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작가 조기주 "나만의 관점을 하나의 예술로 표현하다"
[인터뷰] 작가 조기주 "나만의 관점을 하나의 예술로 표현하다"
  • 조나단
  • 승인 2018.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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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택관 작가의 추천으로 지난 주말 한 작가를 만나기 위해 압구정으로 향했다. 처음 가본 압구정로에서 평소처럼 핸드폰을 보면서 걸어갔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 같은 장소에 있는 전시장을 찾아갔다. 마치 <해리포터>라는 영화속 주인공 해리포터가 처음 해그리드와 함께 카페 <다이애건 앨리>를 찾아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영화처럼 붉은 벽돌은 없었지만 들어가자마자 양벽면에 보이는 새하얀 벽돌들과 그 앞에 자리하고 있는 다양한 시멘트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오택관 작가가 그렇게 추천했던 작가와 인사를 나누게 됐다. 짧은 머리와 세련된 패션, 그리고 미모를 뽐낸 그 작가는 바로 조기주 작가 겸 교수였다. 웃으면 복이 온다고 했던가, 처음 인사를 나누면서부터 큰 웃음을 짓고 있던 조기주 작가는 인터뷰를 하는 내내 시종일관 해맑았다.

해맑게 웃으며 "인터뷰를 한다고 해서 옷두 신경썼고, 화장도 좀 했다"고 말했다. 너무나 잘 어울리는 패션과 센스. 60대라고 말하던 나이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딸이 나보고 자기보다 두 살 많은 것 같다라고 했다"고 좋아하던 작가 조기주. 어머니 '이경순' 화가와 함께 반 백년 한국 예술계에서 종사하고, 노력해온 사람 조기주. 예술가 조기주의 세계를 엿보았다.

 

 

 

- 사람 혹은 작가 조기주를 소개하자면.

▲ 일단 조기주는 작가이기도 하면서 교수인 사람이다. 일단 교수로서는 단국대학교에 교수가 된 것은 89년도다. 그러니까 30년째 단국대학교에 있는 교수다. 그리고 84학번이 서양학과 1회다. 1회부터 지금까지 서양학과를 지킨 교수라고 보면 된다. 시간 강사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서 82년부터 덕성여대를 시작으로 시간강사를 시작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선생으로서 너무 오래 했다. 교수로서는 학생들을 사랑하고 뭐 학생들은 나를 안 좋아해서 그렇지만, 학생들을 사랑하고 같이 눈높이는 맞추고 싶어 하는, 나이는 좀 많지만 마음을 젊은 그런 사람이고 싶고, 그런 사람인 것 같다. 제 딸이 항상 저한테 얘기하는데 "엄마는 철이 좀 안 들어서 나보다 딱 두 살 많다"라고 했다.  

작가로서는 79년 대학을 졸업했다. 이대 서양화 학과를 졸업했는데 미국에 있는 학교를 갔고, 그러니까 그때부터 이제 작업에 좀 변화가 시작됐고, 미국에 가니까 나란 존재는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굉장히 많아져서, 그런 어떤 나의 정체성을 찾는 거에 포커스를 맞춰서 노력했었고, 지금까지도 노력하고 있는 그럼 작가다.  

 

 


요즘엔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중화되어 있다. 저는 생각해보면 뉴욕에서 공부하던 당시 모더니즘 말기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초기 사이에 걸쳐서 이들의 변화와 발전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모더니즘적인 음질을 추구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요소를 합친 그런 작가인 것 같다. 다른 작가들과 다르게 제가 정말 젊고 호기심이 많다. 시멘트 작품도 1차와 2차, 그리고 3차까지 발전시키고 진화시키고 있다. 이번에 시멘트 작품이 뭔가 자리를 잡은 느낌이 든다. 발전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작가일 뿐만 아니라 제가 영화도 만들고, 1997년에 뉴욕에 교환교수로 가게 됐는데 포토샵이나 프리미엄 이런 걸 컴퓨터학원을 등록해서 배웠다. 왜냐하면 보통 우리 세대는 이런 거에 익숙하지 않는데,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내가 뭔가 이런 거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학생들에 뒤처지는 것 같다. 그리고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싶어서 컴퓨터를 배웠다. 그래서 그런가 학생들하고 대화가 잘 통한다. 학생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겠지만.(웃음)  

