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주나라를 꿈꾼 조선의 혁명 '주나라와 조선'
[신간] 주나라를 꿈꾼 조선의 혁명 '주나라와 조선'
  • 한국증권신문 기자
  • 승인 2017.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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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주나라를 이상국가의 모델로 삼았나

주나라는 공간적으로 수만 리, 시간적으로 수천 년 떨어진 이질적인 중국 중원의 고대국가이다.

혁명설계자 정도전은 역사 속의 주나라를 호출해 새로운 나라 조선의 각종 제도 및 도성건축까지 본받으려 했다. 조선 후기의 선비들은 말끝마다 존주사대(尊周事大)와 존화양이(尊華攘夷)를 부르짖었다. 이처럼 조선 5백 년을 온통 사로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주나라를 오늘날의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주나라와 조선의 저자는 뜻밖에도 우리와 연관 깊은 주나라의 실체에 대해 거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면서 주의를 환기시킨다.

 

주나라와 조선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서 태어난 제도들

 

주나라는 자국보다 10배 이상의 강대국인 은나라(이하 은상)를 쓰러뜨렸다(대략 기원전 1046년경으로 추정). 주나라가 맞이한 최대의 과제는 어떻게 강대국 은상의 유산을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느냐였다. 이를 위해 주나라는 천명, 종법과 봉건 제도, 예악, 공평한 분배구조 등을 동원한다. 주의 새 나라 건립은 무왕이 달성하지만, 이런 여러 제도를 만들어내고 정착시킨 사람은 그의 동생인 주공 단()이었다. 이후 주나라는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나라의 간판을 내릴 때까지(대략 기원전 256) 장장 700여 년간 중원의 중심 노릇을 했다.

이 책은 주나라가 당대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천명, 종법, 예악, 분배(공평성)를 어떻게 완수했는지 이야기한다. 동시에 조선에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주나라의 상황과 교차시켜가며 설명한다. 그리하여 주나라와 조선의 같은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인지를 따져보며 최종적으로 주나라가 조선에 미친 영향을 개괄하고 있다.

작은 인구로 많은 인구를 다스려야 했던 주나라는 은상이 멸망하고 주나라가 흥기한 것에 대해 천명이라고 내세웠다. 그리고 전국토를 대상으로 봉건(封建)을 실행해 왕실 인척들이 각 지역을 장악하도록 한다. 아울러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으로 나누는 종법을 내세움으로써 각 제후들은 모두 종가 중의 종가, 즉 주왕실을 받들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왕실과 제후국은 그저 종법을 지키기만 해도 왕가를 호위하는 셈이 된다. 이를 예악 제도로 정착시켜 모든 주나라 사람을 이성적으로 규율하도록 만들었다. 아울러 정전법을 모티프로 삼은 토지제도를 합리적으로 운용함으로써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다. 이것이 종법과 봉건과 예악을 한 묶음으로 진행한 주나라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런 조치를 주도적으로 행한 인물이 바로 주 무왕의 동생 주공이었다. 그는 왕이 될 만한 실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소종으로서 대종을 모시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종실제도의 완성을 꾀한다. 유가를 창립한 공자는 이런 주나라와 주공을 이상적 모델로 삼았다. 이후 유학자들은 주나라와 주공 받들기에 신명을 바쳤고 마침내 14세기 말 조선에서 이런 유가의 가르침으로 혁명을 실천한다. 그것이 곧 조선의 건국이다.

