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별' 그리고 희망을 노래하는 가수 나다경
[인터뷰] '별' 그리고 희망을 노래하는 가수 나다경
  • 홍석현 기자
  • 승인 2018.12.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5세 늦깎이 가수 데뷔 나다경…화려한 무대 뒤 논픽션 삶 풀스토리
지역 유지 양녀, 식모, 공장노동자…파란만장한 누이가 노래하는 ‘별’

“나는 꿈을 이뤘으니 어려운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다”며 “별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외로운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는 “별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희망을 간직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현실이 힘들고 고단한 사람들에게 별은 곧 희망의 등불이다”

가수 나다경(본명 임정옥.55)은 자기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전 누이들은 참 고생이 많았다. 나의 누이들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별을 헤아렸을까? 7~80년대 사회적 분위기도 그랬다. 아들하나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마음을 잘 알기에 그것이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처럼, 숙명처럼 희생하며 살았다. 부모의 말 한마디에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나다경 씨는 그 힘든 시기를 신곡 <별>을 통해 노래하고 있다.

 

빵 먹고싶어 시작한 헌혈. 죽고싶어 한달 십수번 시도
봉사활동 매진하는 이유…나처럼 불행한 이웃 돕고싶다 

예쁘게 꾸미고 싶을 나이 18세. 해외에서 힘들게 번 돈을, 이 땅에서 졸린 눈으로 손가락을 수 없이 바늘에 찔리고 베이며 2부제, 3부제 공장생활을 하며 번 돈은 모두 집으로, 동생들 학비로 보내야만 했다. 많은 선배들은 ‘우리 누이들의 희생을 토대로 우리나라는 빠른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말한다. 가수 나다경. 본명 임정옥(55)이 그 누이 중 한 사람이다. 이렇게 살다보니 18살부터 꿈꾸었던 가수의 꿈을 55살이 되어 이룰 수 있었다. “가수가 되었으니 인생역전?”이라는 말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인간승리의 신화. 55세 신인가수 나다경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녀가 가수의 꿈을 가지게 된 것은 17살부터 부산 봉제공장에서 부터였다. 특별히 노래를 잘한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공장식구들 야유회에서 당시 유행하던 조용필 선배님의 ‘창 밖의 여자’를 불렀는데 너무 잘한다면서 칭찬을 많이 해주었다. 이때부터 살짝 가수의 꿈을 갖게 되었다. 가수의 꿈을 다시 생각 해 본 것은 2014년 전국노래자랑 남원 편에 출전하면서 부터다. 이후 꿈을 펼쳐봐야겠다며 시작한 본격적인 활동은 2015년 9월21일 익산 솜리가요제에서 2등을 하면서 부터다. 이 나이에 ‘나도 가수를 할 수 있겠구나‘하는 희망을 다시 품게 되었다.

그녀는 요즘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한 달에 서너 번씩 5년간 사회 봉사활동이나 가수로서 노래봉사를 해왔으니 거의 180번은 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자신이 어렵게 살았고, 아직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자신보다 더 어렵게 살고 있는 이웃들에게 봉사활동으로 무언가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가수협회에 2018년 2월에 가수로 등록을 하고 올해 초 김상겸 작사가와 김태재 작곡가를 만나 작업한 데뷔곡<별>과 <소중한 세월>이 2018년 9월에 나와 연습하고 음반 작업을 했고 2018년 10월7일 남원 ‘사랑의 광장’에서 음반발표 겸 단독콘서트를 열면서 정식 가수가 됐다. 수많은 주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고 호응을 해주어 가수가 될 수 있었다. 무대에서 노래 한 곡, 한 곡 부를 때마다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이젠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들이 어쩌면 더 많다. <별>은 내게 희망이고 꿈이다. 어려서 많은 고생을 하며 살았지만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지 않았나 싶다. 살아온 세월 중에서 특히 10대, 20대 세월이 내겐 <소중한세월>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내가 가장 힘들 때가 내게는 가장 소중한 세월이 된 것 같다. 아픔, 슬픔, 상처 등을 스스로 치유하며 정신적인 성숙을 갖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이제는 그녀가 웃을 수 있는 이유다.