그리고 작가로서 작품에서 여러 가지 주제가 있지만, 제가 원을 주제로 사용하고 있지만 완벽한 원 자체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약간 부수는 그런 타입인 것 같다. 원을 부수다 보니 정지된 상태에서의 원은 운동감이 없고 뭔가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평론가 선생님이라던가, 전문가 선생님들도 그런 말씀을 해주셨다. 그래서 운동감을 보여줄 수 있는 영상을 사용했던 것 같다. 뉴욕에서 1년 있다가 98년 돌아와서 99년 개인 작품을 하는데 그때 처음으로 제가 영상 작업을 했다.  

 

 

'The miracle of life'라고 미국에서 에이미상을 받은 정자나 난자한테 가는 모습을 촬영한 필름이 있는데, 그 필름의 일부분을 가지고 와서 제 작품하고 합성을 시켰다. 그렇게 만든 작품을 공개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하더라. 굉장히 잘 어울리다는 평이 많았다. 그래서 영상을 시작했고, 영상을 시작하니 관점이 달라지더라. 그래서 여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신체에서 동그라미, 눈동자나 목구멍 콧구멍 귓구멍 젖꼭지같이 구멍이기 이전에 '원'인 걸 가지고 촬영을 시작했다. 여기에 올챙이 있지 않나 올챙이들을 촬영해 두 가지를 합성했다. ABC라는 영상을 만들게 됐는데, 영상을 만드니까 "어? 이 영상엔 스토리가 없어"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스토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단편 영화를 구상했다. 마침 그때 우리 과에 시간강사 나온 선생님이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어봤다고 하셨다. 그래서 같이 해보자 했는데, 우리가 돈도 한 푼 없고 하다 보니 배우부터 스태프 모두 우리 학교 학생과 교수님들이 맡게 됐다. 당시에 있던 돈을 다 모아서 500만 원 가지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단은 제가 신라와 전생과 환생을 주제로 글을 썼다. 지금은 전생과 환생, 신라 등을 주제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많은데 그때 당시에는 이런 작품이 없었다. 이게 신라가 주제가 되니까 한복이라던지 그 시대의 옷이 필요했다. 의상을 사려고 하니 한 벌에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 하더라. 그런데 그때 SBS <선화공주>라는 작품이 막을 내린 상태였다. 제 친구 중 한 명이 의상 디렉터 이런 걸 하고 있었는데, 애원해서 한 벌에 몇백만 원짜리 옷인데 세탁해주는 조건으로 옷을 빌려왔다. 옷을 빌리니까 또 분장이 필요하지 않나. 분장은 제 제자 중에 한 친구가 파리에서 분장을 배워온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영화의 내용은 전생에선 신라 시대의 남자와 여자가 있는데, 집안이 좋은 여자에 비해 남자는 아무것도 없으니 당나라로 유학을 가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남자가 돌아왔는데 스님이 돼서 돌아온 거다. 여자는 긴 시간을 남자만을 기다렸는데 스님이 돼서 돌아오니 깜짝 놀라서 부처가 됐다는 게 전생이고, 현재에선 단국대학교 무용과 다니는 여자와 그림을 그리는 남자가 있는데, 남자가 "내가 중국으로 유학을 가는데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줘"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여자가 "아니야. 난 내 삶을 찾아가겠어. 그러니까 난 너를 안 기다릴 거야"라고 말하면서 이게 연결되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그런 작품이었다. 

 

 

Untitled-1490-kt _ cement, copper plate, pigment, graphite, glue, acrylic colors, resin _  diameter 90cm x 두께 10cm _ 2014



- 20분짜리 단편영화라고 하셨는데, 그 안에 다 담기엔 힘들었을 것 같다. 요즘에야 이런 드라마나 영화가 나오는데 당시엔 이런 주제를 가지고 있는 작품들이 없었으니. 

