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지의 정통 ‘농협맨’, 김주하 농협은행장
입지의 정통 ‘농협맨’, 김주하 농협은행장
  • 백서원 기자
  • 승인 2014.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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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하 농협은행장

농협은행(은행장 김주하)의 거침없는 경영행보가 금융가의 화제다. 업황부진 속에서도 대출은 물론 예금, 펀드 등에서 농협은행은 업계 1위를 싹쓸이하고 있다. 그 중심엔 입지적 인물이 된 김주하 농협은행장이 있다. 2012년 농협금융지주가 출범한 후 2대 농협은행장으로 취임한 김 행장은 줄곧 농협에서만 근무한 정통‘농협맨’이다. 33년 넘게 농협에서만 근무한 덕분에 노동조합과의 관계도 좋은 편이다. 김 행장은 자신이 읽은 책의 독후감을 직원들과

공유하기도 하고, 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직원들을 직접 찾아가는 ‘스킨십 경영’도 즐겨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산골짜기‘책소년’

김주하(59) NH농협은행 행장은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읍내에서도 40리 넘게 한참을 들어가야 했던 산골짜기다. 김 행장이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57세였다. 김 행장의 아버지는 시골에서 가난하게 농사짓고 사는 명문 의성김씨 집안의 선비였고 어머니도 양가집 규수였다.

“집안이 쇠락한 탓에 산골짜기로 시집온 어머니는, 당신이 직접 베껴 쓴 책을 부엌방이 가득 찰 정도로 싸 가지고 오셨어요. 어머니는 항상 책을 읽으라 하셨습니다. 아버지를 도와 지게 지고 땔감도 해오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제가 지게를 절대 못 지게 하셨어요”

심지어 불교 신자였던 그의 어머니는, 김 행장이 교회에 가서 찬송가도 배우고 성경 말씀도 듣도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신식 교육은 못 받으셨지만 사고방식만은 신여성이었음이 틀림없어요.”

어머니 덕분에 어렸을 적부터 그는 많은 책을 읽었다. 그 덕분인지 유년시절 그는 1등을 놓쳐 본 적이 없다. 시골학교였지만 초·중·고 12년을 내리 반장을 했다“. 집안형편 탓에 서울로 가지 못하고 예천 읍내의 대창중, 대창고로 진학해 자취를 했죠. 그때는 제가 정말 똑똑한 줄 알고 자만심에 빠져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어요”

머리만 믿고 공부를 등한시한 결과는 대학 낙방이었다. 낙담한 그는 우연한 기회에 안병욱 숭실대 교수의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 이후, 숭실대 법학과로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문제였다.

그러나 그의 큰형수는 빠듯한 시골 살림에도 소 팔고 논을 팔아 김 행장의 등록금을 마련했다.

“어머니도 이미 일흔이 넘은 나이셨고, 큰형도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았어요. 만약 큰형수가 대했다면 대학 생활을 엄두도 못 냈을 겁니다.”

여신업무만 14년

대학 시절, 그는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지금의 아내를 과외 제자로서 처음 만났다. “물론 당시에는 고등학생인 아내를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아내가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연락은 계속 닿았고, 서로 호감을 키워가게 됐죠.”

김 행장은 그 시절 특별한 목표가 없었다. 대기업이나 은행 입사 시험을 치려고 했지만 법학을 공부했으니 농협중앙회가 좋겠다는 생각에 지원했다.

그는 명문대생들과의 24 대 1 경쟁을 뚫고 합격해 1981년 강원 양구로 초임 발령을 받았다. 1년 뒤 동기들은 서울로 발령을 받아 떠났고 그는 양구에서 2년을 더 일했다. 이후 발령이 난 곳은 경기 이천이었다. 결국 김 행장은 당시 농협중앙회장에게 편지를 썼다. “소까지 팔아 서울에서 공부하고 입사를 했으니 중요한 일을 맡기면 열심히 하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운이 좋았던지 4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더 만만치 않은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힘 있는 부서장들은 그를 외면했고, 권한보다는 책임이 더 커 남들이 기피했던 여신 부서를 돌았다. “시골 촌놈에다 학벌이 그저 그래서인지 끌어 주는 사람이 없어 여신업무만 총 14년을 맡았어요. 늘 야근을 했고 숱하게 밤도 새웠습니다. 아내는 늘 조용히 기다리며 제 건강을 챙겨줬죠.”

경기 침체와 금융 위기 등으로 굴지의 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지던 시절, 그의 여신 경험은 빛을 발했다. 그 경험이 지금의 김 행장을 만든 셈이다. 전적으로 ‘아내의 내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김 행장의 설명이다.

달라진 농협은행

어느 부서에 가든 처음엔 항상 설움부터 당하던 그였다. 명문대 출신 부장들의 못마땅한 시선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디를 가더라도 근무 한 달쯤 지나고부터는 인정을 받았다. 탁월한 기획력 덕분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삼국지를 비롯, 많은 책을 읽은 것이 큰 도움이 됐다. 매일 새벽 3시30분에 기상해 5시까지 독서를 하는 그는 주로 역사서를 읽는다.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 종교사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여러 시대, 여러 나라의 역사를 읽다 보면 서로 연결되는 부분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짜임새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죠. 기획에서도 중요한 것이 바로 짜임새입니다. 또 책을 통해 같은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미래를 예측하는 ‘기획’에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 행장은 ‘금융통’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빽도 줄도 없어 핵심이던 경제사업 업무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그가 정통 금융맨으로 인정받아 회사에서 주목받게 된 것이다. “저는 내세울 게 선후배와 동료들의 인정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그 인정만으로 은행장이 되더군요.”

농협은행의 예수금은 올 들어 7월까지 11조7000억원 늘었다. 은행권 1위다. 같은 기간 대출, 펀드수탁액, 방카슈랑스 판매수수료 증가액도 가장 많다. 그가 수장이 된 후부터 농협은행은 달라지고 있다. 카드 사태를 겪고 직원들에게 생긴 위기의식이 농협은행에는 전화위복이 됐다.

그 과정에서 김 행장은 직원들의 노력을 인정해 주고 스스로 일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는 실적이 좋은 지점과 부서에는 과장급 직원에게까지 직접 전화를 걸어 격려한다. 실적이 나쁜 직원들도 챙기며 ‘열심히 한 걸 잘 알고 있는데 결과가 좋지 않은 건 왜일까’라고 다독인다.

김 행장의 이런 노력에 힘입어 지난해 말 은행지주사 중 총자산 기준으로 5위에 머물던 농협금융은 올 상반기에 KB금융지주와 우리금융지주를 제치며 거침없는 약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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