가수 나다경의 신곡은 <별>과 <소중한세월>이다. “별은 항상 내 가슴에 있다고 생각한다. 늦게까지 장사를 하니까 나는 늘 밤하늘의 별을 보게 되는데 깜깜한 밤,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보면 모든 시름이 사라진다. 별은 내게 용기와 위안을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 늦었지만 꿈꾸던 가수가 되었다. 어떤 가수가 되고 싶은가?”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내게 노래는 내 삶의 전부다. 노래를 하면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느낀다. 무대에 서는 게 나는 너무 좋다. 내 노래를 듣는 그 누군가도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내 입으로 거듭 이야기하기 그렇지만 나는 참 힘들게 살았다. 남들처럼 순탄하게 지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으니 늦게라도 가수라는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그녀에게 “돈을 번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물으니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자식들에게도 조금은 나눠주고 싶다. 또 나처럼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다. 가수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나 나처럼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 지금은 몸으로 때우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지만 내가 번다는 게 비록 적은 돈이겠지만 사회 환원에 쓸 것이다” 그녀의 진심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녀의 어릴적 이야기를 하자면 조금 복잡하다. 아버지는 슬하에 11남매를 두었는데 어머니는 3남 2녀를 두었고 어머니로부터 첫째 딸이다. 서울안산초등학교 3학년을 다니다 남원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형제자매들이 위로부터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녀는 여관을 하며 남원에서 유지였던 집에 수양딸로 입양되었다. 수양어머니는 입양을 하면서 학교를 보내야하니 호적정리까지 해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나를 그 집에 데려다주면서 너는 이제 이집 딸이다. 우리는 이제 너의 부모가 아니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힘들어도 도망칠 수 없었다. 수양어머니 집은 남원에서 1년을 살다 안양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학업을 계속시켜주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자식을 낳지 못했던 수양어머니에게는 먼저 입양된 딸이 있었다. 하지만 딸 둘의 차이는 달랐다. 첫째는 딸로, 둘째딸 그녀는 식모가 되었다. 수양어머니는 딸이 필요했던 게 아니라 여관의 잡일을 하는 식모가 필요했던 것이다. 수양어머니의 성격은 거칠고 걷잡을 수 없었다. 11살짜리가 무얼 알았겠나. 많이 맞고 살았다. 매일 피멍을 누더기 옷처럼 몸에 입고 살았다.

때리는 핑계거리는 많았다. “내 짐은 여인숙 연탄광에 있었다. 어머니가 떠날 때 잊지 말라며 사진 뒤에 남원 주소를 적어 옷과 함께 싸 주었는데 그 짐을 뒤져 남원과 내통을 하고 지낸다며 사진도 빼앗고 엄청 심하게 맞았다. 며칠 동안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지만 또 맞는 게 무서워 다시 일을 했다. 군 장교출신인 아버지는 그녀를 무척 이뻐라 했다 하지만 수양아버지가 집을 비우면 많이 맞았다. 이렇게 3년을 지냈다.

그녀의 나이 13살. 어느 날 수양어머니는 술을 사오라고 해서 술을 사다 드렸는데 옆에 앉혀놓고 때리기 시작했다. 그날도 전날 맞은 게 풀리지 않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술이 만취되었는데도 술을 한병 더 사오라고 했다. 불안했지만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새로 사온 술을 반병쯤 비웠을 때 수양어머니는 갑자기 소주병을 깨서 눈자위를 찔렀다. 피가 철철 흐르는 그녀를 두고 수양어머니는 잠이 들었다. 그녀는 공포에 떨면서 잠을 잘 수 없어 방 한쪽에 쭈구려 앉아 눈물인지 흐르는 피 인지 모를 것을 닦아내며 밤을 새웠다.

다음날 아침. 술이 깬 수양어머니는 피를 흘리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전날 자신이 저지른 일도 기억하지 못했다. 병원에 데려가지도 않고 집에서 빨간약을 발라 치료했다. 수양아버지에게는 심부름하다 넘어졌다고 거짓말을 하라고 시켰다. 이때 생긴 상처는 30여년이 지난 10여 년 전에야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했으니 이제는 때리지 않겠지 하는 생각은 그녀의 오산이었다. 

다음날 수양어머니는 서울에 가고 없었다. 그녀는 평상에서 지난밤 못잔 잠에 빠져있었다. 일어나보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녀를 빙 둘러싸고 수양어머니가 한 짓이냐며 추궁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동네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 놀랍다. 나들이에서 돌아온 수양어머니는 동네에 떠벌리고 다닌다며 그녀를 또다시 때리기 시작했다. 이후로 툭하면 밤마다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어두워지는 것이 무서웠다.

며칠이 지난 뒤 수양어머니는 또 술을 사오라고 시켰다. 그녀는 너무 무서웠다. 같은 일이  반복 될 것이 두려웠다. 그 길로 술값 천원과 아버지 친구들이 오가며 몰래 쥐어주었던 용돈 삼천원을 쥐고 안양역으로 내달렸다. 수양어머니가 쫓아올까 두려워 안양역 근처 골목에서 날이 샐 때까지 덜덜덜 떨며 숨어있다 첫 기차로 남원에 내려왔다.

남원에 도착했지만 주소를 모르니 저녁에야 겨우 집을 찾아 들어갈 수가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녀의 행색을 보고 기겁을 했다. 공부를 하며 귀염 받으며 잘 지내는 줄 알았던 딸이 한쪽 눈에는 붕대를 붙이고 집에서 입던 누더기 옷을 입고 3년 만에 거지꼴로 나타났으니 복장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엄마와 나는 며칠을 붙잡고 울었다. 