▲ 그렇다. 영화에 넣고 싶었던 장면들이 있어서. 예를 들면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 사이에서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나누는 그런 장면을 찍고 싶어서 무작정 찾아가 촬영하기도 하고, 여주인공이 발레를 전공한 친구다 보니까 그 친구가 무대 위에서 발레를 하고 있는 공연장면도 찍어서 영화에 넣었다. 또 내가 작곡에 꿈이 있어서 영화 작곡도 했다. 그렇게 영화를 다 만들어서 공개했는데, 영화를 본 사람들이나 평론가 선생님들 모두가 이해를 못 하더라. 그래서 "영화를 세 번은 봐야 된다"라고 말해줬다. 사실 당시에 약간 부끄러웠다. 

영상을 처음 찍기도 했고, 단편영화답게 20분으로 전부 자르다 보니까. 내용이 맞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작년에 이영애가 나왔던 드라마 <신사임당>도 이런 내용이더라. 우연하게 드라마를 보게 됐는데, 내가 했던 구상했던 작품과 너무 똑같더라. 그런데 그 드라마도 일반 대중들이 다 못 따라가더라. 더 많은 시간 동안 스토리를 설명해주는데도 못 따라가는 걸 보고 내 작품도 그래서 못 따라 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다시 한 번 보게 됐는데, 약간 촌스러운 게 지금은 너무 좋아 보이더라. 내가 그 어려운 주제를 작품으로 만들었구나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더라. 

 

 

Untitled-1833-mfc, iron net, graphite, pigment, glue, acrylic colors on cement panel, 33 x33 cm, 2018


- 영화 이후에 다른 작업을 했나 

▲ 영화 이후에 영화를 애니메이션화했다. 그렇게 작업을 했는데 하고 나니 내가 이제 또 난 화가니까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시 그림으로 돌아와서 2008년부터 'Strange of life'라는 전시를 시작했다. 사람이 멋지게 살고 싶지만,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 싶지만 그 삶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얼룩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작업실에 남아있던 말라빠진 물감 덩어리나, 작업을 하고 남은 물건들이 작품, 작업의 소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미술로 다시 돌아왔다. 

2014년엔 금호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게 됐는데, 총 3개 층에 작품을 올렸었다.  사실 1층과 2층 두 개 층만 작업을 올리려고 했었는데, 당시에 미술관 큐레이터가 제 작업실에 와서 작업한 걸 보더라. 보더니 또 영상작품이 굉장히 특이하다는 말을 했다. 제 나이 또래의 작가들이 이런 작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보고 영상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새롭게 영상을 만들게 됐다. 이전에 했었던 뭔가 똑같은 작업만 보여주긴 뭐 해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게 됐다. 내가 태극권 3단이다. 태극권을 많이 해왔었는데, 태극권이라는 게 양과 음, 우주를 이야기하는 무술이다. 그래서 손동작을 하나하나 드로잉 해서 사진을 찍어서 음양을 이야기하는 작품으로 만들었고, 다른 하나는 우주의 '빅뱅'을 주제로 했다. 빅뱅이라는 큰 폭발 안에서 아무것도 없는 세계, 세상에 물이 생기고 땅이 생기고, 생명체가 생기고, 인간이 생기고 그리고 또 인간이 죄를 지어서 추방당하고, 인간이 발전을 하게 되는데 결국엔 핵을 만들어서 모두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모두가 없어진 그곳에서 또 다른 생명체가 생기게 되는 순환 그런 걸 담은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이렇게 애니메이션 두 작품을 만들었는데 어린애들이 많이 좋아하더라. 뭔가 대중과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는데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Untitled-1851-grd, graphite, pigment, glue, acrylic colors on cement panel, diameter 51cm, 2018


아 또 제가 책도 썼다. '이것도 예술이야'라고 이렇게 현대미술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을 썼다. 요새 책을 안 산다고들 하는데 제가 천권을 제작해서 모두 팔고 재판도 했다. 그런데 다시 책을 내기엔 뭔가 부족한 것 같아 내용을 좀 추가해서 세컨드 에디션으로 발매했다. 그러니까 제가 바로 책을 두 번이나 쓴 화가이자 교수, 작가다.   

