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의 철학과 안목은 역사의 인식·교훈이 바탕
국정의 철학과 안목은 역사의 인식·교훈이 바탕
  • 김길홍 회장
  • 승인 2015.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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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 추억과 비화 연재10

한국역사의 인식과 교훈 통치의 반면교사로 활용

대통령의 리더십은 역사적 현실과 시대적 상황에 따라 평가가 다양한 것이 사실이다. 권력기반이 절대적인 군왕의 권위와 맞먹는 제왕적 대통령이 국가를 경영하는 리더십은 독재와 독단이라는 비판과 견제를 받는다.

반대로 민주주의 법치 원칙에 따라 언론, 인권 등의 자유가 보장되고 삼권분립의 권력구조가 운용되는 체제하의 대통령이 발휘하는 리더십은 다르다. 반대당과 타협하고 대화하는 소통과 조정의 능력이 평가받는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다.

5.16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대통령이 조국근대화라는 혁명공약과 국정지표를 제시한 60년대 초반은 그의 다짐과 포부가 국민의 호응과 지지를 받기에 적절한 시기였다. 이승만정권의 선거부정과 독재정치는 4.19 학생혁명의 단초가 됐다.

이승만 하야후 집권한 약체의 민주당 정권도 신구파의 갈등과 좌우의 이념투쟁으로 정국이 불안했다. 국민이 먹고 사는 민생문 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장면내각의 무능을 탓하고 있었다. 때문에 박 대통령이 주도한 쿠데타가 물리적 힘과 대국민 명분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거사 직후불안했던 사태의 즉시 평정과 권력의 완전장악이 쿠데타의 성공을 가능케 했다. 오래전부터 사상초유의 쿠데타를 준비해온 박 대통령은 군사혁명에 참여한 현역군인들의 기용과 혁명정부의 편제 등 조직구성 등에서 돋보이는 혁명 지도자의 리더십을 국민 앞에 처음 선보였다.

서울 시청 앞에 모습을 드러낸 육군소장 박정희의 군복 입은 첫인상은 단단하고 적은 체구에 굳게 다문 입을 보면 단호하고 강직한 성품이 뚜렷해 보였다. 군내부에는 잘 알려진 장군이었으나 정치 쪽이나 민간에는 낯 선인물이었다.

5.16 당일 기아선상의 민생고를 해결하고 반공을 국 시로 하는 요지의 혁명공약을 발표한 박정희 리더십의 방향과 실체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혁명정부 2년까지 포함해 18년을 대통령으로 재임한 박정희의 리더십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지만 청와대 출입기자 8년의 경험과 취재를 종합하여 분석해 보았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덕목으로 리더십 발휘

대통령 박정희는 한국의 정신문화의 본고장과 전통 유교의 중심이었던 경북 태생인 사실을 주목해야한다. 선비가 갖추어야할 인성(人性)과 덕목으로 지칭되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가정과 학교 교육을 받고 성장했다.

농촌의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했지만 영남유가의 선비후예로서 양반이 지켜야하는 예의범절과 동양윤리를 배우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가난했지만 비굴하지 않았으며 부정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은 어릴적부터 가정에서 보고 자랐다.

박 대통령을 가까이서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한나라를 호령하는 대통령이었지만 국정에 대해 지시하거나 주변인물을 다루는 모습은 옛날 서당에서 한문을 가르치는 백면서생 같은 선비의 인상이 물씬 풍겼다.

그림자도 밟지 않는 다는 스승의 체취가 풍겼다. 또 한편으로는 자상하고 근엄했지만 범접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면모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올곧은 선비정신과 면면히 이어온 가문의 역사와 전통이 성장한 후에도 몸에배어있었다.

박 대통령이 받은 인성교육의 바탕에는 전통유교의 정신과 맥락이 스며있다. 거기에다 구미 보통학교와 대구사범 등 일제하의 제국주의 교육을 받았다. 절제와 품위와 예절을 중시하는 박 대통령의 성품은 유년시절부터 배워온 까닭에 나무랄데가 없고 완벽했다고 할 수 있다.

