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현실과 국민정서 감안한 국가발전 전략
한국의 역사현실과 국민정서 감안한 국가발전 전략
  • 한국증권신문 기자
  • 승인 201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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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의 국가경영 리더십 교훈(6)

 

▲ 1977년 최다금수출업체인 현대조선중공업의 정희영 사장에게 60억달러 수출탑을 수여하고 있다.(1977. 12. 22)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경영리더십교훈 ⑥

필자는 언론인 출신 정치인 경력을 갖고 있지만 학문적으로 정치학을 전공했거나 대통령학을 공부하지 않았다. 정치부 기자로 17년 동안 정치현장을 취재했고 1년 남짓 정치부 데스크를 맡았다. 정치부기자 18년 가운데 8년 가까이 청와대를 출입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하는 현장을 지켜보고 신문에 대통령의 움직임과 지시 내용을 하루하루 빠지지 않고 상세하게 보도했다.

국가원수인 박정희 대통령이 국내외 정세에 어떠한 견해와 관점을 갖고 어떻게 분석하고 대처했으며, 정치, 경제, 외교, 군사, 안보의 제반 현안을 해결하면서 당면한 위기를 어떻게 수습하고 극복했는지, 사안의 진행과 대책의 결말을 살펴볼 행운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성품 소탈하고 서민적천부적 카리스마 유지

박 대통령은 평소 표정이 없고 무뚝뚝한 경상도 촌사람으로 태어나고 자란 평범한 선비집안의 후손이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으로써 반드시 갖추어야할 카리스마를 유지했다. 영남유림의 후예는 고관대작 보다는 학문과 자연을 벗하는 선비의 삶을 좋아했다. 전통유가의 선비는 성격이 강직하고 청렴하며 올곧은 편이었다.

18년동안 권력의 정상에서 정치권력과 국정운영의 전반을 좌지우지했지만 대통령의 친인척이 부정부패에 연루되거나 청렴성에 대해 비판받은 경우는 전혀 없었다. 박 대통령 주변의 권력관리 및 친인척의 통제 부실로 문제나 시비를 일으키지 않았다. 대통령이 본인 스스로 도덕성의 실천과 측근관리에 실수나 허점을 보이지 않았으며 성격적으로 늘 완벽함을 선호했다.

대통령이 앞장 서 깨끗하고 단호한 몸가짐으로 국사를 다루고 있는 까닭에 대통령의 명령과 지시가 거부되거나 이행되지 않는 불상사는 예상할 수가 없다. 그만큼 권위와 영향은 지엄하다고 보면 된다. 63년 제3공의 대통령 취임후의 리더십이 탁월한 이유를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먼저 정치역량과 권력관리의 원천과 배경은 위에서 밝힌 출생과 성장과 수학(修學{)의 과정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다음 61년 5.16군사쿠데타를 거사할 때 보여준 생명을 건 구국(救國)의 용기와 결단에서 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출발한 것으로 봐야한다.

8.15 해방후 정부와 정치를 책임지고 혼돈의 나라를 이끌었던 기성 정치인과 구시대 관료들은 박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군사혁명 정부에 반기를 들거나 이의를 제기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박정희 소장 등 5.16 초기 군사 쿠데타의 고위급 지휘관과 혁명주역들의 충정과 위세에 제압당해 그의 리더십은 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집권 초기부터 형성됐던 것이다. 학구적으로 분석하면 국가를 경영하는 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물리적 힘을 행사할 수 있었던 61년부터 63년 제3공 정부출범에 이르기까지 2년여에 걸쳐 쿠데타라는 비정상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튼튼하게 기초를 다졌다.

당시 기성 정치세력의 무능과 부패, 남한내의 좌우 이념갈등과 안보위기, 사회불안과 민생고등에 등을 돌린 민심의 심각한 이반현상이 군사쿠데타를 주도한 박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해 다수 국민이 지지를 표시한 것도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고 있다. 권력의 힘을 동원하고 불법적 수단을 이용해 국민의 불만과 반대를 일시적으로 잠재울 수는 있어도 결코 영속할 없는 것이 정치권력이다. 국민적 동의와 호응을 얻지 못하면 언젠가 그 권력은 무너지는 것이 역사의 순리이며 만고불변의 이치이다.