다양하게 시도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구리라던가 여러 소재를 가지고 토치로 가열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톱밥에 물에 담가 소재를 바꾸거나 변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렇게 노력하고 발전하려고 고민하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아무도 안 알아준다. 그래서 슬프다. (웃음)  

 

 

 



- 어머니도 작업을 하셨다고 들었다. 어머니 작업에서 영향을 받거나 하진 않았나. 

▲ 어머니는 꽃 그림을 그린다. 미술 작업에서 내가 교수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 어릴 땐 엄마랑 똑같은 게 싫어서 역사 책을 읽거나 써보는 걸 한다던가, 음악을 한다던가 그런 쪽에만 관심을 가졌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냉정하게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림을 참 좋아하기는 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미술을 선택했고, 또 엄마가 그렇게 교수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되지 않았던 모습을 보고 "난 진짜 대학교수가 돼야겠다. 누구한테도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라는 목표가 생겼다. 그래서 대학에서 졸업하자마자 당시엔 미대 다니는 학생들의 경우 대다수 학교를 졸업하면 결혼을 한다던가 중고등학교 교생, 선생으로 진로를 정했는데 나는 외국으로 유학을 갔다. 유학을 갔다 오고 나서 처음으로 덕성여대 시간강사를 나갔었는데, 제가 키도 작고 어려 보이기 싫어서 투피스에 안경도 쓰고 나이 들어 보이게 하고 갔는데 학생들이 나를 보고 "미대 다니시죠? 미팅하시죠"라고 말하더라. 지금에서야 좋지만 당시에는 진짜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어찌 되었든 내가 이후에 교수가 되니까 엄마가 그렇게 좋아하시더라. 자기가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못 했었던 교수를 딸이 되니까. 자기가 교수가 된 것보다 더 좋아해서 내가 교수를 한 게 잘한 거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확실히 내가 교수가 된 게 엄마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Untitled-1870-cm, copper, iron net, graphite, pigment, glue, acrylic colors on cement panel, 70 x70 cm, 2018

 

- 어머님의 영향이 있어서 미술도, 작가도 하게 됐다고 했는데, 혹시 따님분도 이런 예술에 종사하고 있나 

▲ 제 딸도 그림을 그리라고 시켰다. 그런데 한 학기를 다니더니 그러더라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은데, 그림을 보면 이걸 어떻게 팔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먼저 하고 있더라"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부끄러워서 더는 못하겠다"라며 그림을 그만두고 국제경영대학원을 진학해 스위스에 공부를 하러 갔다. 스위스에서 유학 도중에 독일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면서 스위스에서 정착했다. 스위스 도심에 있는 제일 큰 은행에 취직해서 지금은 비즈니스 매니저까지 올라갔다. 딸이 잘 돼서 좋기도 한데, 딸 때문에 그 비싼 스위스 시내를 가는 게 조금 싫다. 너무 비싸기도 하고, 입맛도 잘 안 맞더라. 그래도 딸을 보려면 가야 해서 고민이다.  

- 들어보니 여행도 많이 다니시는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여행지가 있나. 

