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GM이 2대 주주인 산업은행도 모르게 ‘단독주총’을 열고 연구개발부문을 독립 법인으로 분할시키는 안건을 가결했다. 지분 76.96%의 GM본사를 비롯한 우호주주 대리인이 참석한 이 주총은 비록 2대 주주라고는 하지만 지분이 17.02%뿐인 산은의 출석 여부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다만 지난 5월 8000억원의 신규자금 지원과 함께 확보한 거부권을 행사할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러나 이번 연구개발 부문의 독립법인화 안건이 과연 비토권 대상이 되느냐 에는 의견이 엇갈린다. 따라서 비토권이 봉쇄당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는 이번 주총 결과를 뒤집을 수 없다.
연구개발 독립 법인 출범이 이처럼 핫이슈로 떠 오른 것은 경영부진에서 벗어날 묘안 찾기에 실패한 한국 GM이 철수프로그램을 가동한 첫 걸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생산부분과 R&D부문을 쪼갰다가 여차하면 생산부분은 철수하겠다는 뜻이 담겨있다는 것이 산은과 민노총을 비롯한 국내 시각이다. 지난 5월 증자와 함께 산은의 8000억원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경영정상화에 나섰으나 결과는 신통하지 않다. 5월 이후로도 차 판매는 15%나 줄어 올해도 1조원의 적자가 예상되는 ‘위기’를 맞고 있다.
글로벌 기업으로써 한 때는 세계 자동차산업을 리드했던 GM이 이처럼 고전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08년 금융위기에 있다. 당시 미 정부는 구제금융과 함께 47개 공장 가운데 17곳을 폐쇄하고 생산직 2만 1000명을 감원했다. 그렇게 해서 미국 본사는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해외 GM은 여전히 위기가 계속 되었다. 특히 2010~2012년 2년간 호주 GM은 호주 정부로부터 친환경 차 연구개발 명목으로 4억2500만 호주 달러와 따로 인건비 지원까지 받아 연명했다. 그러다가 2013년 12월 호주정부가 추가 자금지원을 거절하자 곧 바로 공장을 폐쇄, 호주에서 철수했다. 한 때‘우리는 여기 남을 것이다’라는 TV광고까지 내보내던 호주GM은 하루아침에 얼굴을 싹 바꾼 것이다.‘앞으로 10년간 한국에서 생산 하겠다’던 GM의 약속에 의구심을 품는 이유다.
실제로 철수할지 여부를 떠나 이번 GM사태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질책이 담겨 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하나는 지난 5월 GM정상화 협상에서 한국 측 자세가 결과적으로 지나치게 안일했다는 점이다. 이미 호주에서 ‘먹 튀’를 자행하기 이전인 2014년엔 러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서도 공장 두 곳 가운데 하나를 정리한 전력이 있는 데 다가 한국에서도 군산공장을 폐쇄했다. 이런 ‘전과’가 있는 GM을 지원하면서 얼마나 많은 빈틈을 노출했기에 불과 다섯 달 만에 제2 주주인 산은을 왕따 시키면서 까지 법인 분할을 강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 ‘기업규제’에 관한 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한국정부와 공공기관이 어째서 GM을 상대로는 보다 촘촘한 그물을 만들지 못했을까?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또 일이 터지자 산은은 지원하기로 한 8000억 원 가운데 남은 4000억 원의 집행 중지를 검토한다는 입장이다. 인천 시 당국은 GM에게 50년간 무상으로 빌려주기로 한 자동차 주행시험장을 회수할 수도 있다는 강수를 두었다. 그러나 경영정상화를 위한 피치 못할 조치라고 하는 GM입장이 국제적으로는 보다 설득력이 있다. 산은과 인천시가 당초 약속을 뒤엎는다면 오히려 한국당국이 국제적으로 ‘믿을 수 없는 상대’로 전락할 위험이 없지 않다. 특히 ‘GM철수설’의 배경은 강성 노조의 경영압박이 자리 잡고 있음도 GM이 국제적으로 큰 소리 칠 수 있는 여지로 작용한다.
두 번째로 GM이 겪는 진통이 GM한 곳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자동차업계 전체가 앓고 있는 ‘한국형 강성 노조 병’이라는 점이다. 수소차, 자율주행차 등 차세대를 겨냥한 신개발차는 각종 규제에 묶여있고 기존 완성차 수출은 감소세로 돌아 섰는 데도 노조는 임금인상과 고용승계를 앞세워 걸핏하면 파업에 나선다. ‘낮은 생산성에 높은 임금’을 견디어 낼 수 있는 기업은 이 세상에 없다. 오직 강성 노조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대마불사’논리가 있을 뿐이다. 격렬한 노동분쟁을 겪은 쌍용자동차가 인도 마힌드라에 인수 된 뒤 경영이 안정 된 것이나 르노삼성이 비교적 견실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은 강성노조의 주 타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기아차는 한국자동차 산업의 심벌이며 GM은 글로벌 기업이다. 민노총이 건곤일척, 한 번 붙어 볼 가치가 충분한 규모이다. 바둑으로 치면 쌍용과 르노삼성은 언제나 버릴 수 있는 ‘가벼운 돌’인데 반해 현대차와 GM은 결코 죽여서는 안 되는 ‘대마’이다.
이런 대치 상황 속에서 결국 무너지는 것은 국가기간 산업인 자동차 산업뿐이다. 현대기아차의 감산과 인건비 상승을 견디다 못한 차부품업계가 3조원의 긴급자금 요청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 바로 주목해야 할 현실이다. 자동차 산업은 완성차 조립업체를 정점으로 한 피라밋 형의 부품 협력 체제가 특징이다. 피라밋 한 쪽에 구멍이 뚫리면 이미 피라밋으로 존재가치가 없어진다. 무려 반세기에 걸쳐 갖갖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구축한 지금의 피라밋을 무너뜨리려는 것은 서로가 망하자는 뜻밖 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은 GM사태라는 나무 한 그루에 매달리기보다 자동차산업이라는 거대한 숲으로 시선을 옮겨갈 마지막 기회라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