넓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가정교육에서도 그렇고, 학교교육을 통해서도 올곧은 선비의덕목과처신을익혀왔다. 박 대통령은 평소 역사서적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동서양사를 꿰뚫고 있었다.

학창시절과 대구사범 졸업 후 문경 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을 때도 특히 역사를 가르치기를 좋아했다는 당시 제자들의 회고담도 있었다. 성장한 후에도 박 대통령은 한국, 미국, 일본, 만주 등지에서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는 군사교육을 10여년 동안 받았다.

이같은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선진 외국의 문물을 한국실정에 맞는 자기의 것으로 소화해서 공사생활의 양식과 생활의 지혜로 활용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5천년 가난을 몸소 체험했고 일제하에서 나라 잃은 통한을 절감한 지도자였다. 부국강병과 민족자존의 새로운 한국 역사를 개척해야겠다는 신념과 의지를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면서 키워왔다.

목숨을 건 5.16후 국가의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 박 대통령은 실제로 재임기간에 수없이 행한연설, 치사, 담화, 기자회견은 물론 일상적 대화과정에서 인용하고 적시하는 역사적 사실과 뼈아픈 교훈 등을 강조했다.

그의 역사의 흐름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해박한 지식은 전문학자들도 경탄을 금치 못했다. 주변 강대국의 핍박과 침략으로 인해 고통과 굴곡이 중첩한 우리민족사의 과거와 교훈을 자주 예로 들었다. 박 대통령의 확고한 국가관과 역사인식은 역사학자와 항상 담론과 대화를 심도 있게 나누어온 것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이병도, 이선근 박사 등과 주기적으로 만나 강론도 경청하고 토론도 함께 했다. 청와대비서실에 대통령 교육문화 특보를 신설하고 철학과 교수로 유명한 서울대 박종홍 박사를 임명하고 국정자문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문화가 정신을 지배하는 기본이라고 자주 역설했다. 문화재를 복원하면서 유독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격전지나 국토를 사수했던 명장의 동상을 우선적으로 지정하고 건립했다. 강화도 해변, 전북 금산, 제주항몽 유적 등의 문화재 시설을 확충했고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장군의 성역화 작업(현충사, 광화문 동상)을 추진했다.

민족의 자조, 자립 의지를 한국 정신문화의 근간으로 삼으려는 정신문화의 역사인식과 리더십이 기저를 이루었다. 대통령의 리더십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과 자질은 국가의 미래와 민족의 장래를 멀리 내다보는 안목과 식견이다. 박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화학공업 육성, 경제개발 5개년계획 등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플랜을 60년대부터 구상하고 준비했다.

혁명초부터 80년대를 내다보는 국가발전의 단계적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그의 국가경영 철학은 국가지도자의 능력을 사실 그대로 확인해주는 리더십의 실제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경제대국의 반열에 오르고 국민들이 번영과 풍요의 혜택을 누리는 사실은 박 대통령의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리더십의 특징은 안목과 실천이 중요

60년대부터 전국일원에 걸쳐 경제개발 사업들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행정 각 부처별로 나누어 시행되는 공장, 항만, 도로, 공단 등의 건설과 간척지 조성, 경지정리사업 등 수 많은 개발공사와 공장건설이 전국일원에 걸쳐 동시다발로 진행되고 있었다.

공사현장의 점검과 개발사업의 지도가 소관 행정부처별로 장관과 기관장의 책임하에 분담해서 이루어졌다. 총괄하는 지휘와 확인은 역시 박 대통령의 몫이었다. 박 대통령은 계획수립에 소요하는 시간보다 실천과정을 더욱 중요시하여 확인과 점검에 주력했다.

매년 연초 연례적으로 실시되는 행정부서와 지방관서의 순시는 물론 각종 경제개발사업의 기공, 준공식 참석, 진행 중인 공사현장 시찰 등의 분주한 행사 일정을 소화해 냈다. 현장의 확인과 격려도 빈번했지만 각종회의에서도 개발계획 수립과 실천의 중간 확인과 성과 분석을 철저하게 챙겼다.

