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평 기자의 시사 논평] ‘선동렬’ 국감이 반가운 것은…
[양문평 기자의 시사 논평] ‘선동렬’ 국감이 반가운 것은…
  • 양문평 고문
  • 승인 2018.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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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국회의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열린 야구 국가대표팀의 선동열 감독에 대한 국정감사의 ‘인기’는 아직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래서 ‘야알못’(야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알게 되는 국민도 늘어나고 있다. 그 야알못은 선동열에게 엉뚱한 질문을 한 국회의원들을 지칭한 것이다. 그것은 너무 민망한 일이다. 국민의 대표로 국정을 감독해야 할 선량들이 놀림거리가 되다니…

그들을 두고 신나게 시시덕거리는 국민들도 뒷맛은 씁쓸해야만 나라에 희망이 있다. 그럼에도 그 해프닝은 반가운 데가 있다. 민주국가의 국민들에게 필수적인 ‘국민교육’의 기회를 주어서다. 국회가 국정을 감시한다면 국민은 그 국회를 감시하는 한편 의원들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아는 상식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국민들이 국회를 제대로 감시했다면 세월호 사건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고 군용 헬리콥터가 종종 땅을 들이받는 사건도 좀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세월호 참사 같은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성격의 국정감사가 열려봤자 국민들이 관심을 보였을지는 의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선박사고의 가장 큰 원인의 하나인 과적을 둘러싼 비리를 어느 의원이 추궁할 경우 직업상 그 부문과 관련이 없는 국민들은 대부분 TV채널을 돌려버리리라. 군용헬기와 관련된 국감에서 “미국의 A사에서 개발한 ‘독수리’헬기는 XXX달러고 독일의 B사에서 개발한 ‘뻐꾸기’헬기는 OOO달러라는데…”라는 식의 발언이 나와도 마찬가지다. 

실은 그런 말이 나오기 전에 채널을 돌리지 않은 것만도 대견한 일이다.하지만 800만 야구팬을 자랑하는 야구와 관련한 국감은 출석율도 학습 분위기도 최상인 국정교육의 현장인 셈이다.그런 판에 ‘야알못’의원들이 야구에 관해 마구 질문을 하는 것을 본 팬들은 “공자 앞에서 문자 쓴다” 고 실소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공자’란 평생을 야구로 보낸 선동열이 아니라 침식을 잊다시피 야구 구경을 해온 자신들이다.

의원들은 왜 타율 등 기록상 더 우수한 선수를 두고 낮은 선수를 선발했느냐고 따졌다. 그것은 얼핏 어느 대학 총장에게 “왜 수능성적이 높은 학생을 두고 낮은 학생을 입학시켰느냐”고 따지는 것처럼 무리가 없어 보인다.그러나 하나의 야구팀을 조직하는 것은 대학 입학생을 모집하는 것과 다르다는 상식을 그들은 모른 셈이었다.

그 국감을 보고 한 야구인이 “4번 타자들만 모아 논다고 강팀이 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한 것은 야구에서만 통용되는 상식이 아니지 않는가. 그들은 마치 요리사에게 왜 고급 캐비아를 두고도 많이 넣지 않았느냐고 닦달하는 식의 넌센스를 범한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야알못 소동은 차라리 애교에 가까운 것이다.

의원들이 야구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두고는 국정에 바빠서라는 그럴듯한 변명거리도 있다.문재인의 경우도 최동원의 경남고 선배로써 자연스레 주어지는 열렬 야구팬이라는 호칭을 넘어 변호사 시절 야구계에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정치권에 들어간 이후에는 야구와 멀어졌으리라.

그날 의원들이 보인 진짜 실수는 야구가 아니라 국정상식을 외면한 점이다.손혜원 의원이 프로야구계 인사인 선동열이 국가 대표 팀 감독으로 선정된 것을 두고 시비를 건 것이 그 한 예다.그것은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의 역량이 미흡해 프로야구협회(KBO)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한국야구계의 구조를 두고 시비를 건 섬이다. 물론 그 문제에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굳이 그 문제를 제기하려면 바로 그 국감현장에 출석해 있는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따져야 한다는 상식을 몰랐을까 외면했을까.