박 대통령이 서거한지 3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숙원을 이룬 대한민국의 위대한 대통령으로 존경받는다. 그 이유는 60년대 집권초기 강권을 사용한 불행한 기억도 없지 않았지만 직접 박 대통령을 지켜본 다수 국민들의 지지가 바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 무역입국 박대통령 친필휘호

많은 정치인과 고위공직자 헌신과 봉사의 충성 다짐

박 대통령은 성격이 신중하며 과묵하고 말수가 적은 전형적 경상도 기질을 타고났다. 의리와 인연을 중시하며 신의와 약속을 지키는 평소의 성품이 주변에 돋보여 인재들이 모여 들었다. 천기가 누설되고 보안이 유지되지 않으면 목숨을 내놓아야하는 군사쿠데타를 모의하기 시작한 군부시절부터 생사를 함께한 혁명동지들이 의기투합해서 5.16을 성공시켰다.

거사 당일 우왕좌왕하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해 육군의 고위 장성들과 육사 5-8기 영관급 장교 등 핵심세력을 포섭하고 해병대도 하루만에 5.16에 동참시켰다. 이는 군내에서 군사혁명의 주역인 박정희 육군소장의 진솔한 인품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정의감 등을 좋게 평가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사람을 다루고 인재를 고르며 부하를 통솔하는 일도 대통령 리더십의 아주 중요한 분야이다. 국정을 운영하거나 정책을 집행하는 행정업무는 국가공무원이 담당한다. 적재적소에 유능한 인재를 기용하고 최선을 다해 나라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공직자를 임명하는 사람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다.

행정각부처 장관, 육해공3군, 각급정보기관, 검찰, 경찰, 국세청, 국공기업, 대통령비서실, 집권정당을 망라한 정치, 행정권력의 핵심기구들 일사불란하게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조정역할을 하는 최고지휘관도 대통령이다.

권한도 막강하지만 책임 또한 무겁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지만 재임기간 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역대 어떤 대통령도 추종을 불허했다.

정권을 창출하는 주도역할을 다 했을 뿐 아니라 정권의 최대주주였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5.16 쿠데타의 핵심동지였고 조카사위였으며 혁명의 기획자였던 제2인자였던 김종필 초대 공화당의장도 집권초기 자의반 타의반(自意半他意半)의 외유를 떠나면서 박 대통령의 리더십을 공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박 대통령도 61년과 63년사이 최고권력의 리더십을 구축하고 굳히는 과정에서 정치적 무리수도 불사하면서 강권과 물리력을 동원해 뜻을 이룬 기록들도 남아있다. 5.16 거사당일과 다음날 장면  총리와 현석호 국방장관을 체포했으며, 혁명정부와 새정부를 꾸려가는 과정에서 의견충돌과 불협화음 등이 불거져 장도영, 김동하, 박임항씨 등 일부 군지휘관을 반혁명재판에 회부한 불상사도 있었다.

