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평 시사논평] 장송곡 같은 프랑스 판 ‘노란 셔츠의 사나이’
[양문평 시사논평] 장송곡 같은 프랑스 판 ‘노란 셔츠의 사나이’
  • 양문평 고문
  • 승인 201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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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노란 조끼’ 시위가 무섭다. 지난달 17일 시작된 이 시위는 20일도 못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

지난해 39세의 나이로 대통령에 당선돼 ‘최연소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 온갖 수식어로 화려하게 출범한 마크롱은 어느새 광채를 잃은 채 ‘부자의 대통령’이나 ‘머리 좋고 경망스런 지도자’로 자리매김 되고 말았다.

그 노란조끼들의 소동을 보면서 반세기 전 한국서 유행했던 ‘노란 셔츠의 사나이’를 떠올리는 것은 생뚱맞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프랑스를 온통 노란 색 소동으로 몰아넣은 그 광경을 보자 한국 사회에서 갑자기 노란색을 친근하게 만든 그 노래가 떠오르는 이들도 없진 않으리라.

차이가 있다면 ‘노란 셔츠의 사나이’는 밝고 경쾌한 데다 사람들에게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듯 한 데 비해 ‘노란 조끼의 사나이’는 그 ‘가사’도 ‘곡조’도 암울한 점이다.

실제로 그 노란 조끼들을 ‘노란 셔츠’라고 부른 지식인들도 있다. 물론 그것은 우리의 ‘노란 셔츠’와는 딴판으로 그들을 나치에 비유한 것이다.

나치 돌격대들이 갈색 셔츠를 입어 ‘갈색 셔츠단’으로 불렀던 것을 상기시킨 것이다.

아무튼 거기엔 파리가, 프랑스가, 아니 세계 역사가 암울해지리라는 묵시록적인 분위기 같은 데가 있다.

그것은 그 시위로 사람이 4명이나 죽어서가 아니다.

파리에서는 무수한 시위와 혁명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4명의 희생자란 보이지도 않는 수치다.

프랑스 혁명의 첫날 바스티유 감옥 앞에서만도 경찰의 발포로 100 여명이 사망하지 않았던가.

그런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프랑스 혁명은 ‘혁명’의 대명사가 되어 영어사전에서는 그냥 ‘혁명(The Revolution)’으로 표기되고 있다.

그것은 혁명의 대명사가 아니라 혁명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파리는 혁명의 메카처럼 자리 잡아 왔다.

프랑스 혁명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과정에서 태어난 ‘라 마르세예즈’는 그 뒤에도 면면히 적극적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자코뱅주의를 찬양하는 노래로 애창되어 왔다.

그 리듬을 타고 프랑스는 1830년의 7월 혁명과 1848년의 2월 혁명을 거쳐 1871년의 파리코뮌으로 막을 내린 모양새다.

그러나 파리코뮌의 와중에서 ‘라 마르세예즈’가 사회주의와 결합된 ‘인터내셔널 가’의 가사가 나왔고 그것은 1888년 곡으로 완성돼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진다.

그래선지 프랑스의 혁명들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지만 거기엔 뭔가 여운이 있고 그래서 그걸 묘사한 예술작품에는 낭만이 있었다.

혁명의 족보에도 오르지 못한 1832년 파리의 ‘항쟁’도 그렇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로 겨우 그 존재가 알려진 이 항쟁도 처절한 이면에 어딘지 인간승리의 밝은 빛이 비치는듯 한 것은 문호의 예술성 때문일까?

독자들은 그 주인공 장 발 장을 따라 더러운 파리의 하수도를 헤매면서도 더러움보다 따뜻한 혈맥 같은 것을 느낀다.

파리의 그런 전통은 20세기가 돼도 바뀌지 않았다.

1968년 5월 파리에서 일어나 ‘68혁명’ 또는 ‘68운동’으로 불리는 사태도 그렇다.

이 혁명도 시작은 단순했다. 프랑스의 베트남 전 참전에 항의해 5명의 청년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리 지사를 습격한 것이 그 발단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시작된 시위는 파리는 물론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 나가다 국경을 넘어 서독과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 캐나다 등을 거쳐 일본에까지 파급돼 서독과 일본의 ‘적군파(赤軍派)’가 결성되는 데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

적군파라면 대부분은 끔찍한 기억에 몸을 떨기도 한다.