▲ 저도 그렇고, 오택관 작가도 그렇고 여행을 많이 좋아한다. 같이 많이 다니기도 했고, 우린 여행 가서 밥도 잘 먹고 길도 잘 찾아다녀서 책하나 들고 어디라도 여행을 잘 다녔다. 그중에 기억나는 곳이라면 아마 인도가 있지 않나 싶다. 여행 중 한 호텔에 들렸었는데, 우리가 옷을 빨아 말리는 모습을 보고 호텔 주인이 자기들이 빨아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맡겼는데, 난 그런 서비스는 처음 받아봤다. 어느 호텔보다도 더 뽀송뽀송하고 막 내가 더 미안해질 정도로 완벽하게 빨래를 해왔다. 그런데도 우리 돈으로 한 몇백 원 정도만 받아서 너무 미안했다. 그리고 우다이푸르 레이크 팰리스 호텔이라고 영화 <007-옥토 퍼시>에 주 촬영지가 있다. 한국에서 패밀리레스토랑 가는 정도의 돈으로 진짜 우리가 왕족이 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음식도 맛있었고, 주위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멋있었다. 

 


- 여행을 통해서 영감을 얻은 게 있다면. 

▲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영감을 얻은 것도 있지만 일단 결과물로 보자면, 제 책이 아닐까 싶다. 여행을 다니면서 제가 보고, 감동받은 작품들을 모아서 책으로 만들었다. 내가 직접 보고 찾았던 작품들 특히 미켈란 젤로나 피카소 등의 유명한 작가부터 우리가 잘 모르는 작가들까지 담은 것 같다. 아 작품에도 영향을 주기도 했다. 엄청나게 큰 작품들을 감상하거나 보고 나서 나도 뭔가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 미국은 땅이 넓어서 그런지 작품이 높은 천장에 꽉 차는가 하면 한쪽 벽면을 가득하게 한 작업들도 많았다. 내가 크기가 아담해서 그런지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작품을 크게 만들기 시작했다. 어떤 작품은 높이가 3M가 넘는 작품도 있고, 또 어떤 작품은 길이가 9M가 넘기도 한다. 아쉬운 점은 그런 큰 작품들을 전시할 공간이 얼마 없다는 점? 지금은 시멘트를 활용한 작품을 하고 있지만 다시 큰 작업들을 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 작가 조기주가 생각하는 10년 후 미술계는 어떨까. 

▲ 사람들 모두 다 예술가가 되어 있을 것 같다. 예술은 계속 남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술을 표현하거나 보여지는 모든게 더 쉬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사진이라는 게 쉬워졌고, 모두가 다 사진을 찍고 있기 때문에 예술이나 그런 벽이 낮아지고, 옅어지게되지 않을까. 조금 더 쉬워지고 색이 더 드러나고, 사람들이 보는 이미지가 더 편안하게 다가가는 그런 세상이 올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게 다 담기는 그런 세상. 그냥 삶이 예술이고 예술이 삶이고, 지금보다 더 대중과 같이 살아가는 세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사진이 대중화되어 있지 않다보니까, 못 찍으니까 자화상을 그렸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다 셀카 전문가들이고, 모두가 다 작가나 마찬가지 일 거라고 생각한다.

 

 

 

Untitled-1833-sl, silver leaf graphite, pigment, glue, acrylic colors on cement panel, 33 x33 cm, 2018


- 미술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어린 친구들이나 학생, 후배들에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제가 책을 써가지고 대학교에서 4학기 강의를 했었다. 제 책에도 그런 이야기를 썼지만 확실하게 말하자면, 예술 만이 옮다는 게 아니라 예술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고 누구나 배울 수 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자기의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알지 못 한 상태에서 세상의 관점을 따라가면 나는 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내 관점을 확고히 하고, 세상의 관점을 공부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남들은 모르는 블루 오션도 볼 수 있다. 누군가는 변호사가 좋다고 하지만 사실 지금 변호사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많다. 이제 하면 늦는 거다. 예술이란 곳에서도 이전부터 수많은 작품들이 나왔는데, 그 사이에서도 틈새가 있다. 그게 내 관점이다. 나에 대해서 알면 확실하게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남을 따라가지 말고, 내 관점을 갖자.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걸 찾아서 직접 해보자." 


이게 제일 중요하다. 이런 관점을 갖는 게, 예술가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업계 업종에 일하고 있는 직장인, 학생과 선생 등 모두가 무엇을 하건 자신감을 주고 내 일을 펼쳐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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