이같이 대통령의 리더십과 지도력은 정치제도와 권력을 배경으로한 강제력으로 형성되고 지속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집권초기에는 박 대통령이 기존 정계, 관계, 재계는 물론 일반국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탓에 리더십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던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대통령 권한대행을 역임한 군사혁명의 최고 지도자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면서 국내외적으로 지위에 걸맞는 리더십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63년 대선과 총선의 승리로 정권의 기반이 안정되면서 박정희 대통령 개인의 리더십의 진면모가 정관계와 국민에게 알려졌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리더십의 특징은 생사를 초월한 쿠데타를 결행한 성격과 배경도 한몫 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권위를 인정받고 국민들의 공감을 얻었다. 더불어 박 대통령과 뜻을 같이해 혁명에 가담했거나 공화당 정부와 정권 출범이후 참여한 정치인과 정부쪽 고위공직자의 반응도 기대이상으로 호의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대통령은 한번 맺은 인연을 중시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특유의 인간성에 호감을 크게 얻었다. 대통령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존경하고 운명을 같이하는 동지가 되고 상관과 부하로서의 의리를 지키는 끈끈한 관계로 발전했다는 경험담을 많이 들었다. 정권초기인 60년대 후반에 이런 저런 케이스로 발탁되거나 기용된 민간인 출신의 고위관료와 전문학자들은 인간 박정희를 교주처럼 받드는 박 대통령 신봉주의자를 자처했다.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김정렴, 김용환, 정소영, 오원철, 최각규, 임방현씨를 비롯해 타계한 남덕우, 김학렬, 김성진, 류혁인씨 등은 자서전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간 박정희의 국가경영능력과 개인적 리더십의 면모를 증언했다. 국정에 분주한 박 대통령은 불치의 신병으로 현직을 떠난 김학렬 전부총리가 입원한 병실을 직접 찾아 문병할 정도로 자상하고 부하를 사랑했다. 5.16 쿠데타 후 국가재건 최고회의장 시절 당시 퇴계로 코리아하우스로 대구사범 선후배, 동기, 은사들을 초청해 오찬을 베풀고 인사를 나누었다. 또 불미스러운 일로 공직을 물러나거나 생활고와 신병으로 고생하는 혁명동지나 전직공직자의 생계를 소리없이 돌봐주는 배려심이 남달랐다.

국가권력의 최고정상을 차지했어도 희생과 봉사를 다한 뒤 자리를 물러나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과거의 동지와 아랫사람들을 모두 배려하고 챙기기는 쉽지 않다. 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무섭고 두려운 권력도 역할을 했지만 상대를 우선 배려하고 포용하는 인간성과 진정성이 더 큰 몫을 했다고 회고하는 측근들이 많았다.

진정성 있는 한국적인 리더십이 핵심과 본질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를 주고 쓸 돈까지 마련해 주는 리더십은 정당하지도 않고 오래 가지도 못한다. 박 대통령은 힘쓰는 자리를 미끼로 인재를 찾는 구차하고 부도덕한 방법을 쓰지 않았다.

일단 적재적소에 인물을 기용하면 자신의 국정철학을 행정일선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주는 용인술을 구사했다. 대통령 비서실 참모, 각 부처 장관, 국영기업 사장, 지방자치단체장, 국군의 주요지휘관을 한번 임명할 경우 당사자에게 신뢰를 부여한다. 능력을 인정하면 상당히 오랜기간 일하게 하여 소기의 행정 성과를 거둘 수 있게 지휘감독했다.

박 대통령의 독특한 인사와 관리의 스타일은 모시고 같이 일해본 고위공직자 누구든 간에 리더십에 자연스럽게 승복하고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된다고 밝힌 전직 장관들을 많이 봤다.

박 대통령의 리더십을 엄격하게 분석평가하자면 권위주의적 리더십과 민주주의적 리더십이 혼재(混在)한다. 공화당 정권의 만년 제2인자였던 김종필 전 총리가 회고했듯이 후자의 민주주의적 리더십은 박 대통령만 갖고 있는 선비정신의 인간성과 남다른 배려심에 감복(感服)한 정치인들과 고급관료들의 후일담으로 전설처럼 전해온다.

박 대통령의 국가경영 리더십은 한국전래의 유교사상과 토속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 같다. 8.15 광복후 우리나라가 선택한 정치제도는 서구 민주주의의 그것을 그대로 도입함으로써 한국인의 체질과 관습에 적응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역사가 다른 서구 민주주의 정치에 걸맞는 대통령의 리더십 일지라도 우리에게는 내면과 본질을 깊이 따져보면 뭔가 어색하고 한국사람의 몸에 잘 맞지 않았다. 쿠데타 초기에 박 대통령과 김종필씨는 한국적 민주주의, 한국적 민족주의를 표방했다가 국수주의(國粹主義)라는 비난과 오해를 받았었다.