부처간의 의견조율과 정책조정을 순조롭게하는 자유로운 토론과 부처의 의견개진도 병행하는 대통령 주재 정례회의가 자주 열렸다. 청와대 국무회의, 경제기획원의 월간 경제동향 보고회의, 상공부의 수출진흥 확대회의, 국무총리실의 정부정책 심사분석평가회의(평가교수단참여), 방위산업 진흥확대회의 등을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방산회의만 제외하고 청와대출입기자단이 전원 참석해 취재 보도했다.

정부 차원에서 정책의 자연스런 홍보에도 관심을 가졌다. 요즈음 경우와 비교되는 당정회의가 그때도 자주 소집됐다. 행정부와 집권여당이 입법과 정책을 조율하고 협의하는 정부와 여당연석회의가 때로는 박 대통령 주재하에 청와대에서 아니면 공화당의장과 당고위 간부, 총리와 장관 등의 참석하에 총리공관에서 열렸다.

독재와 독선으로 비판받아온 박 대통령이 국가발전에 필수적인 개발계획과 정부정책은 적어도 정부 여당의 협력과 통합을 통해 효과적으로 실천하려는 제한적이지만 민주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여유도 있었다.

남의 얘기를 천성적으로 경청하는 인내심에 경탄

청와대출입기자 8년, 대통령비서관 6년을 지낸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역대 대통령은 듣기 보다는 말씀을 즐겨 하는 대통령들이 많았다. 경륜도 풍부했겠지만 정부 각기관으로부터 올라오는 각종 보고서를 읽어야했다.

분야별 행정전문가인 중앙부처 장관, 대통령비서관, 전문학자 등과 수시로 면담하고 잦은 현장시찰로 체험한 다양한 자료와 검토 의견을 보고받았다. 이를 이해한다면 국정의 전반에 걸쳐 전문가 수준에 이를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체득한 지식과 소감을 얘기하기 좋아한다면 누구도 함부로 대통령의 말씀을 쉽게 제지할 수 없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성품이 원래 과묵하고 때로는 수줍어할 정도로 내성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한 지적에 오래 근접 취재했던 필자도 동의한다. 보통 박 대통령이 주재하는 공식회의는 보고를 청취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한시간 정도이다. 장관과 실국장 등이 차트와 슬라이드로 1시간정도 보고하는 동안 박 대통령은 부동의 앉은 자세로 경청한다.

중간 중간 의문나는 점이 있어도 지나치고 보고가 끝나면 장관과 실국장등에게 간단하게 확인한다. 때로는 관계장관의 토론과 의견개진을 유도할 때도 더러 있었다. 회의 분위기와 진행이 그렇게 경직되거나 딱딱하지 않았다.

비서실이 사전에 보고 올린 말씀자료를 절대로 보고 그대로 읽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대통령을 10년 이상 재임한 까닭에 나름대로 경험하고 터득한 경륜과 지식을 토대로 간단명료하게 지시하고 회의를 끝낸다.

필자가 회의도중 박 대통령이 잠깐 졸고 있던 모습을 한번 목격했다. 오찬후 1시간정도 보고가 진행되는 도중 식곤증으로 깜빡 존 아버지 박 대통령 옆에 앉았던 당시 큰따님 근혜양이 손으로 흔들어 깨우는 모습을 봤다.

그만큼 박 대통령은 상대방의 보고와 얘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고 배려했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정부와 자신이 최선을 다해 추진하는 중요 국정의 어젠다를 국민에게 직접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경우이다.

이때 시간도 충분하게 잡고 차분하게 설명하는 열정을 과시했다. 그 기회가 바로 매년 정초에 개최되는 박 대통령의 청와대 연두기자회견이다. 청와대 기자회견은 그때와 지금은 좀 다르지만 당시는 대변인실과 기자단이 사전에 조정한 질문과 답변의 순서로 진행됐다.