조선은 천명사상을 내세워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며 토지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이후 세종이 예악을 마련하고 세조와 성종 대에 이를 제도로 정착시켰다. 그러나 소국이 대국을 통할해야 했던 주나라와 달리 조선은 봉건과 종법을 시행할 상황이 아니었다. 조선의 경우 이민족도 없었고 중앙집권적인 국가 시스템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법과 봉건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조선 초기에 토지개혁과 예악제도를 마련하고 종법제도 등을 한정적으로 도입해 사회적 안정을 꾀한다. 조선 500년의 기틀을 조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종법이란 사슬에 묶여 버린 조선

 

1112세기 동안 중앙집권 국가인 송나라에서 사대부들은 종법 및 봉건 문제와 관련해 집안에 가묘를 세우고 왕가에 대한 충성을 가문에 대한 충성으로 변환시키는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것이 집안에 사당이 들어서게 된 근원적인 이유이다. 지난날 부모에게만 제사를 지낼 수 있었던 사대부의 예도 ‘4대봉사’(4대조까지 모시는 제사)로 확대하여 권위를 높이려 들었다. 이런 사항들은 주희의 제자들이 펴낸 주자가례에 담겨 있는데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도입했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의 양난 속에서 사대부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종법예학을 철저히 내세워 사회적 신분질서를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사대부 가문에서 혈연과 가문을 묶는 고리로써 힘을 발휘하게 됐으며 많은 부작용을 수반했다. 17세기 후반부터 종갓집에는 가묘가 세워졌고 제사의 권한은 문중의 대를 이은 대종에게만 주어졌다. 자연히 장자상속제가 도입됐고 서자와 여자들은 지독한 차별을 받게 되었다. 또한 왕가에 대한 의무는 뒤로 밀리고 가문에 대한 의무만이 강조되며 벼슬살이는 가문을 떠받치는 사적 이익을 위해 기능하게 됐다. 결국 족보가 발달했으며 사회가 건강성을 잃고 집안의 내력만 따지고 들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흐름이 혈연·지연·학연 따위가 횡행하는 퇴행사회를 불러왔고 종법이 조선의 멸망에 일정하게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제도들에 대해 마치 수천 년간 이어져온 우리 고유의 전통이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만 하더라도 조선에 비해 여권이 잘 보장되고 있었음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의 퇴행적 유산 중 많은 것들이 기껏해야 수백 년 정도의 연한밖에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주나라의 흔적

 

경복궁의 좌우로 종묘와 사직이 자리하고 있다. 흔히 우리는 이를 왕실 조상을 모시는 종묘와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는 사직단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수적으로 밀리는 주나라가 다수의 은상 유민을 다스리기 위해 낙읍에 주나라 조상의 묘당과 은상의 묘당을 함께 설치한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주공이 분봉 받은 노나라에서는 굳이 은상의 조상을 받들 일이 없었으므로 묘당이 하나였다는 것이다. 이는 춘추전국시대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러했다는 것이 이 책의 지적이다. 조선 왕조에서 그러한 주나라의 법식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우리 역시 두 개의 묘당을 설치하게 됐다.

그 밖에 종가 및 제사, 호주상속제, 성씨제도, 족보, 과부재가금지법이나 열녀문, 서얼의 차별 등과 관련된 문화 흔적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는 현재진행형의 사안들이다. 종법을 도입하여 남자·장남 중심의 사회구조가 만들어지고 이를 호주제도 및 성씨제도로 정착시키는 한편 족보를 통해 공고화했다. 당연히 여자들의 삶을 집안의 가사노동에 한정시키고 청상수절을 강요하며 서얼들을 차별함으로써 소수 기득권자들의 우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 했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모두가 양반이 되기 위해 전력질주한 것이 조선 사회였다고 총평할 수 있겠다. 조선 초기에 10퍼센트 미만이었던 양반의 숫자는 조선 후기 70퍼센트까지 치솟았다. 노비를 제외한 극소수의 양민이 군역을 담당했기 때문에 이미 나라를 지킬 사람은 조선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상국가 주나라의 제도 도입은 조선 초기에만 해도 일정한 정도의 개혁적 기능을 수행해 조선 왕조의 기틀을 세우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했으나 중후기를 지나면서는 시대를 억누르는 퇴행적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 이 책의 진단이다. 저자는 시대적·역사적 전환기의 과제를 극복하기 위해 주나라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은 조선조의 역사를 훑어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한다. 그런 면에서 주나라는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갖고 살펴봐야 할 역사임에 분명하다.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 선정작이기도 하다.

<저자 장인용/ 출판사 창해/ 페이지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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