바로 내려 올 줄 알았던 수양어머니는 몇 개월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어머니와 심하게 싸우고 나서 치료비는 다 댈테니 병원에서 치료비 진단서와 치료비용을 뽑아오라며 8만원을 놓고 갔다. 근처 병원에 가서 보니 그녀의 주민등록은 3년 전 이미 말소 되어 진단서를 뗄 수 없었다. 그 8만원으로 주민등록증을 복원하는데 다 쓰여 졌다. 다시 몇 개월이 흘렀다. 이제는 진단서를 뽑을 돈마저 없었다. 그렇게 30여 년 간 안경으로 가리며 트라우마로 남았던 상처는 유야무야로 잊혀졌다. 아버지 어머니가 배우지 못한 탓에 치료비조차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것이다. 

집에서는 또 다른 집에 입양을 보냈다. 새로 입양 간 그 집은 나에게 참 잘해주었지만 사정에 생겨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의집살이를 전전하며 번 돈을 집에 보내야했다. 그렇게 1년여를 버티다 16살에 다시 남원으로 내려왔지만 집안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동생들마저 초등학교를 마치고 공장에 보낸다는 말에 그녀는 다시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동생들마저 자신처럼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때 피어리스화장품 회사에서 부산 대우실업이라는 봉제공장 직원을 뽑았다. 몇 개월이 지나자 남원에서 한 차로 45명 정도 갔던 여직공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돌아가고 혼자만 남게 되었다. 그만큼 일도 힘들고 기숙사생활도 지겨웠다. 그녀도 집에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미싱사로써 인정을 받으니 선배들, 초보자들도 그녀에게 와서 일을 배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도’라는 직책도 받고 월급도 조금 오르니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공장에서 이를 악 물고 일하며 번 돈은 다 집으로 보내야했다. 오죽했으면 빵과 우유가 먹고 싶어 헌혈을 했다. 어느 날 이렇게 사는 자신이 너무 지겨워졌다. 정말 죽고 싶어 한 달에 열 댓 번까지 헌혈을 했다. 그러니 몸이 배겨낼 수 없었다. 나중에는 피가 안 나온다며 뽑아주지 않았다. 그러다 병이 나서 병원에 가니 결핵이라고 했다. 매일 밤 날이 새도록 잠을 못 잤다. 기숙사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렸다. 

결핵으로 죽을고비 넘겨

그녀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엄마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남원으로 내려왔다.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죽을 운명은 아니었던지 집으로 돌아와 보건소에 다니며 점차 회복되었다. 이때 오빠 친구였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가끔 약도 사오면서 결혼하자고 졸랐다. 그녀는 결혼하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은 법이 없어도 살만큼 착한 사람이다. 어쩌면 이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둘째를 낳고 결혼식을 올렸다. 1남 1녀를 두어 아들은 경찰이고 딸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회사에 다니고 있다. 손자만 넷이다. “아들 좋아하시는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무척 기뻐하셨을 것”이다. “내가 벌써  손주 넷을 둔 할머니가 됐다...하~ 세월이 참 무섭다”며 웃었다.

그녀는 결혼 후에도 하루도 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서야 3개월을 맘껏 쉬었다고 말했다. 한번은 딸 결혼을 앞두고 교통 사고가 났다. 병원에 갔는데 X-레이를 찍으니 이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계속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워 MRI를 찍으니 머리에 기생충이 있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식성을 따라 민물 회를 좋아하는데 기생충이 머리에서 자란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통사고로 한 달. 딸 결혼시키고 한 달을 쉬고, 다시 입원을 해서 한 달을 서울로 치료하러 다니며 맘껏 쉬었다며 웃었다.

기자는 그녀와 최근에 만나 몇 해를 지켜봤다. 조그만 체구에 늘 활기차고 적극적인,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그녀를 보면서 작은 행복을 느꼈다. 특히 처음 그녀의 노래를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어디서 그런 끼와 풍부한 감성이 나오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녀를 만나 이야기하면서 그 궁금증이 풀렸다. 슬픔과 고생은 비교대상이 없다. 나의 슬픔과 고생은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가장 힘들기 때문이다. 타인이 느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트로트에는 나무의 ‘옹이’처럼 모진 비바람에 가지가 부러지는 ‘꺾임’과 입은 상처를 치유하며 생긴 곳을 부드럽게 감싸며 ‘넘김’이 있다. 이처럼 트로트를 부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가 치유되며 생기는 옹이가 저마다의 음색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녀의 노래를 듣는 내내 감동했던 것들도 밑바닥에 깔린 그녀가 살아온 옹이 같은 ‘한’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성인이 되어서 힘들었던 일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입양 가서의 3년은 도저히 잊혀 지지 않는다. 지금도 깜짝 깜짝 놀란다” 취재를 하며 나는 그녀와 함께 울었다. 인터뷰 내내 평상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늠조차 되지 않는 일을 겪은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녀의 노래를 듣고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내줘야 한다. 그것이 우리들을 위해 고생했던 이 땅의 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지난 시간을 보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맙다. 고생했다. 당신의 희생에 감사한다”고 전하고 싶다. 그녀가 <별>을 바라보며 수없이 흘렸던  눈물방울만큼 이 땅에서 한 없이, 원 없이 노래를 부르며, 그녀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 모두가 행복해지는 <소중한세월>이 되기를 바란다. 그녀의 앞길이 즐거운 노랫소리 가득한 꽃길이 되기를 기원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