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평 시사논평] 영국의 ‘외로운 고립’- 브렉시트 처리 임박
[양문평 시사논평] 영국의 ‘외로운 고립’- 브렉시트 처리 임박
  • 양문평 고문
  • 승인 2018.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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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게 이번 12월은 역사적 분수령에 서는 달이다. 영국 의회가 11일 영국의 유럽연합(EU)탈퇴를 의미하는 브렉시트(Brexit)의 마무리를 위해 EU와 타결한 합의안을 처리할 예정이어서 다. 의회가 그 합의안을 승인하건 부결하건 영국은 역사의 큰 방향전환을 하는 것이다.

합의안이 승인되면 영국은 반세기 동안 몸담았던 EU를 떠나는 것이기에 많은 영국인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영국의 변호사 1400명이 브렉시트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하지만 2년 전의 국민투표를 장난처럼 없던 일로 치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럴 경우 영국 역사는 또 다른 소용돌이를 겪을 것이다. 따라서 그 합의안의 승인 여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으나 영국의 처지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일단 여러 이웃이 함께 놀던 판에서 한 사람이 빠져 나가는 것 아닌가.

영국과 EU가 11월25일 브뤼셀에서 그 협상안에서 합의했을 때의 분위기도 그랬다. 지난 2년5개월 동안 양측이 밀고 당기며 어렵게 합의안을 마련했으니 우선 한숨 돌리며 흥겨워 하는 게 정상이지만 그런 분위기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EU의 행정수반 격인 장 클로드 융커 집행위원장은 기자들에게 “오늘은 슬픈 날”이라고 말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이날 특별 정상회의가 끝난 뒤 기자들에게 “영국이 45년 만에 EU를 떠나게 된 것은 비극이다”고 말했다.

보다 눈길을 끈 것은 그 뒤를 이어 기자회견을 한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의 말이었다. 그는 “일부 영국 국민과 여러 유럽 국가 지도자들은 영국의 EU탈퇴에 서운함과 슬픔을 느낄 수 있으나 나는 슬프지 않다”고 한 것이었다. 그것은 뭔가가 거꾸로 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어느 가족이 떠나자 이웃들이 울먹이며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랭사인을 부르는데 막상 떠나는 사람들은 담담하거나 키득거리는 듯 하는 모양새여서 다. 물론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순진한 정도를 넘어 어리석은 것이다.

정상급 정치가이자 외교관들의 말을 어찌 포장만 보고 믿는단 말인가. 슬프다거나 비극이라고 한 이들의 속내도 알 수 없듯이 슬프지 않다고 한 메이의 말도 그 진심을 알기는 어렵다. 어쩌면 메이는 슬퍼할 여유도 없는지 모른다. 합의안이 타결된 것은 EU와의 일일뿐 그 합의안이 영국 의회에서 통과될 지는 아무도 모르니 아직도 앞길이 첩첩산중이다.

그래서 그 가부를 반반으로 보면 그의 정치 생명도 생사가 반반인 셈이다. 그런 정황을 보면 새삼 영국이 지난날 보검처럼 자랑했던 ‘명예로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명예로운 고립이란 무엇일까.

섬나라인 영국이 지난날 ‘구라파(歐羅巴) 전쟁’으로 알려진 유럽 대륙의 이전투구로부터 초연한 위치에 자리 잡은 채 유럽 국가들에게 이런저런 훈수까지 하던 모습이다. 물론 섬나라라고 대륙의 오물이 튀겨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실은 오늘날 영국의 주인을 자처한 앵글로 색슨 족도 족보를 따지면 대륙에서 영국에 침입한 게르만 계의 앵글로 족과 색슨 족이 아닌가. 거기에다 바이킹 혈통의 노르만 족도 영국을 침입해 영어를 한 글자도 몰랐다던 윌리엄 1세가 ‘정복왕’으로 근대 영국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은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친 이래 ‘명예로운 고립’을 즐길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기마군단도 도버 해협 앞에서 발을 구를 수밖에 없었고 히틀러도 그 바다를 건너지 못한 채 돌팔매질이나 하듯이 V-2로켓을 쏘아야 했다. 그런 한편으로는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써 위세를 누렸으니 그 ‘고립’이란 표현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 ‘고립’이란 말은 시끄럽고 피비린내 나는 유럽 대륙의 진창으로부터 거리 두기 정도로 보는 게 순리다. 그러나 끊임없이 바뀌는 세계사 속에서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제국도 나이가 들면 고목이 되거나 풍화작용으로 바스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미국이나 소련처럼 신흥 강대국이 생겨나기도 했다. 여기에다 지난날 식민지처럼 잠자던 거인인 중국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다 보니 영국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의 전승국이라는 호칭이 무색하게 한 체급 아래의 강대국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그런 영국이니 이제는 ‘명예로운 고립’이 아닌 ‘외로운 고립’이라는 말이 더 실감나게 됐다. 장 클로드 융커는 슬프다고 했고 앙겔라 메르켈은 비극이라고 했지만 영국이 없는 EU는 존립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 것은 아니다. 영국이 탈퇴하겠다고 말했을 때부터 EU 국가들은 극구 말리는 표정을 지었으나 “정 가겠다면 할 수 없다”는 자세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래서 슬프지 않다고 강변한 테리사 메이의 말도 어딘지 오기 같은 게 느껴진다.

