조하는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

물론 여권에서도 경쟁은 있고 그러다 보면 척을 지는 경우도 있으나 같은 정당에서 현직의원인 전해철 의원이 선관위에 이재명을 고소한 것은 다소 이례적인 것이다. 어찌 보면 일부 여권 지지자들이 야권 지지자들보다 더 집요하게 그 문제에 매달리는 것 같다. 그 배경에는 지지율이 충분하니 지사 하나 쯤 희생해도라는 자신감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해찬 더불어 민주당 대표의 ‘20년 집권론도 지지율 고공행진이 빚어낸 잠꼬대처럼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차라리 잠꼬대는 용서받을 수 있으나 그것이 자신감에서 오는 오만의 표시라면 국민들은 무서운 교훈으로 응답하기 마련이다. 이해찬처럼 산전수전을 다 겪어 노련한 정치인도 지지율의 고공행진에는 눈이 어지러워 현실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는 보수 언론이 이명박을 경제대통령으로 내세워 그를 당당히 청와대로 입성시킬 때의 그 무력감을 어느 새 잊었단 말인가. 보수 언론의 위력으로 많은 국민들이 부자 대통령국민을 부자로 만들 수 있는 대통령을 혼동하는 현실 앞에서 이해찬 뿐 아니라 현재의 여권 인사들은 발만 굴렀다. 그의 치세가 끝나자 보수 언론이 박근혜를 형광등 1백 개의 아우라가 넘친다며 치켜 올린 상황에서도 현 여권은 무력감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언론이 박근혜가 미혼임을 들어 더러는 장 다르크 같이, 더러는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친 엘리자베스 1세처럼 치켜 올리고 국민들은 환호하는 한 쪽에서 당시의 야권은 눈에서 초점을 잃은 채 관객놀이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현 여권은 지지율의 그 허상을 모른 채 석연치 않은 계기로고공비행을 하는 지지율에 취해서 깨어나지 못한 모양새였다.

여권이 더욱 명심해야 할 일은 지지율이 지각하는 속성이 있는 점이다. 앞서의 드디어라는 말이 떠오른 배경이기도 하다. 지지율은 지각하기에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대체로 멈추는 경우가 드물다. 다시 말해 현재 45%로 떨어진 지지율도 아직 실상보다 높을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다.

가장 큰 문제는 현재의 떨어지고 있는 지지율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날개가 보이지 않는 점이다. 경제는 세계 어느 나라고 힘든 씨름을 하고 있지만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는 미 중 무역전쟁의 전장을 헤매야 하는 처지다.

현 정권의 지지율을 끌어 올렸던 남북관계도 이미 그 45%에 반영된 채 새로이 동력을 발휘할 계기는 보이지 않고 있다. 남북관계는 지난 427일 문재인과 김정은이 손을 맞잡고 군사분계선(MDL)을 넘나들었을 때 상종가를 친 셈이었다. 많은 대중은 통일이나 적어도 남북화해가 눈앞에 온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뒤에도 문재인의 방북으로 지지율이 오르긴 했으나 어렵고도 복잡하며 그래서 성공하더라도 장기간의 작업이 될 남북 화해가 지지율에 큰 동력이 될 가능성은 갈수록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여권의 갈 길은 어디인가. 낮은 지지율에도 감사하는 겸손과 헛된 자신감이 배제된 성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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