박 대통령은 재임 18년 동안 내내 한국의 실정과 역사에 부합하는 정치철학과 리더십을 구현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 했다. 72년 단행한 10월유신도 그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대다수 국민들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유교적인 도덕성 교육을 받아왔으며, 가부장적(家父長的) 가정의 오랜 관습에 의존해 살아왔다. 때문에 서구적 민주주의의 정치구조에 적응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박 대통령의 능률과 질서를 우선하는 10월유신의 제반조치는 필연적으로 서구 민주주의를 추종하는 야당과 재야세력의 반발과 투쟁을 불러왔다. 정치권은 민주와 반민주로 양분되어 갈등과 반목이 심화됐다. 고도성장과 국력배양을 위한 경제발전을 지상주의로 내건 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7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서는 반유신, 반독재의 심한 파열음을 내고 미국 등 선진국은 인권탄압을 빌미로 거센 압박을 가해왔다.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최측근의 흉탄에 쓰러질 때까지 국가발전 전략을 지상목표로 설정한 인간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의 리더십은 미래를 향해 전진만 계속했을 뿐이지 결코 후퇴하지 않았다.

육군대장 박정희 장군은 1963년 8월30일 강원 철원 5군단 비행장에서 열린 전역식 고별인사에서 “5월혁명은 단순한 변혁도 외형적 질서 정비도, 새로운 계층형성도 아니다”라면서 “상극과 파쟁, 낭비와 혼란, 무위와 부실의 유산을 조상과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우리들 불운의 세대가 이 오염된 민족사에 종지부를 찍고 자주와 자립으로 번영된 내일의 조국을 건설하는 것이 5.16혁명의 궁극적 지표”라고 박정희 리더십의 방향과 꿈을 제시했다. 오늘날 한국의 세계 10위권 발전상을 감안하면 농촌의 선비집안 출신의 박정희가 위대한 선견지명의 통찰력을 가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측근에서 보좌한 장관과 명참모들의 리더십 증언

박 대통령 재임 18년 동안 그의 곁에서 국무총리,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수석비서관, 특별보좌관, 비서관, 국영기업 대표, 국책연구소장등을 거쳐간 인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세월을 이기지 못해 타계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이 모시고 같이 일해 본 경험과 소회를 소개한다.

▲ 조국근대화를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의 부국강병정책을 보좌하며 9년3개월 동안 비서실장을 역임한 김정렴 씨.


9년 3개월의 최장수 비서실장을 역임한 김정렴(91)(재무, 상공장관, 주일대사 역임)씨는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 리더십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평가했다.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의 경제정책 수행 능력에서 나왔다.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 정부주도의 경제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부주도의 경제정책 시행은 경제학자들이나 경제교과서에서 강조하는 것과는 반대된다. 박 대통령은 오히려 반대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오늘날 많은 후진국에서 강력한 정부 주도의 박정희식 경제개발이 오히려 효율적이라고 믿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을 따라 배우자고 야단들이다” 한국의 후진성을 빨리 탈출하려면 고속 발전과 압축 성장은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정책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김정렴씨와 함께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 브레인 투톱역할을 했던 남덕우 박사(1924~2013 재무,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 경제특보)는 강연에서 “박 대통령은 신이 아니다. 그의 부정적 측면을 합리화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긍정적 측면을 무시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역사의 주역을 담당한 지도자 박 대통령에게 양면이 없을 수 없다”고 풀이했다. 남덕우씨는 “이념의 지도자를 존경해야지만 동시에 실천의 지도자도 이해하고 존경해야 한다”면서 박 대통령의 실천적 리더십 덕분에 선진한국의 번영을 창조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 국무회의를 끝으로 물러난 남덕우 경제기획원 장관이 신임 신현확 부총리의 배웅을 받으며 장관실을 나서고 있다(1978.12.22)

청와대 대변인과 문화공보부장관을 지낸 언론인 출신의 김성진씨(1931~2009)는 기고에서“박 대통령을 깎아내리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박 대통령을 이 나라의 수호신으로 국민들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게 만들 것”이라고 종북세력과 진보진영의 박 대통령 폄훼 책동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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