1972년 5월30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로드 공항(현재는 벤구리온 국제공항)에서 일어난 일본 적군파 테러가 좋은 예다.

오카모토 고조 등 3명의 적군파 대원들은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의 일환으로 자동소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져 24명이 죽고 7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들도 2명이 죽고 1명은 붙들렸다.

팔레스타인과도 이스라엘과도 관계가 없고 중동인도 아닌 일본인들이 왜 목숨을 내던지며 그런 참극을 벌였을까.

여기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거론할 것은 없다. 다만 그들의 행위에서 민족도 국가도 초월한 나름의 ‘세계정신(Weltgeist)’ 같은 것이 비친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독일의 경우도 그랬다. 68혁명과 그 여파로 생겨난 독일 적군파도 온갖 풍파를 일으켰으나 거기에는 새로운 바람이 있었다.

그래서 2차 대전에서 패하고도 뒤이은 냉전 속에서 지난날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 독일 사회가 구태를 벗어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68혁명 2년 뒤인 1970년 12월7일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이 바르샤바의 유태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도 그런 분위기의 연장선상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그것은 오늘날 위대한 장면으로 칭송되지만 막상 서독에서는 그다지 평이 좋지 않았다. 독일인들의 자존심을 팽개쳤다는 비난의 소리가 더 컸다.

당시 서독의 여론조사에서도 찬성 41%에 반대 48%였다. 그러나 민족적 자부심이 센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그 41%의 찬성을 이끌어 올린 것은 68혁명의 여파라 할 수 있었다.

그 무릎꿇기에 대한 국내의 반응은 그처럼 시큰둥했으나 그로 인해 유럽에 화해의 물결이 넘쳐 서독의 경제도 도움을 받았으니 그것은 ‘시대정신(Zeitgeist)’을 선도한 셈이기도 했다.

긴 말이 필요 없이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에서 출발한 파리혁명이야 말로 시대정신과 세계정신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베트남전의 씨앗은 프랑스의 제국주의가 뿌린 것 아닌가.

그 프랑스 제국주의의 심장부였던 파리에서 “호치민(胡志明) 만세!”나 “우리의 영웅 보응우옌잡(武元甲)!”이라는 함성이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던가.

그 두 인물은 1954년 베트남의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 줌으로써 프랑스를 내쫓고 뒤이어 미군과 체인징 파트너 식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주역들이 아니었던가.

파리의 그런 현상은 파리 젊은이들의 기억이 나빠서는 아니다. 그들은 국가나 민족보다는 세계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파리의 노란 조끼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유류세 가격표? 그것만은 아니다.

그것만이라면 마크롱이 유류세 인상을 접고 백기를 드는 순간 멈춰야 하나 많은 시위자들은 “마크롱 퇴진!”까지 외치고 있다.

그래서 전문가들도 그 원인을 캐기에 바쁘다.

일부 분석가들은 번영하는 도시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중하층의 분노가 중추를 이루고 있다고도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그 실상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이번 시위는 어딘지 허무주의적이고 민주주의 제도와 성공 그리고 부에 대한 끝없는 증오 같은 것이 깔려있다는 분석이다.

그런 이들에게 성공의 대명사 같은 마크롱은 증오의 대상으로 적격이다.

그래서 22년간 파리에 거주하면서 수많은 시위를 목견하고 기사화 했던 영국 가디언 지 기자 존 리치필드는 “68혁명 당시의 낭만이 아닌 절망이 거리를 채우고 있다”고 했다.

그 절망은 개선문에 낙서를 하고 마리안 상의 눈을 부셔 마리안을 해적처럼 만드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지금까지 파리의 수많은 시위에서 개선문 같은 상징적 문화재를 손상시켰다는 말은 없다. 파리의 ‘노란 샤쓰’들은 민족의 긍지도 증오스러운 것이다.

이번 시위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극좌파와 극우파들이 동참한 것이다. 그래서 시위에 어떤 일관된 이념도 찾기 어렵다.

한 가지 특징은 과격하다는 점이다.

그런 것이 오늘날 미국 국경에 몰려든 ‘캐러밴’이나 난민들의 모습과 함께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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