영국의 그런 무력함은 다른 데서도 비쳤다. 지난 10월 말 앙겔라 메르켈이 국내 정치상의 문제로 늦어도 2021년 9월까지는 은퇴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매스컴들이 “유럽을 하나로 뭉친 여왕의 퇴장”이라고 아쉬워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그 ‘여왕’이라는 표현이다. 여왕이라면, 특히 유럽에서 여왕이라면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아니었던가. 그는 1953년 6월 여왕에 즉위한 이래 20세기 후반은 물론 21세기 초까지 ‘세계의 여왕’같은 존재였었다. 그는 영국이 최강대국의 자리에서는 밀려났으나 아직 ‘대영제국’ 여운이 짙게 배어 있던 시점에 즉위한 이래 ‘여왕’의 대명사로 군림해 왔다.

그의 즉위 중 영국은 1956년에는 수에즈 운하에 대한 사실상의 소유권을 잃고 1987년에는 홍콩을 중국에 반환해 드디어 ‘해가 지는 나라’가 되는 등 대영제국의 저녁놀마저 스러져 갔으나 엘리자베스 여왕의 존재는 그 시간에 비례해 더 뚜렷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메르켈이 유럽 문제로 머리를 싸맬 때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해 영국 수뇌부는 영국 문제로 머리를 싸매는 수준이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유럽의 왕관’이 옮겨간 모양새였다.

사라진 것은 여왕만도 아니다.

2차 대전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46년에 “유럽 대륙이 평화와 안전 그리고 자유 속에서 살 수 있도록 유럽합중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기염을 토해 EU의 전신인 유럽공동체(EC)의 창설에 주춧돌을 놓다시피 한 윈스턴 처칠 같은 거인의 모습도 사라졌다. 아니 그 처칠의 나라가 맨 먼저 EU를 빠져 나오는 형국이 됐다. 처칠의 역설 가운데 현실화 된 것도 있다. 그는 2차 대전 후 프랑스와 독일이 싸우지 말고 공존해야 유럽이 평화롭게 된다고 역설한 것이다.

유럽 대륙에 바탕을 둔 그 두 나라는 마치 처칠의 당부에 따르듯 합심해서 EU를 끌어 가 게 됐고 영국이 그 기세에 밀린 결과가 브렉시트로 나타났다는 게 정설처럼 통용되고 있다. ‘독·불’을 말할 것도 없이 독일만도 GDP에서 영국을 앞서는 판이다. 그런 상황에서 영국이 곧잘 취할 수 있는 것이 섬나라 특유의 ‘고립’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은 1534년 로마 교황이 헨리 8세의 이혼을 수락하지 않자 아예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독립한 국교회를 창립함으로써 ‘종교적 브렉시트’를 단행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으나 섬나라 영국의 특성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다. 영국이 EU로부터의 브렉시트를 단행한 동기도 그런 면이 없지 않다.

영국이 내건 가장 큰 이유는 (1)다른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차지하고 그 바람에 복지 지출이 늘어난 점 (2)회원국 가운데 4번째로 많은 분담금을 내는 데 비해 혜택은 적은 점 (3)정치 경제적 공동체인 EU에 통합되는 데 대한 국민들의 반감 등이 지적되고 있다. 여기서 (1)과 (2)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이고 그것으로 다른 회원국들도 겪을 수 있는 일이자 협상으로 해결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3)으로 영국인들이 ‘대륙인’이 된다는 데 대한 거부반응이 바탕에 깔려 있고 그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새삼 영국이 지난날 ‘유럽’을 남의 대륙을 보듯 부르거나 그냥 ‘대륙’으로 불렀던 역사를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그들은 고고하게 다시 그 대륙에서 거리 두기를 하지만 그것이 웅장하지는 못한 채 고독한 고립으로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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