어찌됐건 그 의원들이 ‘야알못’이 아니라 ‘국정을 알지 못하는’이라는 뜻의 ‘국알못 의원’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그것은 도종환 장관에게 어느 의원이 “왜 문화체육과 연관도 없는 관광까지 한 부에서 담당하느냐?”고 묻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 의원들에게 어느 기자가 “그처럼 국정을 모르면서 어떻게 의원이 됐느냐?”고 질문하면 같은 논리로 그 기자는 ‘국알못 기자’나 ‘세상을 알지 못하는’이라는 뜻의 세알못 기자라는 딱지를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우스꽝스러운 일이 있었어도 그 날의 일이 반가운 것은 우리나라의 체육계가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국감의 주제와는 거리가 있지만 이제 한국이 스포츠의 승리에 배고파 허덕이는 세월을 극복한 느낌이다. 지금까지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체육지도자가 금전비리 등 뚜렷한 부정도 없이 그처럼 곤경을 치렀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체육계가 승리의 배고픔을 벗어난다는 것은 경제로 치면 보리 고개를 극복하는 것에 비견할 수 있다.

배가 불러야 예절을 안다는 말을 체육에 대입시키면 승리의 허기를 극복해야 스포츠맨십을, 다시 말해 스포츠의 가치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나라의 스포츠계가 승리에 굶주리면 어찌 될까. 그 부작용은 일일이 거론할 수도 없으나 실감나는 예는 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여자 배구 결승에서 일본 감독이 보인 해프닝이 좋은 예다. 당시 소련 팀과 대결한 이 시합에서 일본 감독은 어느 선수가 실수를 하면 작전타임을 요청한 뒤 그 선수를 전 세계 TV가 중계하는 현장에서 발로 차기까지 했다. 그것은 그 배구감독이 아니라 일본의 망신이었고 경기의 승리로도 씻어지지 않는 얼룩이었다. 그럼에도 자칭 ‘극동의 마녀’라는 일본 여자 배구팀이 우승을 한 순간 그 감독은 영웅이 됐다.

그는 남자도 아닌 여자 선수들을 발로 찬 야만적인 ‘불량배’가 아니라 노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장군과 동렬에 선 셈이었다. 그가 여자 선수를 찬 것도 노기가 여순 공략전에서 자신의 두 아들을 포함해 수많은 희생자를 낸 것에 비견되는 식이었다. 그랬던 일본이 불과 20여년 뒤 한국서 열린 86아시안게임에서 선수들의 자비출전을 실시한 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일본이 메달의 보리고개를 넘어섰다 싶어 무척 부러웠다. 그러다 보니 그 대회의 금메달 성적은 중국(94) 한국(93) 일본(58)의 순이었으나 내 기분은 한국이 일본에 58대 93으로 진 기분이었다.

메달을 충분히 따지 않고도 메달 기근을 벗어나는 나라도 있다. 프랑스의 경우 올림픽 금메달과는 인연이 먼 셈이나 허덕이지도 않고 분발하는 기색도 없다. 그래도 프랑스는 샤를 보들레르나 빅토르 위고의 나라이자 오귀스트 로댕의 나라로 즐겁게만 보인다. 물랑루즈(빨간 풍차) 주점이 네덜란드에서 정서가 야릇한 빈센트 반 고흐까지 끌어들이고 그 고흐는  다리가 이상한 앙리 드 로트레크가 ‘몽마르트르의 빨간 풍차’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나라이기도 했다. 그 빨간풍차는 지금도 돌고 그래서 프랑스인들에게 배고픔은 없다.

우리도 이제 스포츠에 국운이 걸린 듯 메달에 걸신 든 나라의 모습을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정착되면 국위상승이라는 명목으로 스포츠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병역특혜도 지양될 수 있고 그렇다면 국가대표선수의 병역면제라는 이번 국감의 주제는 원천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남북관계가 개선돼 병역의무라는 용어 자체가 고어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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