질문의 주제는 사전에 정해졌지만 박 대통령의 답변은 텍스트가 없었다. 기자회견의 말씀 자료는 대변인실에서 취합해서 작성, 보고했겠지만 박 대통령은 자료를 보지 않고 즉석에서 상세하게 답변했다.

국정전반에 그만큼 정통하고 통달했음을 뜻한다. 직접 국민과 대화하는 기회로 소중하게 생각했다. 보다 더 자세하고 알기 쉽게 정책의 내용과 자신의 국정철학을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TV로 생중계되는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은 최선을 다해 국민을 이해시키고 설득하기위해 노력했다.

그러니 그 설명도 길어지고 회견 시간도 1시간 넘게 계속됐다. 해마다 회견을 지켜보고 현장에 참석했던 출입기자들은 박 대통령은 보통국민을 상대로 대화하고 협조를 당부하는 진솔한 교사와 같은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언론과 자주 소통 및대화 정책결정의 민주적 운영

박 대통령이 이렇게 국정철학의 방향과 역점시책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국민에게 다가가 열정적으로 자발적 참여와 협력을 요청했다. 그 이유는 국정전반에대한 홍보의 중요성을 인정하고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국정의 홍보와 선전이 긴요하다는 판단하고 있는 박 대통령은 출입기자단. 정치부장, 편집국장, 주필, 언론사 사장들과 수시로 오찬, 만찬, 간담회의 형식을 빌려 국민여론도 여과 없이 수렴하고 자신의 국정의 운영방향과 통치철학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협조를 부탁했다.

소통과 대화의 리더십을 꾸준하게 보여준 것이다. 언론인과 인간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비타협적인 언론의 속성을 배려하는 도량도 보였다. 자유언론을 탄압한 대통령이라고 비난받았지만 조선, 동아, 중앙 등 메이저 신문의 사주와 공영방송의 사장등과는 안가로 초청해 사적인 친교모임도 자주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박 대통령은 정치와 행정에 권한과 책임을 철저하게 위임하는 국가운영의 체제와 방식을 끝까지 지켰다. 정치의 중심인 국회운영과 집권여당의 역할은 충성심과 정치력을 겸비한 국회의장과공화당 당직자에게 맡겨 정부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게 만들었다.

당시 대통령신임이 두터운 실력자급 장관이라 할지라도 여당과 국회의 권위와 영역을 존중하는 정치풍토를 조성해 주었다. 정치권력과 행정부의 기능을 적절하게 조정하는 최고권력자의 역할이 돋보였다.

민주화돤 요즈음처럼 당ㆍ정ㆍ청 간의 분쟁과 갈등은 허용하지 않으면서 지휘통솔했다.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대통령 중심제 하의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행정부처 장관들의 소관부서 공무원과 산하기관장의 인사권에 대해 청와대나 측근의 원칙 없는 간섭과 개입을 막았다.

부처별 소관 행정과 시책에 대해서도 소정의 상부 행정라인을 통하지 않고 함부로 시정과 변경을 요구할 수 없도록 행정체계를 다잡았다. 행정부안에서 엇박자를 놓는 혼선과 반대를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대통령비서실이 내각위에 군림하는 것을 금지했다. 장관의 권위가 서고 행정업무도 효율적으러 집행되어 소기의 행정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박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이 분명하나 정책의 결정과 절차 및 과정은 자유롭고 민주적 분위기를 짐짓 충분하게 고려했다는 여러 장관과 측근 참모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은 체념과 자학이 습관화된 국민성에 5천년역사상 처음으로 잘 살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민족의 대오각성을 실현한 것이다. 전국민을 국가발전에 자발적으로 참여시켜 개발의욕을 고취시킨 성공적인 영도력을 과시했다.

한국인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역량을 일깨운 경제발전의 지상주의가 가끔 굴곡과 좌절을 겪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오늘의 경제대국의 기반을 마련한 역사적 정치지도자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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